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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면서
위만의 정변과 위만조선 건국 고구려사에 보이는 정변과 역사적 의미 고구려 차대왕의 정변과 초기 왕위계승의 원칙 『일본서기』에 보이는 백제의 정변에 대한 고찰 백제 초기 왕위계승과 정변 신라 상대의 왕위계승과 정변 신라 하대의 쿠데타와 대외교섭 발해 역사의 변혁 주 참고문헌 그림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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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이 고조선을 무너뜨린 것은 기원전 195년에서 오래되지 않은 시점일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위만이 정변 때 한나라가 10도로 나누어 쳐들어온다고 할 수 있는 주발이 연 지역을 평정하던 기원전 195년 말~194년 초 사이로 보기도 한다. 주발의 군대가 물러간 다음에는 허위 보고가 통할 수 없기에 위만의 정변 시기를 이 시기로 한정해 보는 것이다. 위만의 정변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또 다른 단서는 위만조선이 성립하고 한나라와 맹약을 맺은 시기가 ‘효혜고후시(孝惠高后時)’라는 사실이다. 『사기』에서 ‘효혜고후시’는 혜제(惠帝)의 재위기간인 기원전 194~188년에만 나타나는 용법이다. 따라서 위만의 정변은 기원전 188년 이전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특히 요동태수가 연왕을 거치지 않고 맹약을 맺었다는 점에서 연왕이 연소(年少)한 시기이고 한나라가 대외적으로 안정된 시기인 혜제 3~4년인 기원전 192~191년으로 좁혀서 이해하기도 한다. 위만이 이 시기에 한나라와 외신관계를 맺었다면 위만조선이 성립한 것은 늦어도 기원전 191년일 것이다. 따라서 위만이 노관의 반란 시점에 망명했다면 불과 1~4년 사이에 고조선이 멸망하고 위만조선이 성립한 것이다.
---「위만의 정변 과정과 위만조선 건국」중에서 정변의 명분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주몽은 천제의 아들이라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으며, 유리왕은 선대왕과 혈연적으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칼’을 들었다. 이는 주몽이 활을 통해 송양을 제압해 나가는 ‘무력’과도 통한다. 즉, 신성한 천손이라는 혈연성과 ‘활과 칼’이라는 무력 두 가지가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왕실의 권위와 현실적 힘, 두 가지를 갖춰 나가던 모습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민중왕 대부터 정변의 명분으로 ‘유소’, ‘노쇠’, ‘폭정’, ‘과도한 수취와 노역’ 등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점차 통치 대상인 백성을 향해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한 마디로 초기에 신화에 가탁하거나 자격을 논했지만 이후 점차 민생 등 현실 문제로 이어졌음을 엿볼 수 있다. 후기에는 명분을 특정하기 어렵다. 정변 주도 세력이 바뀌어 가는 모습도 어렴풋이 확인된다. 전기에는 혈연을 매개로 한 족적(族的) 기반이 강했다. 차대왕 대는 관나·환나·비류나 등 다수 부세력들이 결집하는 모습을 보인다. 신대왕 대는 지인(至仁)의 가치를 언급하고 있는데, 사상적으로 이를 따르는 세력과 연대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고국천왕 대 신진인사인 을파소의 국상 임명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했다. ---「고구려사에 보이는 ‘정변(政變)’과 역사적 의미」중에서 따라서 어느 사회든 국왕의 계승관계란 기본적으로 수직적인 승계가 특정 시점에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세대계승’의 가능성은 향후 자세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고구려에서도 빈번한 형제계승의 사례만을 근거로 초기에 부자계승의 원칙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즉 고구려에서는 초기부터 왕위계승은 부자계승이 기본적인 원칙이었으며, 형제간의 계승은 당대의 특수한 사정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초기에 유독 형제계승이 빈번했던 별도의 사회적 배경을 가정하고 이를 추적하는 것이 고구려의 왕위계승에 대한 좀 더 안전한 접근 방식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구려 초기 형제계승을 정당화하는 사례, 즉 아들이 있었는데도 형제간의 계승을 우선시했던 사례를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고구려본기에서 전하는 형제간의 계승은 민중왕의 사례만 제외하면 모두 사료 내에서는 납득할 만한 배경에 제시되고 있었다. 예컨대 산상왕 같은 경우 고국천왕이 자식이 없는 특수한 상황에서 즉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고구려 차대왕의 정변과 초기 왕위계승의 원칙」중에서 『일본서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백제의 정변 현황은 4세기 말, 5세기 초, 6세기 초, 7세기 초에 국한된다. 우선 4세기 말에는 진사왕의 왕위 찬탈과 정변에 의한 죽음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었고, 5세기 초에는 비유왕에 의한 정변의 정황을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6세기 초에는 동성왕 시해 사건의 배후에 무령왕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 있었으며, 7세기 초 의자왕 대에는 초기 전제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친위쿠데타 성격의 정변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중 진사왕에 의한 왕위 찬탈과 비유왕에 의한 정변, 의자왕의 친위쿠데타 등은 기존 『삼국사기』를 통해서는 확인하지 못했던 기록이다. 백제멸망 후 백제 유민들에 의해 전해진 백제 측의 사료를 통해 『일본서기』가 구성되었다고 추측되는 만큼 『일본서기』에 나오는 백제 관련 사료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보이는 백제의 정변에 대한 고찰」중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의 왕위계승 과정에 나타난 불합리성이다. 먼저 고이왕은 초고왕의 손자인 7대 사반왕 다음에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고이왕의 손자인 10대 분서왕을 이어서 다시 초고왕의 손자인 비류왕이 왕위에 오른다. 알기 쉽게 [그림-1]을 보면, 백제본기에서는 5~7대 초고계를 이어서 8~10대 고이계가 등장하고, 다시 11대 비류왕부터 초고계로 왕위가 돌아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계보대로라면 왕위계승의 원칙이 어색해지고, 고이왕과 비류왕이 즉위할 때 나이가 문제가 되어 백제의 초기 왕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바로 초고계와 고이계가 같은 시기에 교립 또는 양립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즉 두 왕계의 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초고왕과 고이왕이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음에도 백제본기에서는 선후관계로 나열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할 경우, 일단 초고왕과 고이왕을 모두 개루왕의 자식으로 설정한 궁금증은 풀린다. 그렇지만 백제본기 초기 왕들의 재위 시기나 각 왕대 있었던 사건들의 기년 등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또다시 제기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백제 초기 왕위계승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백제 초기 왕위계승과 정변」중에서 이 글에서는 신라 상대의 왕위계승과 그 가운데 발생한 정변의 내용을 다루었다. 또한 상대의 정변을 통해서 왕권이 어떻게 확립되어 갔는지를 살펴보았다. 먼저, 통상 한 왕조가 혈통에 의해서 왕위가 계승된다는 원칙에 주목하여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보이는 성씨의 사용 문제를 ‘박·석·김’ 3성의 사용 시기와 연관하여 검토해 보았다. 또한 한자의 사용 현황을 중심으로 신라 초기에는 그 사용이 여의찮았다는 점에 착안하여, 박씨와 석씨, 그리고 김씨라는 설정이 중고기에 비로소 등장하였으며, 구체적으로는 ‘성김씨’에 의한 『국사』 편찬과정에서 박씨와 석씨의 성씨가 새롭게 부여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 결과 상고의 왕위계승 사료도 진흥왕 대의 『국사』 편찬과정에서 소급 적용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다음으로, 중고의 정변과 왕권의 확립과정에서는 진지왕의 폐위와 진평왕의 즉위, 선덕왕과 국인에 주목하였다. 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적시된 내용이 서로 다른 형태로 기록되었으며, 따라서 이러한 사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사료의 행간에 드러나는 역사적 사실을 변증해 보려고 하였다. 기왕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하면서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였는데, 하나는 진지왕의 사망 일자의 사실성, 또 하나는 장지의 분포 문제 등에 주목하였다. 그 결과 진평왕의 즉위는 정변에 의한 왕위계승이었다는 점, 또한 선덕왕과 국인의 관계에 주목하여 그 또한 정변에 의한 왕위계승이었음을 살펴보았다. ---「신라 상대(上代)의 왕위계승과 정변」중에서 쿠데타는 체제 내 중요 권력을 가진 인물이나 소수 그룹이 갑작스럽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정치 행위이다. 신라 하대는 이 같은 쿠데타가 빈번하게 발생했던 시기로, 155년 동안 13차례의 쿠데타가 시도되어 총 4건, 약 30%가 실제 왕위 찬탈에 성공했다. 성공한 쿠데타로는 780년에 일어난 김양상의 쿠데타, 785년에 일어난 김경신의 쿠데타, 809년에 일어난 김언승의 쿠데타, 그리고 838년에 일어난 김명의 쿠데타가 있다. 이들 성공한 쿠데타는 하대 시작 후 약 60년 동안에 집중된 반면, 840년대 이후에 시도된 모든 쿠데타는 실패로 종결되었다. 이는 하대 후반부의 왕들이 쿠데타를 적극적으로 대비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쿠데타보다 지방 정치 세력의 반란, 백성들의 봉기, 새로운 국가 건설 등 다양한 저항 방식이 나타났고, 이는 중앙귀족 중심의 신라 사회가 해체되어 가는 과정과 일치했다. 신라 하대에 쿠데타로 집권한 왕들은 즉위 후 빠른 시간 내로 대외교섭을 시작하였다. 선덕왕, 원성왕, 헌덕왕 등은 모두 즉위 후 2년 이내 당에 사신을 파견했으며, 첫 대외교섭 상대국은 모두 당이었다. 이들의 외교 활동은 쿠데타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국제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신라 하대의 쿠데타와 대외교섭」중에서 발해의 천도는 그 국가의 정치, 경제, 문화 또는 군사상의 중심지 이동을 수반한다. 당시 발해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2000년대 초 용두산고분에서 2명의 발해 황후의 릉이 발굴되며, 발해의 건국지와 수도는 대략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와 흑룡강성 영안 일대로 좁혀졌다. 상경으로의 천도에서 언급된 ‘구국’이 바로 고구려 지역에서의 발해일 것이고, 옮겨간 ‘신국’은 상경에서의 새로운 발해라 할 수 있다. 동경에서 상경으로의 천도는 ‘옛 나라(구국)’를 벗어났다는 점에서 발해 역사에서 변혁적인 행위임에 분명하다. 발해 왕위계승에서 변혁적 사건은 문왕 사후, 대원의, 강왕 대숭린, 그리고 선왕 대인수 즉위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대원의는 왕위계승 후보였던 대화여의 나이가 어렸던 점, 대원의가 ‘족제’ 신분인 점, 그리고 차지하고 있던 위치도 즉위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대숭린의 즉위에 보이는 정변적 요소로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적지 않은 곤란을 겪었고, 대숭린이 문왕이 갖고 있던 책봉 칭호를 당나라에 요청하고서야 겨우 받은 데서 엿볼 수 있다. 대숭린의 아들인 간왕의 황후가 문왕 황후와 함께 정효공주 무덤이 있는 ‘진릉대’라는 공동의 공간에, 그것도 지근 거리에 묻혀 있다는 것은 이들이 서로 혈연적으로 밀접하고 친근한 관계임을 드러낸다. ---「발해 역사의 변혁(變革)」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