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서문] 왜 칸트를 위해 싸울 가치가 있는가? | 슬라보예 지젝…7
서론…17 1. 일상생활의 (도덕?)병리학……………25 2. 자유의 주체……………45 어떤 자유?…47 어떤 주체?…51 3. 거짓말……………75 칸트와 ‘거짓말할 권리’…75 무조건적인 것…90 사드적 덫…99 4. 가상의 논리학으로부터 요청들까지……………105 가상의 ‘파도치는 대양’…105 ‘인격person은 또한 가면mask을 의미한다’…111 요청들로의 이행…121 5. 선과 악……………127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환상…127 자살의 논리학…133 악의 등급…138 천사처럼, 악마처럼…144 ‘주체 없는 주체화’로서의 행위…153 6. 문학에서의 행위와 악……………167 발몽의 경우…170 돈주앙의 경우…192 7. 도덕법칙과 초자아 사이에서……………217 감정의 양자…217 숭고, 그리고 초자아의 논리…231 법의 지위…247 8. 정신분석에서의 윤리와 비극……………259 몇 가지 예비적 언급들…259 오이디푸스, 혹은 기표의 추방…267 욕망의 도난―그리고 그 대가로, 어머니…267 사물의 죽음…286 아버지란 무엇인가?…293 오이디푸스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301 말의 볼모…305 시뉴, 혹은 잔여의 향유…321 윤리와 공포…324 향유―나의 이웃…336 윤리 속의 실재…357 순수 욕망에서 충동으로…363 9. 그리하여…… ……………375 옮긴이 후기…391 색인…394 |
|
내가 알렌카의 책에 대해 한없는 존경심과 경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와 같은 경외의 태도는 언제나 저자에 대한 안락한 우월함의 위치를 전제하는 것이다. 즉 위에서 저자를 내려다보면서 그/녀의 저술의 질에 대해 호의적 판단을 베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동료 철학자로서 실재적 존경의 유일한 표시는 질투어린 증오감이다―어떻게 해서 그 저자가 말하는 바를 내가 생각해내지 못했다는 말인가?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전에 갑자기 죽어버려서 그녀의 결과물이 나의 자기만족적 평온을 교란시키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내가 알렌카의 책에 대해 해줄 수 있는 최대의 답례는 원고를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빈번하게 질투심과 노여움으로 멍하니 사로잡혀 있었으며, 나의 철학자의 실존 바로 그 핵심에서 위협을 느꼈으며, 내가 금방 읽은 것의 전적인 아름다움과 활력에 위압당했으며, 어떻게 그와 같은 본래적인 사유가 오늘날 여전히 가능한 것인가 의아해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결론을 내려보자. 나는 알렌카에 대한 일종의 ‘선도자’ 역할을 결코 자처하지 않는다. 나는 일련의 공동 프로젝트에서 그녀와 함께 연구할 수 있는 것과 관련해 겸허하게 내게 특전이 주어진 것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알렌카의 책이 고전적인 참조 저술이 되지 않는다면 유일하게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은 우리 학계가 자기파괴의 모호한 의지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뿐일 것이다.
--- 지젝의 서문중에서 |
|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장부터 7장까지는 칸트의 윤리학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으며, 가장 긴 장인 8장에서 고대의 비극과 근대의 비극을 통해 앞에서 설명된 것을 예증의 방식으로 재기술하고 있다. 단 6장은 5장에서 설명된 악의 개념을 발몽과 돈주앙이라는 문학적 사례로 예시하고 있는 특별한 장이다.
이렇게 이 책을 두 부분으로 나눌 때 전반부에서 인상적인 것은 주판치치가 칸트의 용어들을 라캉의 용어로 재해석하는 부분들이다. 예를 들어 [실천이성비판]에 나오는 상위 욕구 능력과 하위 욕구 능력의 구분에 대해 칸트의 비판은 잘 알려져 있는 것인데, 여기서 이 ‘욕구 능력’이라고 하는 것을 주판치치는 ‘욕망’으로 해석한다. 칸트의 ‘욕구’ 개념을 라캉의 ‘욕망’ 개념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둘 모두가 영어로 ‘desire’로 번역되고 있다는 것 말고도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통상적으로 이 ‘욕구’나 ‘욕망’은 칸트에게서건 라캉에게서건 ‘표상’ 개념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판치치는 칸트에 대한 방대한 해석 끝에 라캉이 욕망의 윤리라고 부르는 것을 칸트로부터 추출하는 데 성공한다. 욕망의 윤리란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 양보하지 말라는 준칙으로 정식화되는 윤리이다. 욕망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욕망을 만족시키는 궁극적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욕망은 하나의 대상에서 또 다른 대상으로의 끊임없는 환유 과정에 종속된다. 욕망의 윤리란 바로 이러한 욕망의 논리를 그 극한으로 가져간 것이고, 욕망의 궁극적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집하는, 다시 말해서 순수한 욕망의 논리를 고집하는 논리이다. 후반부에서 고전 비극의 여주인공 안티고네는 바로 이 욕망의 윤리를 체화하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주판치치는 라캉의 입장이 어떻게 욕망의 개념에서 궁극적으로 충동과 향유가 작동하는 실재라는 차원으로 이동하는가에 주목하면서 욕망의 윤리를 넘어선 새로운 윤리를 정초하고 있다. |
|
슬로베니아 학파의 기획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 가운데 하나는 정치적 영역과 윤리적 영역 사이에 있는 장벽 혹은 간극을 폐지하는 것이다. 정치적인 것은 윤리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한 언제나 ‘현실 정치’의 수준으로 전락할 위험에 빠지게 된다. 반면에 윤리는 정치로부터 분리될 때 언제나 추상적인 인간의 행위만을 다루는 것으로서 환원되고 만다. 레닌의 반복과 재정식화를 통해 민주주의 너머를 역설한 지젝의 작업과 더불어 주판치치는 칸트의 윤리적 기획을 정교하게 분석하면서 윤리를 재정식화하는 기획에 착수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윤리에 관한 책이다. 근래에 윤리는, 혹은 윤리적인 것은 우리 주변에서 다시 느껴지고 있다. 더 나아가 오늘날은 신학적인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테러리즘이나 근본주의자가 그 어느때보다도 우리 가까이 있다는 의미에서뿐만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내뱉는 외침과 구호들의 텅 빈 메아리들도 윤리와 행위의 빈 공백을 느끼게 만든다. 알렌카 주판치치의 ?실재의 윤리?는 바로 이 공백 속에서 정신분석이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라캉은 사회적 구조의 변화를 담론이론으로 정식화했는데, 이에 따르면 오늘날의 근대성은 주인담론에서 대학담론으로의 이행의 결과인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주인의 윤리적 자세가 무엇이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주인담론의 배후에 있는 윤리적 준칙은 명예보다 생명을 선택하는 것을 가장 큰 죄로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성은 이 주인담론에 대한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못했다. 생명을 상실하는 것, 바로 그것을 최악의 것으로 보는 연약한 준칙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 준칙은 개념적 힘도 결여하고 있으며 동시에 ‘동원’의 힘도 결여하고 있다. 주판치치는 이 책에서 주인담론에 토대를 둔 윤리를 거부하는 동시에 윤리의 궁극적 토대를 ‘자신의 생’으로 환원시키는 근대적 혹은 탈근대적 윤리라는 불만족스러운 대안을 똑같이 거부하면서 새로운 윤리를 정초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슬로베니아 라캉 학파의 탁월한 철학자인 주판치치가 이 작업에서 동반자로 선택한 둘은 칸트와 비극이다. 이 책의 절반은 칸트의 윤리학적 텍스트에 대한 정교한 독해를 담고 있다. 실로 주판치치가 제공하는 칸트에 대한 독해는 그것의 해석적 힘만으로도 놀라운 것이다. 독자들은 그 악명높은 칸트가 결국 명쾌하게 해명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으로도 이 책의 가치를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주판치치가 부활시킨 칸트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칸트보다 훨신 더 섬뜩하다. 칸트는 드물게도 윤리의 심장부를 건드렸으며, 따라서 윤리학의 신경을 건드렸다. 라캉의 정신분석은 바로 그것이 향유로서의 실재임을 알려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