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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몹쓸 짓을 한 사람이 누굴까. 이 앨범의 임자는 나였고, 누군가가 이 방에 들어와서 앨범을 이렇게 훼손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범인은 누가 생각해도 뻔했다. 하지만 내 기억은 앨범에서 도려낸 강수진의 사진처럼 깨끗이 사라진 채였다.
--- p.35 어떤 상황이 벌어졌든 간에 내 기억은 정지되었다. 이후에 전개된 일들은 머릿속에서 하얗게 휘발되며 미세한 입자가 되어 허공에 흩뿌려졌다. 마치 한여름 내리쬐는 강렬한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셔 시야가 하얗게 바래듯이. --- p.71 “이모의 재산 때문인 거지. 이혼한 후 이모부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이모부는 이모 재산을 터치할 권리가 없어질 테니까.” 차한수는 검지로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그럼 그게 이모님이 자서전을 내고 싶어 하시는 이유라는 거야? 너무 메리트가 없잖아.” “그게 다는 아니고…….” 머리를 넘기면서 말을 흐렸다. “너는 알고 있지만 나한테 말을 안 하는 건 아니고?” --- pp.123-124 “인간 본성을 억압하는 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환영받지 못한 시스템이었어. 인간이 인간 자체로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은 거스를 수 없는 거야. 그런데 그것과 대치되는 상황에 직면했던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던 거지.” --- p.140 “정말 강수진 씨의 죽음에 관한 진위를 모르신단 말입니까? 짐작도 안 되나요?” 민혁의 목소리에서 흥분과 노기가 느껴졌다. 민혁은 나를 만난 이후로 계속 몰아세우기만 했다. 나한테 죄책감을 깨닫게 해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똘똘 뭉친 사람 같았다. --- p.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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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숙이 가라앉아버린 시간의 맨 밑바닥엔 무엇이 남아 있을까
침잠했던 과거를 길어 올리는 복기의 여정 디자이너로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온 가족에게 외면받고 아들의 결혼식에조차 초대받지 못하는 신세가 된 오선임. 그는 한평생 혼자서 끌어안았던 이야기를 털어놓기 위해 고스트라이터로 일하는 조카 윤지를 찾는다. 윤지는 선임의 자서전 출간을 준비하며 인터뷰를 이어가는 동시에 그의 아들을 만나 모자간의 화해를 도모한다.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던 선임의 정체성, 오랜 시간 가족에게 아로새겨진 상처가 점차 드러나는 가운데 윤지에게 한 남자가 찾아온다. 30여 년 전 죽은 고등학교 동창생의 유품 정리사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남자는 이내 윤지가 잊었던, 혹은 애써 지워버렸던 과거를 이야기하는데……. “《그물을 거두는 시간》은 사랑의 양면성에 관한 이야기다. 사랑이 욕망과 집착의 다른 이름이라면 희생과 용서라는 일면도 분명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이 소설을 쓰게 된 동력이다.” [작가의 말]에서 망각의 장막 너머에서 명멸하는 다른 색의 감정들 선연한 희망 없이도 구하는 당위의 길 디자이너 오선임은 언제나 타인에게 삶을 강탈당했다. 일찍이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깨달았으나 경직된 한국 사회의 한계로 인해 결혼을 강요받고 아이까지 낳아야 했으며, 오롯이 혼자서 이룩한 성취마저 편견에 가로막혀 인정받지 못했다. 별거하여 따로 애인까지 두고서도 성공한 아내에게 생활비를 받기 위한 목적으로 이혼을 거부하는 남편,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려는 아주 작은 시도조차 없이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아들……. 가족마저 등을 돌린 고독한 삶에 유일한 기둥이 되어준 사랑을 지키기 위하여, 선임은 최후의 수단으로 고스트라이터인 윤지에게 자서전 집필을 의뢰한다. 한편 선임의 삶을 기록해가는 윤지 역시 완전히 잊고 있던 자신의 과거를 들여다본다. 지난 세월 잊을 수 없었던 한 사람의 목소리와 향기. 모든 게 희미해진 시간 속에서 언제나 애틋한 온기를 불러온 첫사랑을 좇던 윤지는 이내 미숙한 청춘을 물들였던 스스로의 순수한 악의와 대면한다. 평생을 그리워하고 사랑했던 사람이 자신에 의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윤지는 어긋난 기억의 조각을 되찾고 조금이나마 사죄할 수 있는 방도를 찾는다. 선임의 자서전은 빛을 볼 수 있을까. 윤지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 깊게 가라앉아버린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두 인물을 통해 《그물을 거두는 시간》은 선연한 희망 없이도 당위를 구하는 길의 고난과 의의를 조심스럽고 엄숙하게 그려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