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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5천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만열
바다출판사 2000.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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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몇 가지 관점
2. 우리 역사의 쟁점들
3. 우리 역사의 영광된 순간들
4. 우리 역사 다시 보기
5. 일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저자 소개 1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로,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합동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숙명여자대학교 교수(1980~1984년 해직),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및 이사장,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회장, 희년선교회 대표, 문화재 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상지대학교 이사장으로 있다. 저서로 『삼국시대사 강좌』(1976), 『한국 근대역사학의 이해』(1981), 『한국 기독교와 역사의식』(1989),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1990), 『한국기독교수용사 연구』(1998), 『한국기독교와 민족통일운동』(2001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로,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합동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숙명여자대학교 교수(1980~1984년 해직),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및 이사장,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회장, 희년선교회 대표, 문화재 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상지대학교 이사장으로 있다.

저서로 『삼국시대사 강좌』(1976), 『한국 근대역사학의 이해』(1981), 『한국 기독교와 역사의식』(1989),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1990), 『한국기독교수용사 연구』(1998), 『한국기독교와 민족통일운동』(2001), 『한국기독교 의료사』(2003), 『한국 근현대 역사학의 흐름』(2007)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한 시골뜨기가 눈떠가는 이야기』(1996), 『역사의 길, 현실의 길』(202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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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0년 05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313쪽 | 148*210*30mm
ISBN13
9788987180533

책 속으로

임진왜란의 역사인식에서 제거해야 할 선입견이 있다. 당시 우리의 전 국토는 유린당하기만 했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우리 조상들은 제대로 항거하지 못했다는 패배적인 역사인식이다. 그러한 역사인식은 임진왜란이 어떻게 끝나게 되었는가를 배웠던 과거의 역사교육에서도 뚜렷이 드러났다. 즉 이 왜란은 첫째 침략을 지휘한 도요토미가 병사하기 전에 침략군의 철수를 명했고, 둘째 명(明)이 조선을 도와 일본군과 싸웠기 때문에 그나마 일본군이 쉽게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인식은 결국 우리 조상들이 임진왜란을 끝내는 데 거의 노력한 점이 없었다는 것이 된다. 조선은 침략군 앞에서 당하기만 했고, 이 땅에서 분탕질을 하던 '왜놈'들은 저 나가고 싶을 때 순순히 나갔다는 꼴이다.

정말 그럴까. 임진왜란 때 조선이 그렇게 형편없는 존재였던 데 반해 일본군은 패배를 모르고 승승장구하기만 했던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이다. 오히려 임진왜란은 일본이 부산 상륙 20여 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는 등 큰 전과를 거두었지만 "세계 전사상 유례 없는 일본의 참패"라고 재일(在日)한국인 역사가 이진희(李進熙)는 말한다.

--- p.113

출판사 리뷰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려는 건국 초기 고구려 계승의식이 강했고 북방정책을 지속적으로 견지하였다. 수차례에 거친 거란과 여진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자주적 대외정책을 강력하게 유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려가 몰락한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신의 난도 몽고의 침입도 아닌 바로 과거제 때문이다.

호족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필요에서 4대 광종 때 시행된 과거제도는 유학에 기반한 사대파들을 대거 정권에 받아들였다. 유교이념(다시 말해 중화사상)을 신봉하는 사대파와 북방정책을 견지해온 자주적 전통파(신채호는 이를 '낭가사상파'라 불렀다)의 필연적 대결이 바로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는 '묘청의 난'이다. '묘청의 난'이 실패하고 사대파가 득세함으로써 사대적인 유교가 그 후 1천 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하였고, 우리의 역사를 비자주적인 굴종의 역사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삼국사기』는 우리 역사서 중 가장 오래 된 중요한 문헌이다. 그러나 새로운 왕조 초기에 항상 전대 왕조의 역사를 정리했던 사실로 미루어보아, 삼국의 역사를 다룬 유일한 책으로 볼 수는 없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삼국시대에 관한 역사서가 이미 존재했다. 이를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구분해 흔히 {구삼국사}라 한다. 그렇다면 {구삼국사}가 이미 있었는데, 왜 굳이 삼국의 역사를 다룬 통사를 다시 기술하였을까?

이는 앞에서 얘기한 '묘청의 난'과 관련이 있다. 지금은 전하지 않는 {구삼국사}는 단군신화를 비롯해 고구려 중심의 자주적 역사관을 바탕으로 집필되었다고 추정된다. 이는 묘청의 난을 주도했던 서경파(낭가사상파)의 지도이념이기도 했다.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은 제2, 제3의 묘청의 난을 막기 위해서, 또 당시 금(金)과의 평화교섭을 위해서 {구삼국사}를 폐기하고, 유교적 사대주의에 입각해 신라를 정통으로 세우는 새로운 역사서를 집필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고려말 몽고의 침략에 맞선 30여 년간의 항쟁은 세계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당시 욱일승천하는 몽고에 맞서 그토록 오래 버틴 나라는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화의가 이루어지고 원(元)의 부마국이라는 수모를 겪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럼 그렇게 오래도록 항쟁을 펼친 주체는 누구였을까? 고려 조정? 관군? 삼별초?

항몽운동의 주체는 바로 민중이었다. 당시 최씨 무신정권은 백성의 안위는 아랑곳없이 사병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피신해 백성이야 죽든 말든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정작 몽고의 침략에 맞서 싸운 것은 이름 없는 농민과 천민들이었다. 당시 무신정권의 학정에 반발하여 활발히 전개되었던 농민반란과 노예반란 세력들은 외적이 침입해오는 국난에 임해 스스로 정부군과 합세해 몽고군을 괴롭혔다.

이름 없는 무수한 초적(草賊), 관노, 향·소·부곡민 들이 대몽항쟁의 주체라는 사실은 우리 역사의 주체가 지도자 중심에서 민중 중심으로 바뀌는 과정의 명확한 증거이다.

한글은 우리의 문화유산 중 가장 중요하고 빛나는 업적임에 두말할 나위 없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위대한 것이고. 한데 세종은 왜 한글을 만들었을까? 흔히 그의 애민정신을 얘기한다. 백성들이 글이 없어 의사를 맘대로 소통하지 못함을 '어여삐' 여겨, 일종의 시혜의 차원에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게 다일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무신집권기 이후 민중은 역사의 주체로서의 자신을 서서히 각성해가고 있었다. 봉건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며 행동화한 수많은 천민들의 신분해방운동이 있었고,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성장하던 신진사대부가 역성혁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도 농민세력의 절대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이렇게 성장한 민중을 상대로 통치를 해야 했다. 사회적 의식수준이 높아진 민중의 여론을 파악하고, 그들을 유교적 통치체제에 순응하도록 계도해야 했다. 이러한 필요성, 즉 글자 그대로 '훈민(訓民)'의 필요성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한글인 것이다. 한글은 통치자 측에서 본다면 의식수준이 높아진 민중에 대한 훈민정책의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스스로의 각성과 주체화를 통해서 쟁취한 '전리품'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하면, 대부분 '일본놈 나쁜놈' '아! 충무공' 정도를 연상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의식의 밑바탕에 있는 것은 '철저히 당했다'는 패배의식이다. 강력한 왜군의 진격 앞에 우리 군은 무력하기 짝이 없었고, 제대로 항거도 못하고 국토의 거의 대부분을 유린당했다는, 수군의 활약이 있기는 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하고 명나라가 개입했기에 왜군이 물러났다는 인식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1592년 4월 14일, 부산 상륙 20여 일 만에 서울을 함락했으니 초반전에서 일방적으로 밀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듬해 3월 20일 왜군의 병력 점검 결과, 각 부대 평균 65.8%의 전력 손실을 입어 이미 전투력을 상실했다고 일본인 스스로 기록하고 있다. 불과 1년도 안 돼서 전면적인 퇴각을 단행해야 했던 것이다. 병력의 손실도 손실이지만, 조선 수군의 활약으로 병참선이 끊기면서 군량의 보급이 어려워지자 왜군들의 사정은 더욱더 비참해졌다. 아사자와 동사자가 속출했으며, 곳곳에서 출몰하는 의병을 피하기 바쁜, 이미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들이었다.

도요토미의 친구로 임진왜란에 참가해 기록을 남긴 마에노 나가야스는 임진왜란을 "진정 공허한 전쟁"이라 평했으며, 재일 사학자 이진희는 "세계 역사상 유례 없는 일본의 참패"라고 평가한다. 분명한 것은 조선이 일방적으로 패배하고 왜군이 일방적으로 승리한 전쟁이라는 임진왜란관은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역사인식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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