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17장 억울한 죽음
의병장 김덕령, 억울하게 죽다/도요토미, 심유경에게 속다/하늘도 노하다 18장 다시 일어난 전쟁 부록 일본군의 냉병기 |
|
사선상 앞에 엎드렸던 이순신 장군이 천천히 일어난다. 일어서서 두 손을 들어 자기 손으로 사모를 벗어 사선상 위에 공손히 올려놓는다. 다음에 두 손길은 다시 탕건을 벗어서 사모 옆에 나란히 놓는다.
하얀 손길이 그윽이 떨린다. 장군의 바르르 떨리는 흰 손길은 정이품 정헌대부의 표시를 드러내는 황금 각띠를 풀기 시작한다. 이제는 벼슬 안 한 서민의 몸에다가, 다시 죄인의 혐의를 눌러 쓴 몸이 되고 보니, 그대로 아연히 조복을 입을 수 없는 형편이다. 옆에서 이 모양을 바라보는 군관 송희립은 차마 장군 혼자 각띠를 끄르게 할 수 없다. 하염없이 솟아오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씻으면서 장군의 곁으로 나아가 끄르는 각띠를 받아 사선상 위에 올려놓는다. 장군은 천천히 쌍호랑이를 수놓아 붙인 흉배 달린 수박빛 비단 관대를 벗는다. 관대 옷자락을 받아 개키는 군관 송희립의 더운 눈물이 뎅겅뎅겅 장군의 관대 자락으로 떨어진다. 장군은 마지막으로 금관자가 달린 망건을 훌떡 벗어서 송희립에게 넘긴다. 이 때 장군의 눈시울도 화끈하면서 약간 안개가 서리우지 않을 수 없다. 운주당 아래 모여 서 있는 1천여 명의 장졸들은 일제히 소리를 죽여 눈시울을 닦는다. 금부 나졸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장군을 오랏줄로 묶으려 한다. --- p.214-215 |
|
눈앞에서 벌어지듯 생생하게 되살아난 역사
장장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벌어진 전쟁을 눈앞에서 직접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하는 박종화의 탁월한 표현력에서 그가 진정한 역사소설의 대가라는 사실을 깊이 느낄 수 있다. 전쟁이 시작되는 부산진이나 동래성 전투, 전쟁이 길어짐에 따른 백성들의 고통 등을 묘사한 장면에서는 그 울분과 전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강가에 떠 있는 저 배들은 모두 다 무엇을 실은 배들입니까?”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젊은 여인이 모기 소리보다도 더 가냘프고 기운 없는 목소리로 옆의 사람에게 물어본다. 품 안에는 갓난아이를 껴안고 젖을 물리고 있다. “저것이 모두 다 쌀을 실은 배라오.” 대답하는 사람은 누렇게 부황이 들어 난리에 쫓기는 늙은 사람이었다. 역시 기운 한 푼어치 없는 기진맥진한 목소리다. “아유, 저 배가 모두 다 곡식을 실은 배…….” 여인은 힘이 없어서 말끝을 맺지 못한다. 여인은 난리통에, 고양으로 피란해서 헤매다가 남의 집 외양간에서 몸을 풀었다. 미역 한 오라기 얻어먹을 수 없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전쟁의 비참한 상황을 생생히 묘사한 장면에서 당시 백성들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묘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사라진 아름다운 우리말과 당시의 느낌을 그대로 전해 주는 예스러운 문체 역시 이 작품의 매력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대대로 내려오는 그의 가훈이 조금 세력이 있다는 일가붙이나 건건찝찔하게 되는 사돈 나부랭이들에게 등을 대고, 머리를 숙이기 싫어하는 맑고 깨끗한 전통……. 그가 찬동하는 말을 들으니 유성룡은 마음이 헝그럽게 좋다. 촌수가 아주 멀거나 친분은 있으나 가깝지는 않다는 의미의 ‘건건찝찔하다’나 여유가 생겨 마음이 가볍다는 뜻을 지닌 ‘헝그럽다’ 같은 예스러운 단어들의 사용은 작품의 색깔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우리말에 대해 새롭게 눈뜨게 한다. 피바람을 뚫고 다시 돌아온 역사 속의 영웅들 임진왜란은 뛰어난 어느 한 영웅의 힘으로만 치러낸 전쟁이 아니다. 7년에 걸친 기간 동안 침략군에 맞서 수많은 영웅이 목숨을 바친, 임금을 위해서가 아닌 나라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싸운 전쟁이었다. 월탄 박종화는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린 계월향, 바다에서는 결코 한 치의 침략도 허용하지 않았던 이순신 장군, 원수를 갚기 위해 적장과 함께 물속으로 뛰어든 논개, 붉은 옷을 입은 장군 곽재우, 억울하게 죽은 천하장사 김덕령 등 수많은 영웅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애정어린 시선으로 생생히 그려냈다. ‘역사소설’ 하면 떠오르는 작가, 월탄 박종화 6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끝없이 솟아오르는 창작력과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으로 많은 작품을 생산해 낸 월탄 박종화. 그의 대표작이 바로《임진왜란》이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작가가 다루고 싶었다던 임진왜란을 소재로 하여, 3년여에 걸쳐 장대한 필치로 펼쳐진 작품이다. 월탄이 후기에서 “내가《임진왜란》을 소설화하고 싶은 것은 필생의 대원이었다. 이제 이 작품을 끝내 놓고 보니 내 원은 얼마쯤 이룬 셈이라 스스로 어깨가 거뜬해짐을 느낀다”고 할 정도로 많은 애정을 가지고 쓴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