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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광목천에 번지는 핏물 세상 참말로 얄궂다 통곡의 소릿길 에필로그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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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이 스무하룻날 동안 정성껏 알을 굴리고 굴려야 새끼를 볼 수 있는 것처럼, 꿈도 그래야 한다는 것을 강수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어머니를 따라 이리저리 떠돌다 이곳 회천에 정착한 뒤 양 정원에 입학했을 때가 열두 살이었다. 또래보다 늦은 나이라 동급생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강수가 꿈이라는 것을 품게 된 것은 학생들을 차별하지 않고 대하는 학산 덕분이었다.
---pp.21-22 국극이라는 것이 생겨나고 인기를 얻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는가? 강물이 흘러가다 막히면 굽이 돌아 새 물길을 내며 흐르는 것처럼, 국극도 새로운 물길이 아닐까. 그러니 판소리면 어떻고 국극이면 어떤가. ---pp.25-26 “내가 신내림을 안 받고 버텨서 죄 없는 사람들이 화를 입는지도 몰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신을 거부하면 주변 사람이 큰 화를 입는다.’라는 무당들이 곧잘 하는 말을 송애가 가슴에 새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pp.64-65 용실은 무겁고 어둡고 복잡한 속내를 가진 송애와 달리 단순하고 밝고 씩씩했다. 그 모습이 외로움을 들키기 싫은 방어 기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옆에 있으면 자신의 어둠까지 밀어내 주는 것 같아 용실의 수다가 좋았다. ---pp.66-67 산 아랫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 사상이라는 것은 인민군이 마을에 들어오면 인공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것이고, 군인이 들어 오면 이승만 대통령 각하 만세를 외치는 것이었다. 하나뿐인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밤에는 좌익이 될 수 있고 낮에는 우익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어느 하나를 마음에 품어서도 좇아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단순한 무지렁이들이 아니라 소중한 목숨을 그렇게 지켜 낼 줄 아는 현명한 이들이었다. ---p.79 강수는 잿더미만 남은 양정원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교육 기관으로서의 인가가 취소되고 더는 학교로서의 존재 의미가 없다고는 해도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면 안 되는 곳이다. ---p.96 송애는 이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용실과 반대편에 서 있었다. 용실 또한 마찬가지일 것임을 알기에 망설여지는 것이었다. ---p.112 용실이 송애를 향해 달려들자 지서장이 다급하게 경찰의 총신을 돌렸다. 용실은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송애를 끌어안았다. ---pp.149-150 꼭꼭 숨어라, 꼭꼭 숨어라. 용미 언니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울렸다. 숨어 버린 사람들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이 모든 일이 정말로 숨바꼭질이라면……. 산에 숨은 아버지와 외삼촌을 찾고, 영천제 억새밭에 숨은 외숙모를 찾아내고, 지서 창고에 숨은 강수와 어머니까지 모두 찾아내 숨바꼭질을 끝낼 수 있다면……. ---p.151 이번에는 좌익에게 자식과 남편을 잃은 가족들의 복수극이 시작되었다. 세상은 그렇게 또 한 번 혼란의 도돌이표를 그리고 있었다. ---p.163 송애 앞에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만석이, 외숙모, 학산 선생님, 그리고 용실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도 나타났다. 차마 이 산골짜기를 떠나지 못한 영혼들이었다. ---p.1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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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잘못을 숨기거나 지우고 싶은 이들, 아픈 역사를 마주 보기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부디 용기 내 주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국가 폭력에 의해 흔적 없이 지워진 사람들의 삶이 역사에 오롯이 기록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끝으로 폭력의 시대를 아슬아슬 건너, 나와 내 아이들의 미래를 열어 주신 분들에게 깊은 위로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 [작가의 말] 중에서 국가 폭력의 잔혹한 역사 보도연맹 학살 사건 좌익과 우익의 대립은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수많은 사람을 좌익 또는 우익으로 몰았다. 소설 속 산 아랫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민군이 마을에 들어오면 인공기를 흔들며 환영해야 했고, 군인 들어오면 이승만 대통령 각하 만세를 외쳐야만 했다. 하나뿐인 가족과 나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밤에는 좌익이, 낮에는 우익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현실은 더 가혹했다. 한국 전쟁 발발 직후 좌익 척결이라는 미명 하에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보도연맹은 국가가 좌익 세력을 보호·지도한다는 명분으로 만든 반공 단체로, 사람들을 강제로 가입시켰고, 그 결과 자신이 보도연맹원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보도연맹 학살 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의 수는 최소 20만에서 최대 120만 명에 이른다. 이 얼마나 엄청난 국가 폭력인가? 그런데도 아직 보도연맹 학살 사건에 대한 과거사 정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루속히 이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을 통해 아무 이유 없이 이 땅에서 지워진 사람들의 삶이 오롯이 역사 속에 되살아나는데, 이 소설이 조금이나마 힘이 보태지길 바라본다. 단짝에서 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두 소녀, 송애와 용실 이 소설은 둘도 없던 단짝이었던 송애와 용실의 삶을 통해, 사상 대립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친구조차 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 역사를 보여 준다. 송애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동생 만석이까지 군인들에 의해 떠나보낸다. 반대로 용실은 인민군에 의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게 되고, 하나 있는 언니는 그 충격으로 실성하게 된다. 이렇다 보니 둘이 죽고 못 사는 단짝이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친구로 남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은 우정은 결국 친구의 죽음을 지나치지 못한다. 그리고 둘은 이 잔인한 역사 속에서도 자신이 꿈을 가꾸며 꿋꿋이 살아남는다. 이제 어른이 된 그들은 다시 만날 용기를 내는데……. 가혹한 역사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두 소녀를 통해, 그 어떤 폭력으로도 막을 수 없는 인간의 강인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