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丸谷才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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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하루 종일 쫓기는 남자들을 동정하며 지냈다. 모두, 쫓기는 남자들. …… 하지만 그것은 모두 그들을 향한 동정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을 동정하고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모두, 나의 그림자. 나는 오늘 그들에게서 전쟁 때 징병 기피로 일본 전역을 목숨 걸고 도망 다니던 시절의 나를 보고 있었다.
--- p.51 “스기우라 씨도 비행기나 군함처럼 애들이 좋아하는 걸 그리면 더 잘 팔리지 않겠소?” 스기우라는 긴장감을 감추려고 애쓰며 모기향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불이 잘 붙을까? 손이 떨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비행기나 군함을 그리라는 건 단순한 발상일까? 아니면 속을 떠보고 있는 걸까? --- p.99 하마다는 지금까지 여러 위험을 헤치며 살아왔다. 우연의 연속 같은 것이었지만, 언제나 구조선이 하마다가 필요로 할 때에 딱 나타나 주었다. 아키코도 그리고 이나바 영감도. 확실히 요행의 연속.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상대로 오직 홀로 투쟁하는 일이 성공한다는 것은, 역시 그런 요행 없이는 불가능하다. --- p.117 “하마다 씨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거야. 그딴 곳에 안 간 것은.” “예, 예. 뭐.” 하마다는 애매하게 받아넘기면서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 프랑스어 교수는 나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친근감을 나타내기 위하여 군 생활의 체험담을 늘어놓았단 말인가. 구와노의 선량함과 둔함에 기가 찼다. 내가 몹시 거북해할 거라고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으리라. 게다가 내가 지금 이렇게 불편해하는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 --- p.181 야, 하마다 쇼키치. 이것만은 꼭 기억해 둬. 어쨌든 난 싫어도 군대에 갔고, 넌 가지 않은 거야. 그 차이를 알겠어? 오다와라의 여관집 아들도 그랬어. 그리고 내 분대원들도, 소대원들도 다 그랬단 말이야. 알겠어? 그 차이를. 내가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게 아냐. 절대로 그런 게 아냐. 분대원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리고 나가누마의 복수를 위해, 네놈을 해치우겠어. --- p.215 “결국 국가라는 게 있으니까 안 되는 거야.” 비교적 가볍게 내뱉은 그 말에 하마다는 충격을 받았다. 하마다는 그때까지 일본이 저지른 전쟁과 지금의 일본 군대에 대해서는 몇 번이고 깊이 생각했기 때문에, 중일 전쟁은 명분 없는 전쟁이며 일본군은 부패한 두려운 집단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 일본군 병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버릴 수밖에 없다. 즉 징병 기피를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까지는 해왔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일반적인 전쟁과 군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 p.350 ‘저 국가에서 날아온 그 소집 영장도 이렇게 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나는 이제 그 사람이 아니다. 끌려가서 싸우고 그러다 죽는, 순종적이고 선량한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공통된 운명이 있다. 그 공통성이 그들의 운명을 위로해 줄 것이다. 축복해 줄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나만의…… 고독한 운명이 있다. 나는 그 운명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는 자유로운 반역자인 것이다.’ --- p.417 |
스무 살의 평범한 젊은이
국가 체제에 반하여 징병 기피자가 되다 어떤 집단에서 다수의 보수적인 분위기에 거스르는 일은 그게 무엇이든 위험했다. 그렇기에 절대로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되고, 남들 눈에 띄는 일은 피해야 하는 게 당연한 사회 분위기였다. 그러나 도쿄의 의원 집 아들이자 평범한 젊은이인 하마다 쇼키치는 전쟁에 반하여, 국가 체제에 반하여 스스로 도망자, 즉 징병 기피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실행에 옮겼다. 하마다는 징병 기피를 위해 ‘스기우라 켄지’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이 되어 도주 생활을 시작한다. 스기우라는 시계 수리공 이자 라디오 수리공이었고, 또 한때는 모래 그림 화가였다. 돈을 벌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일본 전역을 떠돌았고, 어느 한 곳도 편히 마음을 붙일 수가 없었다. 누군가 자신을 의심하여 형사에게 밀고하진 않을까, 헌병에게 붙잡히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항상 전전긍긍했다. 하마다는 찬란했어야 할 이십 대, 청춘의 감각 대신 공포와 굶주림, 자유를 향한 갈망으로 점철된 어두운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도망친 남자와 남겨진 도망자 가족의 비참한 인생 ‘국가’라는 것의 목적은 전쟁뿐일까? ‘국민’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무엇인가? 징병을 눈앞에 둔 하마다와 친구들은 국가와 국민, 전쟁과 행복에 관해 심도 있는 토론을 벌인다. 전쟁에 대해 깊이 생각하던 하마다는 자신의 징병 기피의 이유를 네 가지로 나누어 생각했다. 첫째, 전쟁 그 자체에 대한 반대, 둘째, 지금 일어나는 이 전쟁에 대한 반대, 셋째, 군대에 대한 반대, 넷째, 이 군대에 대한 반대. 하마다는 나가서 싸워야 할 가치가 없는 이 전쟁의 명분 문제와 군대 안에서 일어나는 부조리를 견딜 수가 없었다. 명분 없는 죽음이 두려워서, 살고 싶어서 평범한 삶을 살았을 수도 있던 하마다는 국가의 반역자가 되었다. 징병 기피자의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항상 불안에 떨며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남겨진 도망자 가족의 삶은 어땠을까? 사인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어머니는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자살했고, 아버지는 매년 구청 병무과에 가서 도망간 아들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보고해야 했다. 남동생은 배속 장교에게 얻어맞아 고막이 터져 귀머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전쟁을 함께 겪었던 여자에게 떳떳할 수 없었고,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국가를 등진다는 일은 개인의 희생뿐만 아니라 주변인들까지 피해와 다짐을 해야만 하게 하는 비참한 일이었다. 기적 같은 징병 기피의 성공과 거둬지지 않는 과거의 그림자 전쟁으로 인한 우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마다는 끝까지 도망쳤고, 징병 기피는 성공했다. 이런 기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하마다도 자신조차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전쟁에서 살아남은 하마다는 평범한 삶을 사는 중이었다. 그러나 도망자, 범죄자에게 감정 이입을 하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하마다는 다시 한번 과거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어두운 과거는 지워지지 않은 것이다. 국가를 ‘배신’한 자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자격의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사회생활을 하는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일이었다. 가자·이스라엘 분쟁, 우크라이나 전쟁 등 우리는 지금도 끊이지 않는 전쟁으로 인한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전쟁이 남기는 것은 무엇인가? 전쟁 후 국민의 삶은 편안할까? 일본 내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자의 시선으로 본 전쟁, 그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 『조릿대 베개』는 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지 되짚어보게 한다. 또한 인간의 이기심을 꼬집고 인간성을 잃지 않은 자의 시선을 통해 전쟁을 반대하는 태도는 지금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