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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내며
1. 최고령 대장장이의 하루―1938년생 송종화 장인 2. 송종화 장인의 대장장이 되기 3. 국내 마지막 대장간 거리, 인천 도원동 4. 대장장이, 국보 1호를 복구하다 5. 신화 속 대장장이 6. 문학 속 대장장이 7. 역사 속 대장장이 8. 그림 속 대장간 9. 영화 속 대장장이 10. 음악 속 대장간 11. 지명 속 대장간 12. 대장간과 철학 13. 백범 김구와 대장간 14. 대장간의 도구들 15. 대장간과 농기구 16. 맨손어업와 대장간 17. 대장간과 무속인 18. 조총을 만든 이순신과 조선의 대장장이들 19. 조총을 만든 일본의 대장장이 20. 대장장이와 노비, 그리고 그 이름들 21. 우리말의 곳간, 대장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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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쇠를 잘 때려서 풀어낸다는 말은 무엇을 이르는가. 달구어진 쇠를 망치로 두드려서 얇게 펴는 걸 잘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게 바로 쇠를 불리는 공정이다. 적당한 온도로 달구어낼 줄 알아야 하고, 여기에 숙련된 망치질이 더해져야 한다. 송 장인의 망치질은 리듬을 탄다. 쇠를 두드리는 강약 조절에 리듬이 실려 있다. 망치가 쇠에 닿는 순간 밖으로 밀기도 하고, 안으로 당기기도 한다. 망치를 쥔 손에 힘을 주기도 하고, 망치의 무게보다도 더 가볍게 내리치기도 한다. (…) 송 장인의 망치질은 마치 악기 연주처럼 흥겹게 들리기도 한다.
--- 「1. 최고령 대장장이의 하루―1938년생 송종화 장인」중에서 서날쇠는 좋은 나무를 때야 쇠를 잘 구울 수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양평에까지 가서 참나무를 실어와 화로의 땔감으로 쓰거나 그걸로 숯을 냈다. 서날쇠는 화약도 만들 줄 알았는데, 그것을 대장간의 착화제로 쓰기도 하고 관아에 납품하기도 했다. 작가는 서날쇠를 그야말로 만능 대장장이로 그려냈다. --- 「6. 문학 속 대장장이」중에서 무심코 스쳐 지나기 쉬운 우리네 삶의 현장을 애정 어린 눈으로 깊이 들여다보고 거기에서 해학적 포인트를 잡아 예술로 승화시킨 풍속화. 이들 풍속화가의 눈을 통해 우리의 옛 대장간 모습도 화폭에 담겼다. 김홍도, 김득신, 김준근 등의 대장간 그림 몇 점이 우리에게 오래전의 대장장이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 「8. 그림 속 대장간」중에서 백범이 교육운동에 뛰어들고 독립운동에 매진함으로써 민족 지도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데는 인천 감옥 탈출이라는 요인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인천 감옥에서 교수형 신세를 면할 수 없었을 테다. 백범이 탈출 도구로 쓴 삼릉창을 어느 대장장이가 만들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인천 감리서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대장간에서 만든 것만은 분명하다. --- 「13. 백범 김구와 대장간」중에서 대장장이와 도구, 그리고 쇠. 대장간의 3요소라고 할 수 있다. 대장장이가 있어야 쇠를 달구고 두들겨 뭔가를 만들 수가 있다. 원자재인 철물이 없어도 대장간은 돌아가지 않는다. 기술을 가진 대장장이나 원재료인 쇠만 있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화로, 모루, 망치, 집게 같은 필수 도구가 있어야만 한다. --- 「14. 대장간의 도구들」중에서 강화 호미는 겉모양부터가 특이하게 생겼다. 일반 호미는 풀을 맬 때 호미를 쥔 손을 위에서 아래로 놀려 땅을 콕콕 찍는 데 편리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강화 호미는 날을 살짝 비틀었고, 그 아랫부분이 칼날처럼 날카롭다. 땅을 널찍하게 긁어내면서도 질긴 뿌리를 끊어내기 쉬운 구조다. --- 「15. 대장간과 농기구」중에서 쑥부쟁이 풀에는 대장장이의 딸과 관련된 전설도 전해진다. 아주 옛날 한 마을에 쑥을 캐던 대장장이의 딸이 있었는데, 어느 날 몸을 다친 사냥꾼을 치료해주어 낫게 했다. 쑥의 효능이 컸을 터인데, 그 사냥꾼은 떠나면서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둘의 인연이 안 되었던지 만나지를 못하고 딸이 병에 걸려 세상을 뜨고 말았다. (…) 죽은 딸의 무덤에서 이듬해에 보랏빛 들꽃이 피어났다. 사람들은 ‘쑥을 뜯던 불쟁이 딸’이 환생했다고 여겨 쑥부쟁이로 불렀다는 얘기다. --- 「21. 우리말의 곳간, 대장간」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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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온 우리 대장간과 대장장이의 세계를 현장에서 관찰하고 정리한 결과물이다. 대장간과 관련한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대장간의 인문학적 향기를 다양한 관점에서 드러내고자 애썼다”고 말하는 저자는 대장간 현장과 거기서 일하는 대장장이들, 나아가 대장간에서 만들어낸 연장들을 사용하는 우리 삶의 현장 속을 누빈다. 또한 역사 속에서 대장장이들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대장간이나 대장장이는 우리 문화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도 살핀다. 이 책은 우리나라 대장간 다섯 곳, 일본의 다네가시마 대장간 한 곳의 현장 모습을 보여준다. 인천의 도심 한복판에 있는 네 곳 등인데, 이제는 모두 70대 이상의 노인 혼자서 일한다. 젊은 누구도 대장간 일을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 대장장이들이 일을 그만두면 그 대장간들은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저자는 아쉬워한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고마운 건 이때껏 대장간 현장을 지켜내온 이 땅의 나이 드신 대장장이 장인들이다. (…) 힘에 부칠 때마다 대장간 현장을 찾아 그분들의 망치질 소리를 들으며 힘을 얻고는 했다. 1938년생 최고령 대장장이가 일하는 인일철공소는 지난 연말부터 벌써 한 달 넘게 문을 닫아놓고 있다. 대장장이 할아버지가 편찮으셔서다. 하루빨리 털고 일어나 대장간 문을 다시 여시기를 바랄 뿐이다. _「책을 펴내며」에서 인천 도원동의 마지막 대장간 거리 서울의 경우 한때는 을지로 7가가 대표적인 대장간 거리였다. 녹번동이나 수색, 구파발 등지에도 대장간이 많았다. 그런 대장간들이 1970∼80년대의 급격한 산업구조 개편과 도시개발을 거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조선시대에 무기를 제조하던 각 군영(軍營)이 을지로 7가 일대에 있었는데, 거기서 일하던 야장(冶匠)들이 을지로 7가의 대장간과 철물 산업의 역사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제는 대장간이 모여 있는 곳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인천광역시 중구 도원동에 대장간 셋이 바짝 붙어 있는 곳이 있는데, 국내에 마지막 남은 대장간 거리라고 할 수 있다. 도원역 부근에 있는 인일철공소, 인천철공소, 인해대장간. 이들 대장간 중에서 맏형 격은 1938년생 최고령 대장장이 송종화 장인이 운영하는 인일철공소다. 화로, 모루, 망치, 집게 등등의 필수 도구들 대장장이와 도구, 그리고 쇠. 대장간의 3요소라고 할 수 있다. 대장장이가 있어야 쇠를 달구고 두들겨서 뭔가를 만들 수 있다. 원자재인 철물이 없어도 대장간은 돌아가지 않는다. 기술을 가진 대장장이나 원재료인 쇠 말고도 화로, 모루, 망치, 집게 같은 필수 도구가 있어야 한다. 대장간 일은 쇠를 불에 달구는 작업이 우선이다. 화로에는 풀무가 따라붙는다. 바람이 없으면 화로에 불길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대장간의 한가운데를 차지하는 모루는 달구어진 쇠를 올려놓고 두들겨 모양을 잡도록 하는 도구다. 커다란 쇳덩이를 각각의 대장장이에게 맞게 세워놓았다. 형태는 둥그런 원통형이거나 네모난 전통 모루가 있고, 뾰족한 원통형 뿔이 달린 양모루가 있다. 화로에서 벌겋게 달궈진 쇠를 모루 위에 올려놓고 두들겨서 모양을 잡았다면 이를 물에 넣어 담금질하는 물통이나 기름통도 있어야 한다. 또한 벌겋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맨손으로 쥘 수는 없다. 집게도 수십 가지다. 만들어내는 물건의 모양이 다 제각각이어서다. 대장장이가 손쉽게 쥘 수 있도록 보통은 화로의 옆면에 걸어놓는다. “예전에 여럿이 작업하던 시절, 집게잡이는 고참이 맡았다. 풀무쟁이와 메질꾼의 윗 단계가 집게잡이였다. 집게잡이를 시작한다는 건 대장간에 들어와 5∼6년이 지났다는 얘기였다. 메질할 때 쇠를 잡아주는 집게잡이의 역할은 무척 중요하다. 반듯하고 빠르게 쇠를 대주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메를 칠 수가 없다. 쇠가 식기 전에 빨리 대주지 않으면 쇠가 튄다. 한쪽으로만 납작해져도 안 되고, 각도 잘 나오게 잡아주어야 하니, 집게잡이의 기술력이 물건의 완성도를 좌우할 수밖에 없다.” 가짓수가 많은 망치도 집게와 마찬가지로 대장장이와 한몸처럼 놀아야 한다. 망치는 내리쳐서 모양을 잡거나 납작하게 하는 단조망치와, 쇠를 끊거나 구멍 뚫을 때 쓰는 망치형 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책에는 또 쇠메와 벼림망치로 나뉘는 단조망치뿐 아니라 구멍을 뚫거나 쇠를 자를 때 쓰는 망치처럼 생긴 정(鉦), A자형 기계 해머, 프레스기 등등 대장간의 필수 장비들이 즐비하게 등장한다. “첨단 무기, 첨단 기술이라고 할 때의 ‘첨(尖)’이라는 글자는 뾰족하다는 뜻으로도, 날카롭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뾰족하면서 단단한 창, 날카로우면서 무르지 않은 칼을 만드는 부류가 대장장이이다. 그들의 일터인 대장간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금속 소재 산업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 대장간은 생동하는 기술 박물관이다. 그곳에 첨단 기술 산업의 원형질이 숨쉬고 있다.” _「책을 펴내며」에서 호미, 낫, 괭이, 쇠스랑 등의 농기구들 농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연장이다. 호미, 낫, 괭이, 쇠스랑 같은 농기구들을 만드는 곳이 대장간이다. 두루 쓰이는 호미는 종류도 여럿이고 지역마다 생김새도 다르다. 고장마다 토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갯벌에서 바지락 같은 수산물을 채취하는 일에도 호미가 있어야 한다. 요즘은 사라지다시피 한 쟁기는 사람과 짐승의 협업 도구였다. 쟁기를 사이에 두고 소가 앞장을 서고 사람이 뒤를 받친다. 쟁기를 구성하는 여러 부품 중에 보습과 볏이 있다. 보습과 볏은 쇠로 만들어야 하는 부품이다. 보습이 땅을 밀고 들어가 위로 올려주면 볏이 그 흙을 옆으로 밀쳐놓는 역할을 한다. 보습은 주물로 공장에서 찍어내기도 했지만 쟁기질하는 농부들은 대장간 제품을 많이 썼다. 쉽게 부러지지 않고 오래 쓸 수 있어서다. “쟁기의 쓰임새는 보습에서 나온다. 쟁기의 형태도 여럿이었는데, 볏이 없는 쟁기는 있어도 보습 없는 쟁기는 없었다.” 괭이 역시 농사에서 아주 중요한 도구다. 밭이랑을 고르거나 골을 내거나 논을 고르거나 땅을 파는 데는 괭이가 편리한데, 지역별로 괭이의 형태가 달랐다. 경기도 부근의 괭이는 날 끝이 뾰족하고 중앙부가 약간 두터웠다. 남부지방의 괭이는 날 끝이 네모꼴이었다. 농기구 중에서 또 빼놓을 수는 없는 것이 낫인데, 무엇보다 잘 드는 낫이어야 한다. 낫에도 왼낫, 조선낫, 외낫, 왜낫, 심지낫, 을목낫, 오목낫, 황새목낫, 복합낫, 얇은낫, 당몽태낫, 수온낫 등으로 종류가 많다는 것을 이 책에서 알 수 있다. 대장간은 우리말의 아주 오랜 곳간 저자는 또 대장간이 우리말의 아주 오랜 곳간임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우선 쇠에서 파생된 우리말이 무척 많다. 대장간에서 연장을 만들려면 시우쇠와 무쇠 같은 쇠붙이가 필요하다. 예전에는 쇠를 생철(生鐵), 수철(水鐵), 숙철(熟鐵) 등으로 구분했다고 한다. 생철이나 수철은 흔히 부르는 무쇠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 무쇠를 불에 달구어 단단하게 하면 시우쇠가 된다. 숙철(熟鐵)이 시우쇠다. 시우쇠는 참쇠라고도, 정철(正鐵)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은 자신이 거느린 대장장이들과 함께 개발한 조총을 정철총통(正鐵銃筒)이라 했다. 다산 정약용은 금(金)과 철(鐵)을 구분해서 써야 한다고 했단다. 이 책에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나라군에 건넨 선물 중 휴대용 불붙이는 도구인 부시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소개되어 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이 부시를 일컬어 적었던 화금(火金)은 불을 일으키는 쇠라는 말이다. 부싯돌을 쳐서 불을 일으키는 쇳조각이 부시인데, 그 어원을 따져보면 불과 쇠가 합쳐져 이루어진 말이다. 불과 쇠가 있어야만 일이 되는 대장간과 그 뜻에서 너무나 닮았던 것이다. 또 대장간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성냥이다. 대장간의 다른 이름이 승냥깐이다. 충청도 등 일부 지역에서는 대장간을 승냥깐이라고 한다. “이 승냥이라는 말이 성냥에서 나왔다. 쇠를 불리는 일을 ‘성냥하다’라고도 하는데, 이 ‘성냥일’이 곧 대장일이다. 옛말에 ‘성냥노리’라는 게 있다. 대장장이가 1년 동안 깔아놓은 외상값을 받으러 섣달그믐께 집들을 돌아다니는 일을 일컫는다.” 이 책에는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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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알고 지낸 지 어느덧 스무 해가 넘지만, 나는 아직도 기자 정진오라는 사람 개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그의 기획력과 이른바 ‘글빨’을 높이 평가해왔다. 여러 현장에서 그를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나는 딱 한 마디를 했다. “이제 그만, 자기 책을 쓰십시오!” 여러 현장을 오가며 숱하게 마주쳤지만, 사적으로는 지금껏 딱 한 번 술자리를 가져보았다. 그는 수첩과 자료를 싸들고 늘 바쁘게 어딘가로 다녔다. 그럴 때마다 멋진 기획기사가 나왔다. 기사를 읽을 때마다 이렇게 좋은 기획과 기사가 단행본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지역에 대한 단순한 사랑을 넘어 인문학적 식견과 문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호흡 긴 글들이었기에, 그를 만날 때마다 책을 쓰라고 권유했다. 시인 중에 좋은 산문을 쓸 수 있는 사람이 흔치 않듯, 기자들 역시 칼럼을 넘어 긴 글의 호흡을 감당할 수 있는 이가 드물다. 그런데 정진오 기자, 아니 작가는 그걸 누구보다 멋지게 해왔다. 그래서 나는 만날 때마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그의 글을 선보이게 되길 바랐다.
기자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언관(言官)인 동시에 사관(史官)이고, 오래된 것에는 모두 그만한 사연이 있는 법이다. 그가 이 책에 담아낸 것들은 역사학자들이 감당하기엔 너무 가깝지만, 누군가 기록해두지 않으면 영영 사라질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그것이 쌓여 이야기가 되고, 역사가 된다. 이 책의 귀함과 무게가 거기에 있다. - 전성원 (언론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