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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황제들의 삶
서문 : 제국의 배경 주요 사료 황제의 칭호 초기 황제들 제국의 황금기 위기와 부흥 마지막 황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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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은 악티움 해전을 기점으로 옥타비아누스가 권력을 잡은 기원전 31년부터 서로마가 막을 내리게 되는 서기 476년까지의 로마 제정의 역사다. 제정 초기에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애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플라비우스 왕조를 중심으로 한 초기 황제들의 시대(기원전 31년~서기 96년 : 아우구스투스~도미티아누스), 양자 황제들에 의해 제국의 황금기를 구가한 시기(96년~235년 : 네르바~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주변 민족과의 끊임없는 갈등과 황제 찬탈의 시기와 콘스탄티누스에 의한 부흥의 시기(235년~337년 : 트라키아인 막시미누스~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동서로 갈라자면서 막을 내리게 되는 마지막 황제들 시기(337년~476년 : 콘스탄티누스 2세~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등 크게 네 시기에 걸쳐 로마 제국의 영욕의 시간이 펼쳐진다. 각 황제별로 실린 연보(생년월일, 사망일시, 재위 기간, 가족, 칭호)와 연표로 시대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으며, 황제들의 초상이 실린 수많은 주화와 역사가들의 사료 인용문 등을 통해 황제가 이룬 업적과 당대 사회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당시의 영토 범위나 전투 ? 순방 경로, 제위 쟁취 경로 등이 표시된 지도를 통해 당시의 정세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아울러 무려 400여 컷에 이르는 희귀한 화보와 관련 자료들, 그리고 그에 대한 상세하고 유기적인 설명은 이 책을 마치 움직이는 로마사 박물관으로 느끼게 할 것이다. 2. 로마의 황제는 사후에 신격화되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원로원을 소집하고, 재판관으로서 재판에 참여하고, 전쟁에서는 최고 군사령관으로서 군을 지휘하고 도시를 건축하는 등 인민과 가까이 있는 지도자로서의 모습이 부각된다. 더욱이 공화정의 유산을 안고 출발한 로마 제정은 초기 황제가 가진 절대 권력도 공화국 전통의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는 듯한 교묘한 외피 속에 가려졌다. 이런 측면에서 황제의 칭호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로마 제정의 기틀을 마련한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에게 받은 ‘존엄한 자’라는 의미의 칭호인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개인 이름이 되고 후에는 ‘황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한 군사들이 개선장군을 부르는 칭호였던 ‘임페라토르Imperator’가 나중에는 황제emperor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칭호가 되고, 개인 이름인 카이사르는 후에 ‘후계자’, ‘부황제’ 또는 ‘황제’ 등의 의미로 쓰였다. 이러한 황제제도에서 로마만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혈연(모계를 포함)뿐 아니라 ‘입양’을 통해 실력자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입양 황제들로는 제국을 번영시킨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이 있다. 황제들은 원로원의 제재 속에서도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누렸다. 대부분의 속주 총독을 임명했고, 법률과 칙령을 발의하는 등 꽤 큰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저자도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로마의 황제들은 부와 음모의 온상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졌으나 이는 극도의 위험 아래 놓인 권력이었다.” 후기의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많은 군주들은 참으로 불행하다. 음모를 발견해도, 살해되지 않는 한 아무도 믿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3. 어느 시대, 어떤 통치자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로마 제국 황제들의 면면은 하나의 그릇에 담을 수 없는 야누스적인 측면을 지녔다. 뛰어난 통치력 뒤에는 소박한 인간애와 철학적 상념, 예술가의 기질이 있는가 하면, 극단적인 광기와 집착, 비틀린 욕망도 있었다. 이러한 황제들의 다양한 모습은 역사가들에 의해 때로는 있는 그대로, 때로는 왜곡되기도 하고 미화되기도 했다. 이 책에는 황제에 대한 역사가들의 이러한 다양한 평가를 소개함으로써 숨은 사실을 드러내고, 역사를 읽는 균형잡힌 눈을 가질 것을 요청한다. 무자비함과 폭군의 상징으로 여겨져온 네로는 사실 잔인한 사람이었고, 친어머니까지 살해한 황제다. 하지만 그의 치세 “초기 5년간은 황금시대로 기억된다.” 그러나 아울렐리우스 빅토르는 이렇게 일갈한다. “사실, 네로가 남은 시간 동안 얼마나 추악하게 살았는지, 그가 제국의 지배자라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러한 부류의 존재를 기록한다는 것 자체가 역겹고 수치스럽다.” 그런데 이처럼 악명 높은 네로는 “원로원의 미움을 받았지만 로마의 서민들에게는 여전히 인기가 있어서 수년 동안 그의 무덤에는 철마다 싱싱한 꽃들이 끊이지 않았다.” 한 인물의 복합적인 면은 한 줄의 문장으로 연극의 한 장면으로 표현될 수 없음을 저자는 간파한 것이 아닐까. 또한 저자는 혼란의 시기에 제국의 질서를 확립한 갈리에누스에 대한 로마 역사가들의 평가는 균형을 잃었다고 평가한다. 그들은 갈리에누스를 ‘사악한 군주’로 묘사하면서 그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가장 중상모략을 많이 당한 로마 황제 가운데 하나로, 그에 대한 “이러한 편견은 후대 역사가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그들은 15년간 곤란에 처한 제국을 지탱하기 위해 기울인 갈리에누스의 고된 노력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로 낙인찍힌 디오클레티아누스에 대해 기독교인 역사가 락탄티우스는 “그는 탐욕과 분노로 세계를 혼란시켰다”라고 한 반면 유트로피우스는 “매우 근면하고 유능한 황제”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다른 로마 황제와 확연히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권좌에서 자발적으로 물러나 일개 시민으로 살아간 유일한 로마 황제라는 것이다. 4. 황제의 초상이 황제 측근들, 특히 여인들의 권력과 그림자에 의해 가려지거나 돋보이는 것은 시대와 공간을 불문한다. 악명 높은 메살리나를 비롯한 클라우디우스의 네 명의 부인들, 클라우디우스의 마지막 아내이며 네로 황제의 어머니로 야심이 컸던 아그리피나,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지배했던 그의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 등 황제의 가족 특히 황제를 둘러싼 여성들의 초상과 관련 설명은 한 국가의 황제이기에 앞서 나약한 아들이자 남편으로서의 황제의 다층적 삶을 비춘다. 당대의 서신이나 공문, 단상 형식의 짧은 글들은 황제의 면면을 좀더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재료다. 그 가운데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가 네로에게 조언하는 <관용에 관하여>, 소 플리니우스가 트라야누스 황제와 교환한 서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직접 기록한 《명상록》, 네로 황제가 쓴 시구, 군인이지만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갈리에누스가 직접 쓴 글 등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커다란 권력 변화를 불러온 굵직굵직한 전쟁이나 주변 민족과의 관계 등 그 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건(로마 대화재의 화살을 피하기 위해 자행한 기독교 대박해나, 콘스탄티누스의 법령이나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교회들, 고트족)들을 매우 세세히 설명함으로써 당시 정세나 사회상을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다. 그리고 제국 말기에 가서는 혼돈의 시기였던 260년에 로마에서 분리해 거의 15년간 독립국가로 존재했던 갈리아 제국의 황제들과 갈리에누스 시대에 제위 찬탈을 노린 찬탈자들에 대해서도 따로 지면을 할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