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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 비주를 찾아서
아버지조차 미웠던 산버찌술 조선의 정신이 백 가지 꽃으로 발효된 백화주 우리 술의 비방이 총결집된 과하주 과거시험용 머리맑은 술, 잎새곡주 도산서원에서 흘러온 무술주 발견의 기쁨, 대통 속 진공 발효 황죽 매실주 어둔 세월 속에 숨은 술, 짚가리술과 법성포 토종 녹두장군을 위로한 술, 죽력고 되살아나는 약주의 백미, 여산 호산춘 향음주례와 전주의 술 약술을 향한 굳건한 믿음 주산 이규보와 조지훈을 찾아가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술은 내가 만든 술 전통주 스쿨을 가다 책을 마치며 - 우리 술은 맛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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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향음주례의 절차는 대단히 느리고 복잡하고 까다롭다.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여, 술을 대접하기까지의 동작이 102단계로 구분될 정도다. 잠깐 그 절차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주인이 앉아 잔을 내려놓고 손님에게 인사하고 일어나, 계단을 내려와 서쪽을 바라보고 선다. 주인은 내려오면서 ‘귀빈을 번거롭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손님도 계단을 내려오면서 ‘주인께서 욕보시는데 제가 자리에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라고 답하며 동쪽을 바라보고 선다. 주인은 북쪽의 물대야에서 손을 씻는다. 손님은 남쪽으로 가서 주인에게 ‘청컨대 손을 씻지 마시오.’ 라고 말한다. 주인은 ‘깨끗이 아니할 수 없습니다.’라고 답한다.(…중략…)주인은 잔을 받아, 손님 자리 앞 서쪽으로 나아가 잔을 들고 북쪽을 바라본다. 손님은 서쪽 계단 위에서 북쪽을 바라보고 절을 한다. 이때 주인은 조금 물러난다. 손님은 주인 자리의 동쪽 끝에 가서 북쪽을 바라보고 선다. 주인은 손님에게 잔을 드린다.’ 잔을 받았다고 손님이 곧바로 술을 마시는 것은 아니다. 이러고도 절을 하고, 안주 들고, 자리 바꿔 앉고, 수건 받아 손을 닦고, 땅에 제주하고, 절을 하고 나서 술을 마시고 다시 절을 한다. 술을 마시고 나서는 “술은 고상한 음식입니다. 술은 신성한 음식입니다. 술맛이 아름답습니다.” 따위의 술을 숭상하는 말도 한다. 그만큼 옛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술을 배우고 권했다. --- p.181~1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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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막걸리도가에서 20년 일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자기가 마실 술은 자기가 빚는다. 다른 술은 입에 닿지도 않고 믿음도 가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의 말이 어딘가 독선적이라고 느꼈지만, 완벽함을 추구하려는 장인의 어투 같아 보였다. 그는 초여름에 산속에 흩어진 야생 벚나무를 타고 올라가, 산버찌를 따느라 여기저기 상처가 났다고 바짓가랑이를 걷어 보였다. 손수 내린 40도 증류주, 그것도 1년간 묵힌 것이 있어서 그 속에 산버찌를 담가놓았다고 한다. 술맛이 딱 좋을 무렵, 그는 술을 한 병 담아 아버지께 달려갔다. 자신이 빚은, 몸에 좋은 술을 먼저 아버지께 드리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막상 그의 아버지는 이따위 것도 술이냐며 밀쳐버리더란다. 술을 빚는다면서 빚을 잔뜩 지고 살아가는 아들이 탐탁지 않았으리라. 아버지의 심사를 모르는 바 아닌데도, 그 순간 사내는 아버지가 원망스럽고 미웠다. 그러나 사내는 꾹 참고 또 참았다. 사내는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술이 바로 이 산버찌술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연이어 늘어놓는 찬사는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조차 미웠다는 말에 넋을 빼앗겼고, 그보다 먼저 술맛에 감동한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 p.1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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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내 술 이외다! -술 빚는 지존들의 삶과 얼이 담긴 비주, 그 숨겨진 이야기
우리 술이 이렇게 숨어 지내오게 된 것에는 일제시대 조세법 시행 이후 이어진 밀주단속과 현대화 바람으로 우리 술을 고리타분하게 생각하게 된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 등 외부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지만, 기본적으로 제조방법에 있어서의 한계점이 요즘의 양조방식과 부딪히는 점도 한 몫을 한다. 단시간 내에 대규모로 제조되는 현대식에 비해, 밑술을 몇 번에 걸쳐 담그고 소줏고리에 몇 시간 동안 받아내는 전통방식은 소규모로 장시간이 들어 얼핏 비효율적인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술도 사람이 마시는 일종의 음식인지라,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내는 것과 사람이 일일이 과정 하나하나 참섭하여 만들어내는 것은 엄연히 그 맛과 질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자가양조에 극히 제한적인 법제까지 단단히 거들고 나서니 우리 술, 점점 우리 입에서 멀어질 수밖에. 그렇다면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든 우리 술, 옛사람들조차 사라짐을 아쉬워하던 우리 술, 몸에도 좋고 입에는 더 좋은 그 명주들이 어떻게 지금껏 이어져올 수 있었던 걸까? 이는 고집스레 우리 술을 지켜온 명주명인(名酒名人)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 저자는 이야기한다. 술 하나 빚기 위해 이들이 들이는 정성과 노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뇌경색으로 쓰러져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잎새곡주를 빚는 윤석분 씨나, 무술주를 만들기 위해 24시간 개고기 삶는 솥을 지키느라 밤잠도 마다하는 이시남 씨, 지역을 대표하는 술 호산춘을 복원하기 위해 수억이 넘는 돈을 들인 김시중 씨, 자신이 빚은 술을 뿌리치며 희석식 소주를 선택하던 아버지가 원망스럽고 미웠다던 산버찌술 만드는 사내 등 저마다의 사연이 더해진 우리 술들은 술 빚는 명인들의 삶과 얼이 함께 빚어져 그 존재만으로도 보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으로 적셔준다. 전통이 담기고, 역사가 흐르고, 이야기가 있는 우리 술 한 잔 5년여 간의 술 여행을 다니며 저자가 느낀 것은 ‘아쉬움’과 ‘허전함’이었다. 술이 맛없거나 술안주가 부족해서가 아니고, 대작할 사람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문화재나 명인으로 지정된 훌륭한 전통술이 있지만, 그 술과 동행해야 할 문화가 가뭇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술은 단순히 마시고 즐기는 식음료가 아니다. 한 시대를 보여주는 문화 상징물이다. 저마다 ‘술’이라는 말과 함께 떠오르는 공간과 분위기, 기분이 있다. 가령 와인이 놓인 재즈바나 왁자지껄한 생맥주집, 포장마차에서 어묵 국물과 함께 마시는 소주 등 하나의 술은 그만이 가질 수 있는 분위기나 이미지가 떠오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 전통주는 어떠한가? 가야금 소리가 들리고, 목이 긴 백자병과 문어 안주가 놓인 소반의 모습일까? 이것은 드라마 속에서나 보았던 장면이지, 현실의 장면은 아니다. 고작해야 제주(祭酒)로 올리거나, 명절 선물용으로 구매하는 모습이 떠오르는 정도다. 일제 식민지와 전쟁기를 거치고 서구 자본주의가 이식되면서, 우리 전통 문화가 한꺼번에 쓸려 나가면서 생겨난 낯선 풍속도인 것이다. 허나, 분명 우리에게도 자랑스럽게 소개할 수 있는 주도와 술 문화가 존재해왔다. 각 집안에서 술 빚는 방법 등을 일러둔 규훈이 있었고, 술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를 서책에 일러두었고, 술과 함께 안주삼아 들으면 좋을 권주가가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옛사람들은 향음주례라는 의식을 만들어 술의 예법과 공동체의 예법을 익혔다. 요즘 사람들이야 예의범절을 풀어버리고 잠시잠깐 방종의 시간을 갖는 것으로 여긴다. 술을 어떻게 마셔야 하는지, 술을 얼마만큼 마셔야 되는지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성교육을 한번도 받아보지 못하고 결혼하는 것처럼 음주 교육을 한번도 받아보지 못하고서 술꾼이 되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의 술 문화, 전통의 우리 술 예절은 신선한 자극은 물론, 자랑스런 우리의 전통과 술 문화에 대해 다시금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왜 다시 우리 술인가? -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 술, 우리가 지켜가야 할 우리 문화 그렇다면 저자 허시명은 왜 숨겨진 우리 술들을 그들의 술 만드는 비법까지 하나하나 캐내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인가? 단지 우리 술이 이토록 맛있고 훌륭하다는 사실을 많은 이에게 알려주기 위하여? 물론 이토록 소중하고 귀한 술들이 그만큼의 대접과 배려를 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대중에게 소개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다. 보호도 사랑도 대상을 알아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숨겨진 우리 술, 비주(秘酒)를 옛 문헌에서 찾아 이를 이어가고 되살려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그의 눈과 손이 그려낸 현실 속에서의 그들의 모습은 오직 술만을 생각하고 이를 마시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장인의 경지에 다름 아니다. 그들에게 술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약이고, 전통이고, 시대이고, 문화다. 한 시대의 술은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그대로가 담긴 상징물인 것이다. 백화주에 성리학의 정신이, 무술주에는 퇴계의 사상이, 초화주에는 이규보의 시심이, 잎새곡주에는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 담겨있듯, 술 한 잔에는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시간과 함께 녹아 있다. 대가 끊겨 모습을 찾기 힘든 우리 술은 곧 잊혀져가고 사라져가는 우리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우리’, 그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하게 된다. 어느 샌가 성큼 다가온 가을, 한해 농사의 마감을 축하하고 감사드리는 추석이 바로 코앞에 다가왔다. 말로만 신토불이, 우리 농산물 하지 말고 우리 땅에서 난 우리 곡물로 만든 우리 술을 한번 마셔보자. 알면 마시고, 마시면 사랑하게 되느니. 그것이 바로 우리 술, 우리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