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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문 - 서경식
프롤로그 왕의 탄생 걸음마 인간의 출현 이사 첫 먹이 사냥 쓰라린 경험 겨울이 오다 왕의 아버지 숲의 바다, 슈하이 ‘벨벳 외투’ 퉁리와의 만남 늙은 투사의 최후 거인들의 싸움 하렘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 맹수들의 밤 숲의 수다쟁이들 연인을 잃다 조상들의 부름 고향으로 돌아오다 숲의 러시아인들 타이가의 소음 ‘갈라진 귀’ 타이가의 법 위대한 노인 초소에서 낯선 노래 퉁리의 생각 호랑이 사냥꾼 마지막 싸움 에필로그 옮긴이의 말 |
Nicolai Baik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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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반듯한 이마에는 ‘왕(王)’이라는 글자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났으며, 풍성하게 자라날 갈기가 나타나기 시작한 목덜미에는 또 다른 글자의 징후가 벌써 희미하게 보였다. 그것은 ‘위대한’이라는 뜻의 ‘대(大)’라는 글자였다.”
---p.92 “어미는 암컷보다 강했다. 캄캄한 밤, 사냥을 마치고 돌아가던 어미는 타이가 깊은 곳에서 메아리치는 수컷들의 음성에 자주 귀를 기울였다. 그럴 때면 심장의 박동이 멈추고 강한 전율이 강인한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어미는 걸음을 멈추었다. 가슴에서 애처로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새끼 특유의 소리로 귀엽게 가르랑거리며 한 발 한 발 자신의 뒤를 따르는 어린 것들에게 눈길을 한 번 던지는 것만으로 모든 유혹을 뿌리치기에 충분했다. 어미는 깊고 낮은 한숨을 내쉬며 핏줄의 부름에 최우선으로 복종했다. 그리고 온순하게 가족의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p.91 “멧돼지가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선 순간, 타이가의 제왕은 온몸의 무게를 실어 멧돼지에게 달려들어 앞발로 내리눌렀다. 멧돼지는 앞으로 달려 나가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엄청난 무게에 짓눌려 땅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강철 집게 같은 맹수의 턱이 먹이의 억센 목을 조여 왔다. 뾰족한 송곳니가 먹이의 관자놀이 동맥을 끊었다. 김이 나는 뜨거운 피가 달빛을 받아 빛나는 흰 눈 위로 콸콸 쏟아졌다. 희생물은 무겁고 거대한 머리를 숙인 채 단말마의 요란한 소리를 꽥꽥 내질렀다. 이것이 멧돼지 떼의 옛 수장이었던 늙은 투사의 최후였다.” ---p.119 “예전에 이 자유로운 황무지의 초록 언덕에는 순록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수많은 야생 동물들이 살았지만, 이제는 금속으로 만든 번쩍이는 날쌘 용이 끊임없는 굉음을 내며 굴러다녔다. 용은 길 철로를 따라 거대한 꼬리를 뒤에 끌고 다녔다. 고막을 찢을 듯 삑삑거리는 용의 소리는 숲의 신성한 평화를 깨뜨렸고, 타이가의 모든 야생 생물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미로 같은 산과 깊숙한 숲 속으로 도망쳤다.” ---p.1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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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밀림을 호령한 한국 호랑이, ‘위대한 왕’
‘위대한 왕’은 신령스러운 백두산 호랑이의 후예로 태어나 만주의 거대한 숲의 바다[樹海]를 지배하는 군주로 성장한다. 이 호랑이는 광활한 숲의 왕자(王者)이자 준엄한 자연 법칙의 현현이기에 타이가의 모든 동물들은 왕에게 복종한다. 특히 인간들은 위대한 왕을 산의 신령으로 모시며 절대적으로 순종한다. 왕은 굴종을 모르는 순수한 자연의 힘과 태곳적부터 이어져 내려온 밀림의 법칙을 대변하는 존재이며, 이러한 왕이 경외심을 느끼는 대상은 오직 타이가의 현자 퉁리 노인뿐이다. 그러나 철도로 상징되는 무자비한 문명이 만주 타이가를 송두리째 파괴하기 시작하자, 왕을 비롯한 숲의 터줏대감들은 새로이 등장한 인간에 맞서 반격에 나서는데……. 사라진 우리의 호랑이, 그리고 만주의 고통스러운 역사 『위대한 왕』은 무엇보다 절제된 문장과 밀도 있는 구성으로 책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지난 세기의 사라져 간 밀림과 한반도에서는 멸종되어 버린 한국 호랑이 이야기는 신화와도 같은 매력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또한 다양한 동물과 식생, 원주민들의 풍속에 대한 묘사는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풍요로운 세계를 생생하게 펼쳐 보인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 작품의 역사적 함의이다. 니콜라이 바이코프가 이 작품을 쓰던 때는 러시아가 동청철도(東淸鐵道) 부설권을 획득하여 만주를 호시탐탐 노리던 시기이자 한반도를 식민화한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본격화하던 때이다. 따라서 ‘번쩍이는 금속 용’(기차)으로 대변되는 문명의 침략에 대항하는 ‘위대한 왕’과 숲의 동물들은 인간의 발아래 상처 입고 쓰러져간 자연을 상징할 뿐 아니라, 식민자들에게 침탈당한 피식민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작품 후반, 호랑이들의 비극적 최후를 따라가는 독서가 주는 비장함과 가슴속 깊은 통증은 분명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위대한 왕』은 ‘문명’의 이름으로 파괴된 대자연을 향한 만가(輓歌)이자 파괴와 전쟁으로 점철된 이 땅의 20세기 역사에 대한 정치적 은유로도 읽을 수 있다. 고독한 망명자의 자연과 인간에 대한 성찰 『위대한 왕』의 독창성과 뛰어난 작품성은 저자 니콜라이 바이코프의 이력에서 비롯된다. 바이코프는 제정 러시아의 장교로서 러시아의 동청철도 수비대로 만주에 파견되었다. 그는 만주의 원시 밀림에 마음을 빼앗겼고, 이후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한다. 그리고 30여 년을 만주의 자연 속에서 생활하면서 만주 밀림의 동식물과 원주민 생활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담은 여러 작품을 저술하였다. 그중 『위대한 왕』은 1936년 〈만주일일신문〉에 일본어로 번역되어 연재되다가 단행본으로 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생생한 밀림 체험과 완성도 높은 구성이 어우러진 작품으로 평가를 받았다. 저자가 직접 그린 38점의 생생한 삽화 국내에 처음 완역되어 소개되는 『위대한 왕』에는 식물학자나 동물학자에 버금가는 저자 바이코프의 세밀한 관찰력이 돋보이는 삽화들이 실려 있다. 그의 그림은 작품의 배경이 되는 만주 타이가의 웅장한 자연과, ‘위대한 왕’의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습, 그리고 다양한 동물들을 꼼꼼한 스케치로 그려낸 것이다. 호랑이뿐만 아니라 멧돼지, 곰, 산양, 담비, 사슴, 산꿩이나 까치를 비롯한 각종 새들에 이르기까지 만주의 밀림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동물들이 마치 사진처럼 역동적이고 사실적으로 재현되어 있다. 섬세하고도 힘 있는 그의 그림을 통해 만주의 대자연 속에 존재했던 다양한 동물들의 모습을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도 『위대한 왕』을 읽는 또 다른 재미가 될 것이다. 재일 지식인 서경식 선생의 발문 재일 조선인 2세로 태어나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쳤던 고(故) 서경식 선생은 『위대한 왕』을 스스럼없이 ‘내 인생의 애독서’로 꼽았다. 이 책에 붙인 발문에서 그는 20세기 초 동아시아의 식민과 피식민의 어지러운 역사를 세밀하게 읽어내고, 재일조선인 2세로서 겪은 개인적 경험, 『위대한 왕』과의 깊은 인연 등을 유려한 문장으로 풀어냄으로써 작품의 가치를 한층 더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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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에 올라 산 정상에서 조망해 보니, 사방에 펼쳐져 보이는 산록평야는 어두컴컴한 바다처럼 광대하면서도 울창한 숲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이 숲의 바다를 자신의 왕국으로 삼았던 호랑이는 교활하고 약삭빠른 인간들이 그어놓은 국경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조선에서 만주로, 더 나아가 극동러시아로 자유롭게 유유히 활보하며 돌아다녔던 것이다. (……)
바이코프의 작품 세계는 지리적으로는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과 서쪽을 이어주는 공간적 확장을, 시간적으로는 19세기 말 열강들의 아시아침략에서 사회주의혁명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길고 긴 시간적 척도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 바이코프의 『위대한 왕』은 뛰어난 문학 작품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텍스트 읽기와 컨텍스트 읽기라는 두 가지 즐거움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 서경식, 「발문」 중에서 이 이야기는 단지 위대한 호랑이의 기념비적 일대기가 아니라 ‘자연의 목소리를 되찾아 주는 서사’의 한 줄기로 다가온다. (……) ‘생명’이라는 가치와 ‘숲’이라는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한 더 큰 사랑이야말로 이 호랑이를 여전히 ‘위대한 왕’으로 만드는 진정한 힘이다. - 정여울 (작가,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