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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말
들어가며 : '천명'을 받은 자 서문 : 제정 중국의 탄생 1. 초기 제국들 진 전한 후한 2. 혼돈과 재통일 그리고 황금시대 삼국 시대 분열의 시대 수 당 5대 3. 혼돈, 외교, 침략 5대 북송 남송 원 4. 부흥과 붕괴 명 청 옮기고 나서 참고문헌 도판·사진·인용문 출처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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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문제(文帝)는 금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다리가 짧고 허리가 길었으며 말 수가 적었다. 그는 왕자들을 포함해 가능한 모든 경쟁자를 의심했으며, 자칫하면 노하여 난폭해졌고 심지어 관료를 구타해 죽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옛 친구들을 대할 때는 의리 있고 관대했다. 천성적으로 검약한 그는 궁궐에서 사치를 금하고 궁녀들의 화장품 사용을 제한했다. 문제의 황후는 북조의 유력한 가문 출신인 독호씨(獨狐氏)로 질투심이 강해서 문제가 후궁을 들이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문제에게는 다른 후궁에게서 낳은 아들이 없었고, 그가 총애한 여인도 황후에게 살해되었다. 이 사실을 안 문제는 슬픔을 달래며 홀로 말을 타고 산을 달리면서 이렇게 탄식했다. “천자라는 명예는 얻었을지 모르나 내게는 자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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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정부는 위안스카이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이 사태를 수습하게 했다. 제위에 야심을 품은 위안스카이는 임시정부와 협상하여 화의를 매듭지었고, 이에 따라 푸이(溥儀), 즉 선통제는 “인민의 희망을 통해 표출된 (……) 천명”을 받들어 퇴위했다. 1912년 2월에 사임한 쑨원의 뒤를 이어 위안스카이가 정식으로 베이징에서 초대 대총통에 취임했다.
2천 년 만에 중국의 제정(帝政)은 어떠한 투쟁도 없이 붕괴되었다. 제정(帝政)은 그때까지 고안된 가장 성공적인 정치 제도 가운데 하나였다. 중국에서 황제정치가 성공을 거둔 이유는 인간 사회와 하늘의 관계를 규정한 철학적 ? 도덕적 기반의 유연성과 보편성에 있었다. 그것은 도덕성에 기반한, 안전판을 갖춘 중앙집권적 형태의 정부를 탄생시켰다. 황제가 잘못을 저지를 경우 그는 천자의 자격을 상실하고 교체될 수 있었다. 19세기 말까지도 이 제도에 대해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제정이 붕괴한 것은 그 체제가 시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더 이상 현실적으로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양의 부상(浮上)으로 하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중국(中國)’이라는 개념은 산산이 부서졌다. 근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새롭게 등장한 사회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모든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황제제도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고 복잡했고, 민족주의 지배 하에서 제정의 기저를 이루던 사상은 유연성을 상실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황제에게 복종하고 숭배하려는 중국인들의 고집은 자생적인 지적 발전을 저해하여 중국의 근대화를 지연시켰다. --- 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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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제 ―― 하늘과 땅의 중재자 그리고 한 인간
중국 황제들의 삶은 그들이 휘두른 거대한 권력만큼이나 다채롭고 신비스러웠다. 하지만 평범한 백성들과는 전혀 다른 그들의 삶은 또한 절대권력과 그것을 둘러싼 환관과 외척, 문무관료나 농민 반란군, 이민족 침략자들과의 비정한 투쟁 속에서 처참한 비극으로 결말을 맺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역사적 기록, 고고학적 발견들을 바탕으로 묘사된 157인 중국 황제들은 어떠한 기준으로 보아도 평범하지 않은 개인들의 집합체다. 평민으로 태어나 가난을 딛고 천자가 된 경우(전한의 선제[宣帝])가 있는가 하면, 시황제 같은 이는 뛰어난 군사전략가이자 행정가였다. 틈만 나면 왕궁을 빠져나와 불교 사원으로 달아난 은둔자형 황제(양나라 무제[武帝])도 있었고, 눈 멀고 귀 먼 채 불행한 삶을 살다 간 화가 황제(북송의 휘종[徽宗])도 있었다. 또한 명나라의 만력제(萬曆帝)는 너무 비만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일어서지도 못했다. 최고 권력자라는 위치 때문에 그들의 개인적 덕목과 악덕 그리고 기행(奇行)은 극단적으로 과장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풍요로운 궁중생활로 인해 타락한 많은 황제들은 일종의 나태한 ‘탕아’였다. 하지만 힘이 강하든 약하든, 나이가 많든 적든, 황제들은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이었다. 그들은 광대한 행정체계의 중심이고 하늘과 땅의 중재자였다. 이러한 관계가 도덕적 명분과 기반을 제공해, 상황이 나빠지면 황제는 명백히 하늘의 신임을 잃은 것이므로 그에 대한 혁명은 정당화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중국 황제제도의 본질적 성격을 명확히 파악하고, 숨가쁜 역사 흐름 속에서 황제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그들의 다채로운 공적·사적 삶의 족적을 간명하고 압축적으로 그려냈다. 2. 황제의 존재 의미와 역사적 의의 중국에서 ‘황제’라는 용어 자체는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신(神), 따라서 지상의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의미다. 서구나 다른 고대 문명에서 비슷한 예를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이 황제라는 존재는 지상의 인간 사회를 지배하도록 허락한 하늘의 위임, 즉 천명(天命)을 내려 받은 도덕적인 통치자였고,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로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전지전능한 존재로 그 권력의 신비스러움과 매력을 자랑했다. 또한 중국의 황제는 거대한 영역과 수많은 민족의 다양한 문화와 사상, 오랜 역사적 전통을 그야말로 하나로 묶어주는 문화적 통합의 중심에 자리잡은 존재이기도 했다. 자신들이 천하(天下)라는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것, 즉 중국(中國)이라는 것에 대한 중국인의 자부심은 바로 이러한 황제제도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사실 황제에 대해 안다는 것은 중국 전통문화의 신비를 파헤치는 지름길이 된다. 이 책은 진·한시대 이래 중국의 황제 157명의 다채로운 삶을 소개하는 데 목표를 둔 상당히 야심적인 시도에서 출발한다. 물론 아무리 중국 황제의 삶이나 정치 생애가 신비스럽고 매력에 가득 찬 흥미로운 것이라 해도 그 많은 황제들의 면면을 모두 다 들춰보는 것은 어쩌면 따분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우려를 한번에 씻어낸다. 문자와 사진 자료가 적재 적소에 배치되어 있어 황제와 그의 시대가 전하는 이야기를 다양하게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쟁점을 실증하는 데 치우쳐 역사에 대한 상상력을 주지 못하는 여느 역사서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다. 황제들의 인성 측면을 여과 없이 묘사함으로써 한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면서도 인물사와 정치사에 매몰되지도 않았다. 또한 정통적인 사서에서 서술된 제도사 부분뿐 아니라 더 나아가 사회사와 문화사라는 측면에서 황제 제도를 부각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것은 곧 중국의 방대한 정통 사서의 요약본을 읽는 것이면서 중국의 수많은 유적과 박물관을 탐방하는 것이기도 하다. 3. 황제들의 연대기 ―― 황제 본기(本紀) 황제를 중심에 놓고 중국의 역사를 통관하는 방식은 정통 사서의 체제를 따른 것이다. 따라서 《중국 황제》는 황제들의 연대기 즉 ‘황제 본기(本紀)’이다. 중국에는 어떤 나라보다 긴 역사서와 수많은 황제가 있었다. 157이라는 수는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중국 황제의 수는 논란거리다. 분열의 시대에 어느 왕조를 정통 왕조로 할 것인가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러한 점에서 일부분 정통 사서와 입장을 달리한다. 정통 사서에서는 단명한 황제는 황제로 인정하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이 책에서는 그러한 기준을 거부했다. 157이라는 수에는, 정통 사서에서 황제로 인정한 남북조 시기의 북조 왕조인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 그리고 요와 금의 황제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정통 사서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신나라를 세운 왕망에 대해서는 기술하고 있다. 또한 북조 왕조에 대해서는 북위의 효문제(孝文帝, 재위 471~499년)에 대해서만 기술하고 그 외에는 왕조의 역사에 대해 간단히 서술하는 데서 그쳤으며, 요와 금 왕조의 황제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과 송 사이의 다섯 왕조(五代)에 대해서는 황제들을 간단히 기술하는 데서 그쳤다(따라서 오대 제1의 명군으로 알려진 후주의 세종([재위 954~960년]의 치세는 서술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