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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4
제1화 천국과 가까운 곳 9 제2화 유령이 꽃피는 계절 83 제3화 남은 시간을 보내는 방법 175 제4화 그리고 밤은 온다 237 에필로그 276 작가의 말 2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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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의실에서 희고 깨끗한 유니폼으로 갈아입는다.
옛날에 비하면 간호사 유니폼도 컬러가 다양해졌지만, 우리 병원은 여전히 흰색이다. 어깨 근처까지 자란 머리카락을 뒤로 묶는다. 머리핀이 탁 소리를 내면, 그 순간을 신호로 오늘도 나의 일이 시작된다. --- p.5 “웃기지 않아요?” 상자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걸까. 고타로가 작고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전까지 다른 곳을 향해 있던 고타로의 눈길이 상자에 가닿았다. “그거, 엄마가 가져온 거예요. 마시면 병이 낫는 물이라나.”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까. 어려운 문제다. 자유 진료. 이른바 민간요법이다. --- p.23 현실에서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의료진이 아무리 고심하고 환자 본인이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이 결집해 있다. 나도 여기서 최선을 다해 일할 것이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 pp.72-23 “돈도 약도, 심지어 병실도 남아도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그 귀중한 돈을 낫지도 않을 환자한테 쓰는 건 쓸데없는 일 아닌가요?” “그게…….” 로퍼는 잠시 앓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말을 멈췄다. 마지막 한 마디만은 어떻게든 삼키려 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그 말은 입 밖으로 흘러나와 버렸다. “……어차피 죽을 텐데.” 속마음을 몽땅 털어놓았을 텐데 로퍼의 표정은 후련해 보이기는커녕 몹시 불편해 보였다. 마치 본인 입에서 나온 말의 추악함에 겁먹기라도 한 것처럼. --- p.107 “병원에 유령이 나온다는 얘기, 사실이에요?” 야간 근무 휴식 시간에 다키모토가 파래진 얼굴로 물었다. 어쩐지 야간 근무가 시작된 무렵부터 다키모토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이유 때문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뻔했다. “어제 환자분 가족이 이야기하는 걸 우연히 들었거든요.” “뭐든 그대로 믿어버리는 건 좋지 않아.” --- p.112 “아무 일 없어. 그냥 연차를 써야 해서 그래.” 그런데…… 목구멍까지 나올 뻔한 말을 겨우 삼켰다. 말해야 할 것도, 해야 할 일도 정해져 있는데 막상 꺼내려니 왠지 자신이 없었다. 조금만 더, 적당한 때를 봐서 이야기하자. 그 정도의 시간은 내 인생에 남아 있을 테니까. --- p.196 병실에 남겨진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시곗바늘이 조용히 움직였다. 밀려왔다가 다시 멀어지는 파도처럼 병실 안에는 숨소리만이 느릿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썰물이 지면 파도 소리가 작아지듯 독서가 씨의 숨소리도 조금씩, 조금씩 잦아들었다. --- p.267 “하지만 내일부터는 나도 틀림없이 유령을 보게 될 것 같아.”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이별의 아쉬움이 오롯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가능한 한 오래, 그리고 건강하게 있어 줘.” 오타케 씨는 미소를 띤 얼굴로 말하며 먼저 밖으로 나갔다. --- p.2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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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를 통해 삶을 마주하는 방법
끝이라 생각했던 곳에서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 소설은 완화의료 병동 간호사 구라타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간호사는 출근해서 옷을 갈아입는 것부터 일이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직업 의식이 뚜렷한 구라타는 겉으로 보기엔 무던한, 더 나아가 무미건조해 보일 정도로 어떤 상황이든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지만 환자를 대할 때는 누구보다 정중하고 섬세하다. 구라타는 72세 대장암 환자인 하시즈메의 말을 들어주며 잘 알지도 못하는 야구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혼자서 움직이지 못하는 마쓰모토의 자세를 능숙하게 보조하거나 ‘목숨값’을 물어보는 소년 고타로에게 다정한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이처럼 암으로 인한 환자의 신체적 통증만이 아니라 심리적 고통도 살펴주는 완화의료 병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이 결집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완치가 불가능한 환자들을 돌보며 그들의 삶을 정중하게 대하는 구라타의 시점을 따라가다 보면 차갑고 낯설었던 병동의 이미지가 어느새 온기로 가득 찬 공간처럼 느껴지게 된다. 이처럼 고요한 일상을 유지하던 병동에서 어느 날 유령에 대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하고, 소설은 뜻밖의 전개로 예상치 못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섬세하게 구성한 저자의 예리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것도 이 소설의 매력이다. 묵직한 울림과 소설적 재미를 동시에 잡은『그리고 밤은 온다』는 독자들에게 도노 가이토라는 이름을 선명히 새겨줄 것이다. 상실이 건넨 새로운 희망 당신의 삶에 마음을 기울이던 누군가를 기억하며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처럼 선명한 슬픔은 없다. 소설에 남긴 저자의 말처럼 ‘소중한 이의 죽음을 배웅할 때 나의 일부도 함께 죽어가는 느낌’이 딱 그럴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죽음을 통해 겪는 상실감이야 말로 ‘세상을 떠난 이가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알려주는 증거’라 말하며 우리가 살아가면서 맺어온 관계에 대해 오래 곱씹어 보게 한다. 표면적으로 상실은 잃거나 사라진 것이지만 분명한 무언가를 남기기도 한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애도하는 마음은 무기력했던 삶에 새로운 이정표를 가리켜주며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품게 한다.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삶의 동기를 얻는다는 게 적절치 않게 비춰질 수도 있으나, 우리는 늘 상실로부터 삶을 배워왔다. 잃어버린 적 있기에 지키고, 후회해본 적 있기에 도전한다. 『그리고 밤은 온다』는 인간의 존엄성과 사랑을 섬세하게 담아낸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상실을 마주할 용기를 전하고 ‘죽음이라는 끝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어야 할 인생’을 다시 시작해 보게 할 소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