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유협적 유교’의 대표적 표상이 유비였는데, 그는 협(俠)으로 대중의 무의식을 사로잡고 유(儒)로 지식인의 명분을 움직였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는데, 정확히 말하면 시대정신에 부합하거나, 시대정신을 아울러야 영웅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달리 말해, 시대정신 중 대표적인 하나의 흐름을 타고 대표성을 획득할 때 그 시대를 주도하는 인물이 될 수 있다.
--- p.13

어떤 성격이든 장단점이 있을 뿐 성격 그 자체로 좋고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물론 성격 간의 우열도 있을 수 없다. 장비는 자신의 단점을 이용하려는 상대의 허점을 역으로 이용해 승리를 차지했다. 장비가 그렇게 되기까지 유비의 덕이 컸다. 장비의 ‘툭하면 욱하는 기질’을 좋은 방향으로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유비뿐이라는 것을 장비 자신도 잘 알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유비 앞에만 서면 장비의 분노는 눈 녹듯 사그라졌다.
--- p.39

사디즘 성향은 불안이 고착화되고 그 불안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을 때 자라나기 쉽다. 그런 성향이 권력을 잡고 가학적 행동을 하기 시작하면 좀처럼 멈출 줄을 모른다. 게다가 그들은 또 다른 가학적 방식을 고안해, 타인들이 자신들에게 자비를 갈구하도록 만들고 자신들이 계속 통제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영제 당시에도 권력을 잡은 환관들은 누구보다도 냉혹했다. 환관 세력이 일으킨 당고의 금 때 1천여 명의 청류파 사대부들이 큰 화를 입었고, 환관 독재의 체제가 갖추어졌다.
--- p.59~60

조조는 동탁, 마등(馬騰), 공손찬, 손씨 가문 같은 군벌 세력이 아니었고, 원소와 원술처럼 명문가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유비, 유표처럼 정통성을 지닌 황손은 더더욱 아니었다. 조조는 양자로 계승되던 환관 가문 출신이었다. 가문에 재산은 많았지만, 특히 십상시의 난 이후 멸시받는 가문의 이미지가 더욱 심하게 그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런 환경이 조조가 기지와 친화력을 기른 배경이 되었다.
--- p.95

용맹으로 천하에 우뚝 섰던 손견은 신중하지 못한 과감함 때문에 허무한 종말을 맞이했다. 그는 마치 눈가리개를 한 채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 같았다. 장애물이 없는 경마장에서 그렇게 달린다면 1등을 차지할지도 모르지만, 세상은 경마장과 달리 별의별 변수가 많다. 그런 세상에서 앞서 나가려면 전체를 보는 시스템적 사고가 필요하다.
--- p.134~135

왕윤이 동탁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지 한 달 반도 채 못 돼 일어난 일들이었다. 만일 왕윤이 손견의 4대 천왕[정보, 황개, 한당, 조무]을 자기 휘하의 장수들로 포섭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니 채옹만이라도 포용했더라면 삼국시대가 쉽사리 열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제 후한은 손견의 4대 천왕이 장악하게 된다.
--- p.154

유비의 성격을 보면 마틴 셀리그먼(Martin E. Seligman)의 긍정심리학의 사례를 보는 것 같다. 아무리 힘겹고 우울해도 유비는 그 원인 탐색에 매달리지 않았고, 대신 행복을 주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누구에게나 있는 약점 찾기보다 장점과 미덕 찾기에 열중했고, 그것을 삶에 활용했다. 그런 사람에게는 행복도 악기 연주처럼 배울 수 있는 대상이 된다.
--- p.184

태사자나 여포나 똑같이 돌쇠형이지만, 여포가 ‘낭만적 돌쇠’라면, 태사자는 ‘위신(威信)형 돌쇠’이다. 태사자는 특히 사회적 위 신을 중시하는 ‘프레스티지 기질(prestige character)’이 두드러졌다. 그런 성격의 사람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면 무엇보다도 사회적 위신이나 위세를 유지하고 향상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먼저 살핀다.
--- p.209

곽가는 어려서부터 그릇이 컸고 통찰력이 뛰어났다. 특이한 것은 자신의 능력을 숨긴 채 익명으로만 천하의 호걸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곽가는 누구와도 망령된 교제를 나누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당대 최고의 명성을 떨치던 원소를 찾아가보니, 원소가 형식만 중시할 뿐 알맹이는 전혀 없음을 보고 ‘패왕의 업’을 이루기는 틀렸다고 보고는 낙향했다.
--- p.237

삼국시대 인물 중 조조와 성향이 제일 비슷한 책사가 가후였다. 그만큼 조조는 가후의 속내를 잘 헤아렸다. 그러나 가후는 조조와 달리 주군이 아니었고, 주군이 될 생각도 없었다. 게다가 다른 장수들처럼 무예도 완력도 없어서, 오직 세 치 혀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내야 했다. 과연 가후는 난세에 정세를 뒤바꿔놓을 책략을 창출해냈는데, 그 비결은 그의 성향에서 찾을 수 있다.
--- p.288

역량이 부족할수록 살아남기 위한 정치술에 더 치중하는 법이다. 심배와 곽도의 전략보다 저수와 전풍의 계책이 확실히 유리했지만, 심배와 곽도의 처세와 화술은 저수와 전풍을 능가했다. 조조와 유비는 보이는 행위보다 보이지 않는 실력을 중요시했지만, 원소는 그렇지 않았다. 원소는 실리보다 자기 자존심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쉽게 남을 시기하고, 참모들이 진언해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저수와 전풍이 주장한 장기전이 현실적인 방안이었는데도 원소는 이를 조조 칭찬으로 오해했다. 반면, 자신의 허영심을 자극한 심배와 곽도의 말에 솔깃했다.
--- p.337~338

『삼국지(三國志)』를 쓴 진수(陳壽)는 유표를 원소와 비슷한 인물로 평가했다. 원소와 유표 둘 다 가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엄이 있어서 도량과 식견이 넓은 인물로 묘사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둘 다 낯을 가리며 사람을 편애했고, 모략만 즐겼지 결단력은 부족했다. 둘의 차이점이라면, 원소는 천하를 제패하려는 야심이 있었고, 유표는 문학적 재능을 꽃피우며 목가적인 삶을 지향한 것뿐이었다.
--- p.360

주유는 분명 감성지능이 높고 감수성이 뛰어났다. 그러나 그런 능력은 자기 우월성이 공인된 상황에서만 작동했다. 그가 대선배 정보에게 엄격하게 군령을 집행하는 대신 너그럽게 대할 수 있었던 것도 공인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또 아무리 뛰어난 감성지능을 지녔다 해도 남과 비교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히면, 감성지능이 떨어진다.
--- p.400

전권을 위임받은 육손은 20만 병사와 함께 유비군의 방어에 나섰다. 육손은 외유내강형이었다. 어떤 일이든 서두르는 법이 없고 차근차근 해결해나가는 것이 관우와 장비를 잃기 전 유비의 성격과 닮았다. 다만, 큰 전쟁 경험이 없어서 손 씨 일족을 섬기던 노장들에게는 좀처럼 인정받지 못했다. 육손을 못마땅해하던 노장들은 “애송이 육손이 전쟁을 질질 끌려고 합니다. 단기전으로 끝내게 하셔야 합니다”라는 상소를 빗발치듯 올렸다.
--- p.421

촉의 제갈량은 위나라를 정벌할 목적으로 7년간 다섯 차례에 걸쳐 북벌을 감행하면서 사마의와 충돌한다. 완벽주의자 제갈량은 실수할까 봐 매사 안전한 길을 택하고 정석대로만 했다. 그 결과 북벌이 지구전이 되면서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그런 제갈량을 잘 알았던 사마의는 상대를 전멸시키는 전략보다 지구전을 택함으로써 제갈량 속을 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