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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설원의 발자국을 따라서 7
제2화. 가출에서 출가로 31 제3화. 용문사 은행나무 아래서 57 제4화. 봉선사 가는 길 81 제5화. 월초스님과의 법거량 103 제6화. 친일과 항일의 사이 123 제7화. 의암 손병희의 가르침 139 제8화. 만해에 떠서 흘러가는 만월 151 제9화. 봉선사 사하촌에 울려 퍼진 독립만세 165 제10화. 서대문 형무소 창살에 내리는 햇살 183 제11화. 일왕의 생일, 독립운동가의 생일 195 제12화. 수행자의 길, 혁명가의 길 215 제13화. 형제지간, 사제지간 231 제14화. 국사와 불사 247 제15화. 독립운동가의 마지막 가는 길 265 부록. 봉선사 소개 289 사찰 안내 291 운암(雲巖) 김성숙(金星淑) 행장 2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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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독립도 다르지 않으리 그 길로 김성숙은 스님을 따라 양평 용문사로 가서 승려가 되었다. 독립군이 되겠다고 집을 나섰다가 스님이 된 것이다. 그 후, 봉선사에서 월초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며 만해 한용운 스님과 의암 손병희 선생과 교류한 이야기가 당시 시대 흐름에 분노하게 한다. 출옥하고 난 후, 봉선사 큰스님의 권유에 따라 운허 스님과 법연을 쌓는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봉선사에 머물던 선생은 김봉환, 김규하, 김정완, 윤종묵, 차응준 등 승려 5명과 함께 금강산 유점사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1923년 북경의 민국 대학에 입학한 선생은 정치학과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선진강국들의 정치정책과 경제정책을 공부하였다. 만국 대학 재학 당시 선생은 고려유학생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활동하는가 하면,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해 《혁명》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했다. 이후 선생은 일본제국의 수뇌부를 암살하는 독립운동단체인 조선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의열단 선전부장에 선출된 선생은 《혁명동맹》의 주필을 맡아 활약했다. 그리고 유학한국혁명청년회(留學韓國革命靑年會)를 조직하고 기관지 《혁명행동(革命行動)》을 발간하였다. 8월 선생은 중국공산당의 광주봉기(廣州起義)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대한독립당촉성회(大韓獨立黨促成會) 광동지구 분회를 조직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후 선생은 재중국조선 청년동맹을 직접 조직하고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반제동맹(反帝同盟)에 가입한 뒤 기관지 《봉화(烽火)》와 잡지 《반일민중(反日民衆)》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는가 하면, 중국군 19로군(十九路軍)에 종군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중국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을 모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한 뒤 선전부장에 취임하였다. 이듬해에는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결성하고 선전부장에 취임했다. 해방 이후 선생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1955년 2월 23일 자 일기는 능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오늘 200원을 꾸어 쌀을 사 왔다…… 내가 독립운동을 하고 정치를 한다고 돌아다니면서도 가족을 굶기며 살고 있구나.” 3·15 부정선거에 따른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은 붕괴하였으나 장면 정부에서도 선생은 통일 사회당을 창당해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5.16 군사 정변 이후 군정에 의해 공포된 특별 소급법 ‘특수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당시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동지인 장건상과 함께 체포돼 10개월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군사혁명재판소의 집행유예 판결로 석방되었다. 통일사회당 창당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대표위원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통일 사회당은 신한당에 흡수되었다. 선생은 신한당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정무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신한당과 민중당의 통합으로 신민당이 창당되자 선생은 신민당에 입당하였으며 운영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에는 신민당 지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추위가 한 번 뼈에 사무치지 않으면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 선생은 71세의 일기로 1969년 4월 12일 별세하였다. 선생의 장례는 대한민국 정부의 발표에 따라서 사회장으로 봉행 되었다. 조계사에서 봉행 된 영결식에는 국회부의장, 신민당 총재, 총무처 장관 등이 참석해 조의를 표했다. 선생은 경기도 파주 조리면 장탄리에 묻혔다. 승려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장례가 화장이 아니라 매장으로 봉행 된 것은 선견지명이 있었던 도반 운허 스님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선생이 별세한 뒤 1년 뒤, 선생의 묘비를 세웠다. 묘비명도 노산 이은상 시인이 지었다. 운암 김성숙 선생은 비바람이 앞을 가리는 여정 속에서도 부정과 불의에 굽히지 않고 지조(志操)와 절개(節槪)의 삶을 살다 가셨다. 선생께서는 “추위가 한 번 뼈에 사무치지 않으면(不是一番寒徹骨)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爭得梅花撲鼻香)”라는 가르침을 몸소 보이셨으니, 비록 선생은 가고 없으나, 애오라지 조국의 앞날만을 생각한 선생의 민족 얼은 후대에 세세생생 계승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