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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 서문
제1부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예 히포크라테스 제1장 코스의 히포크라테스 제2장 테살리아 사람 히포크라테스 제3장 히포크라테스와 코스학파 제4장 저자를 알 수 없는 저술들 제2부 의료 시술을 하는 의사 제5장 의사와 대중 제6장 의사와 환자 제7장 의사와 질병 제3부 히포크라테스와 당대의 사상 제8장 히포크라테스의 합리주의와 신성神性의 대립 제9장 히포크라테스와 인문과학의 탄생 제10장 의술에 대한 도전과 인식론의 탄생 제11장 의술의 위기와 철학에 대한 대응 제4부 히포크라테스주의의 위대성과 한계 제12장 보이는 것의 관찰을 통한 보이지 않는 것의 재구성 제13장 건강, 질병 그리고 체질 제14장 고대 히포크라테스주의의 자취 약어표 부록1: 선서 부록2: 코스 의사를 칭송하는 명예 선언문 부록3: 히포크라테스 총서에 포함된 저술들 주(註) 참고문헌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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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들에게서 의술을 익힌 히포크라테스는 먼저 고향에서 진료를 시작했으며 결혼도 거기서 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세 아이를 낳았다. 테살로스와 드라콘이라는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들은 가문의 전통에 따라 히포크라테스에게서 의술을 익혔다. …또한 그의 딸은 히포크라테스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폴리보스와 결혼하였다.
--- p.50 히포크라테스의 의술에서 가장 중요한 발상 가운데 하나는 한 지역의 자연 환경이 건강과 질병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이다. 이 설명은 갈레노스가 히포크라테스라는 본보기에 의해 영감을 얻은 ‘이상적 의사상’ 속에 담겨 있다. “그는 폴리보스와 다른 제자들에게 진료를 맡겨 두고 자신은 온 그리스를 돌아다니며 여행했다. 그 여행은 자연 환경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필요했다. 그는 자신이 강의에서 배운 것을 체험으로 판단하기 위해 직접 자기 눈으로 다른 도시들을 둘러보고 싶어 했다.” --- p.60 “내 이름은 내가 갔던 곳보다 더 멀리까지 이르렀다”라고 히포크라테스는 <제단에서의 연설>에서 밝혔다. 사람들은 그가 개업의였는지 공의였는지, 아니면 권세 있는 귀족 가문의 주치의였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자료에서는 그 단서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갈레노스가 ‘이상적인 히포크라테스’라고 찬양했듯이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 p.64 히포크라테스는 코스 섬에서 태어나서 오랫동안 그리스 북부에서 활동하다가 테살리아의 라리사에서 눈을 감았다. 전기 작가들은 사망 당시 그의 나이를 85세, 또는 90세, 심지어 109세라고까지 한다. 따라서 그의 사망 시기는 기원전 375~351년 사이라는 꽤 넓은 범위로 설정된다. “여기에 태양신 아폴론의 불멸의 후손, 코스 사람의 후예, 테살리아 사람 히포크라테스가 누워 있노라. 그는 건강으로 무장을 하고 질병을 물리쳐 무수한 승리를 거두었으며, 우연이 아니라 과학으로 커다란 영예를 안았노라.” 히포크라테스는 죽은 뒤 헤라클레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 p.76-77 “하루는 젊은 양치기 소녀가 시골길을 걷고 있는 히포크라테스와 마주쳤다. 그녀가 반갑게 인사를 하자 그도 반갑게 답했다. ‘날씨가 좋군요, 아가씨!’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똑같은 양치기 소녀가 집으로 돌아오다가 다시 만나 인사를 하자 히포크라테스는 이 같은 인사로 답했다. ‘날씨가 좋군요, 아주머니!’ 그녀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졌다.…그러자 동료가 히포크라테스에게 물었다. 히포크라테스가 어떻게 그녀가 순결을 잃었다는 사실을 추론해 낼 수 있었는지를 알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히포크라테스가 말했다. ‘그녀의 걸음걸이를 통해서! 왜냐하면 아가씨의 걸음걸이는 아주머니의 걸음걸이와 차이가 있거든.’ 그러자 그의 동료는 탄복해 마지않았다.” --- p.85 히포크라테스의 의술 보급은 의술의 전승 과정에서 발생한 진정한 혁명이라는 평을 받는다. 처음에는 오로지 아스클레피오스 가문 안에서만 전승되어 오다가, 가문 밖에서 선발된 학생들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갈레노스는 이렇게 말했다. “얼마 안 있어… 의술은 관례적으로 혈족에게뿐 아니라 가문 밖 사람에게도 전승되었다. …이때부터 의술은 더 이상 아스클레피오스 가문의 독점물이 아니었다.” --- p.94 <선서>의 핵심적 기능은 의술을 소유한 가문의 특권과 이익을, 그 지식을 소유하게 된 그 순간부터 다른 가족들에게도 지켜 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윤리적 책임’이란 덕목 때문에 하나의 모범적 가치로 인정받아 왔던 이 유명한 <선서>는, 실제로는 특정한 시대의 특수한 사회적 맥락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 <선서>는 원래 한 가문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전승되어 오던 의학적 지식을 외부 사람들에게도 개방한다는 의미를 지닌 의술의 변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 p.95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 또한 의술에 대한 사랑이 있다.” --- p.128 의사의 참된 위대함은 바로 이러한 점에 있다.…오늘날까지도 히포크라테스학파 의사의 영예와 그 고귀함의 원천이 되어 온 윤리적 측면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윤리적 목적을 자신의 명성이나 의학 기술이 아니라 오직 환자에게 두었을 뿐이다. --- p.191 히포크라테스 총서의 주요 부분은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의 해방>이 나온 시기와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이 저술을 하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환자에 대한 의사의 임무를 주제로 다룬 히포크라테스 총서의 고결한 이상은 완전히 모범적인 사례들이다. 그리고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에서 보여 준 그들의 인간 존중 정신 또한 아주 비범한 것이었다. --- p.214 “질병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일이 항상 이루어지게 하라. 낫게 하라, 아니면 악화시키지는 마라.” 여기서 히포크라테스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앞서서 의술의 목적이 환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주장한다. 이 점은 히포크라테스 사상의 근본을 구성하는 인간적 관심의 측면이다. 심지어 철학자들의 이론처럼 의사가 의술에 대해 일반적 의미를 정립하려 할 때도, 그의 의견에는 특히 풍부한 실제 경험이 담겨 있다. “…의사는 참혹한 광경을 보고, 불결한 것을 만지며, 또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도 (환자의) 사사로운 불행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같은 기술을 사용해서 환자들은 가장 나쁜 해악, 즉 질병, 상처, 고통과 죽음을 물리친다…”라는 <호흡>의 한 구절은 ‘의술이 시술 행위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술을 받는 사람에게 유익하다’라는 생각을 먼저 명확하게 개념화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 p.215-2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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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 선서>
나는 의술의 신 아폴론과 아스클레피오스, 건강의 여신 히기에이아, 파나카이아, 그리고 모든 남신들과 여신들을 나의 증인으로 삼고 맹세하나니, 이 선서와 서약을 내 능력과 판단에 의거하여 실천해 나갈 것이다. 내 의술의 스승을 친부모와 똑같이 모셔서 내 일생의 동반자로 삼으며, 그에게 금전적인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내가 지닌 것을 그와 나누고, 그의 가족을 내 친형제처럼 대하여 만약 그들이 의술을 배우고자 한다면 대가나 서약 없이 가르쳐, 의학적 가르침과 구두적 전승, 그리고 모든 다른 교훈들을 오로지 내 아들과 스승의 아들과 의사의 선서에 서약한 제자들에게 전해 주며, 다른 누구에게도 전해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능력과 판단에 따라 환자에게 도움이 될 치료를 해 주며, 절대로 해치거나 옳지 않은 일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떠한 사람이 독약을 처방해 달라고 하더라도 절대 조제해 주지 않을 것이며, 그런 방법을 제안하지도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여자에게 낙태를 유발하는 피임제를 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생활과 의술을 순수하고 경건하게 유지할 것이다. 나는 진실로 결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칼을 사용하지 않고서, 그 분야에 솜씨 있는 사람들에게 맡길 것이다. 나는 어떤 집에 들어가든지 환자를 도우려고 들어가는 것이니, 모든 고의적인 악행이나 음해를 금할 것이며, 특히 자의거나 강제적이거나 여자나 남자의 신체를 모욕하는 일을 삼갈 것이다. 그리고 의료 행위 과정에서 듣거나 본 것, 심지어 내 직무를 떠나서 다른 사람과 교제할 때, 만약 외부로 퍼져나가서는 안 되는 일이라면, 나는 그런 일을 신성한 비밀로 지키고 절대로 누설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 선서를 실천하고 어기지 않게 되면 내 생활과 내 의술로써 모든 남자들 가운데 명예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선서를 함부로 어기거나 거짓으로 맹세를 하게 되면 오욕이 내게 떨어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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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본격적인 히포크라테스 평전
정신없이 변화해 가는 세상에서 날로 인기가 치솟는 오래된 직업, 의사. 그러면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의사는 누구일까? 사람들은 거의 당연하게 히포크라테스를 떠올릴 것이다. 그만큼 히포크라테스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유명한 철학자들 못지않게 우리 귀에 친숙한 인물인 히포크라테스! 그러나 우리는 기껏 그의 이름과 그가 남겼다는 <선서>의 존재 말고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 그가 정확히 어느 나라 사람인지, 어느 시기의 인물인지, <선서> 말고 또 어떤 저술이 있는지, 그가 그토록 유명한 이유는 과연 무엇인지, 정말로 그를 ‘의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을 만한지, 히포크라테스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값진 자산은 무엇인지…… 의학사를 전공한 전문의가 아니라면 히포크라테스와 관련한 이러한 기초적인 정보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사실 드물 것이다. 아직까지 국내에는 히포크라테스를 대중적으로는 물론이고 학문적으로도 널리 알릴 만한 책이 소개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얼마 전에 화려하게 막을 내린 아테네 올림픽 덕분에 다시 한 번 전 세계적으로 그리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이때, 히포크라테스와 그의 저술을 총체적으로 생생하게 되살린 평전이 나와 의사와 의대생들은 물론이고 수준 높은 교양서를 기다려 온 고급 독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히포크라테스의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아울러 2500년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면서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음에,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라는 문구로 변형되어 시작하는 <선서>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도 없으리라. 그러나 흔히들 생각하듯 당시의 의사들이 모두 의사의 기본 윤리를 집약한 이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서약한 것은 아니었다. 히포크라테스 가문, 즉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예가 아닌 다른 가문 사람이 이 가문에 의술을 배우러 들어올 경우에 한해 선서에 서약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히포크라테스는 소아시아 바닷가에 있는 작은 섬 코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의술을 익힌 뒤 고향을 떠나 한평생 그리스 반도와 소아시아를 여행하면서 의술을 실천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프로타고라스>와 <파이드로스>에서 히포크라테스가 인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간주하고 철학적으로 의학에 접근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질병이란 신이 내리는 벌’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히포크라테스는 이러한 미신을 배격하고 관찰과 경험을 중시했다. 그는 특히 질병은 부적절한 식사로 인해 소화되지 않은 잔류물 때문에 생긴다고 밝혔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언이었다. 한편 소크라테스는 히포크라테스라는 의사 한 사람의 사상과 생각에 대해 논하면서, 의학(인체의 과학)을 철학(정신의 과학)의 본보기로 삼았으며, 그의 제자이자 의사의 아들이기도 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사람들은 히포크라테스를 한 인간이라기보다는 의사로서, 몸집이 훨씬 큰 다른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고 단정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철학자는 의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히포크라테스의 저서는 약 70권이지만 남아 전하는 것은 60권 정도이며, ‘히포크라테스 총서’는 해부학·임상·수술 등을 다룬 전집으로서 기원전 3세기 무렵,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들이 그의 학설을 집대성하여 정리한 것이다. 그의 학설과 주장을 집대성한 ‘히포크라테스 총서’ 속에는 문체나 사고방식이 히포크라테스의 것으로 보기 힘든 저술도 꽤 섞여 있어서 어느 것이 그가 직접 저술한 ‘진짜 히포크라테스 저술’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이 책에서는 이렇듯 방대한 저술들과 히포크라테스와 관련된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들, 그리고 학계의 다양한 의견들을 저자의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을 빌어 매우 구체적이고 총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의학적 배경과 히포크라테스 고대사회라고는 해도 그리스는 이웃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와는 상황이 달랐다. 고대 그리스인은 신앙도 깊었지만, 그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합리적인 자연관과 인간관을 길렀다. 그것은 그리스의 배후지(背後地)가 대부분 바위투성이의 산지이므로 강대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주로 교역에 의해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보다 융통성 있는 합리성과 경험적 지식의 존중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경향은 의술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그리스에서는 의술도 다채로운 형태와 학설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그리스 의학을 대표하는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히포크라테스이다. 그는 그리스인 사이에서 널리 신봉되고 있던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와 연관된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의료행위를 펼친 의술 집단 아스클레피오스학파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고향 코스 섬에서 의술을 익힌 히포크라테스는 지중해 연안을 두루 여행하면서 기술 습득과 관찰, 경험을 거듭한 결과 살아 있을 때 이미 명의로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나아가 죽은 뒤에는 그 명성이 더욱 높아져 의술이 비판받는 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히포크라테스로 돌아가자’라고 할 정도의 모범적 존재가 되었다. 히포크라테스가 역사 발전에 끼친 영향과 현재적 의미 예수보다 5세기 앞서 태어난 히포크라테스는 오랫동안 ‘의술의 아버지’로서 존경받았다. 그는 신화적인 생애와 방대한 분량의 저술로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인정받게 되어, 몰리에르에 따르면 ‘그의 권위는 복음서에 견줄 만한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아무도 히포크라테스의 말이 신의 계시에 못지않다는 사실을 반박할 수 없었다. 히포크라테스의 다양하고 방대한 저술과 그에 대한 갖가지 해석은 지난 2천5백 년 동안의 의술 발전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기에 그는 오랜 세월이 흐른 현대에 와서도 과학사의 큰 줄기를 이루는 생생한 인물로 대접받는다. 어원학자, 역사가, 철학가, 그리고 다른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기울인 노력에 힘입어 마침내 그는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진정한 자리를 찾게 되었다. 히포크라테스의 생애와 저술은 페리클레스 시대의 생활과 문학, 사상에 대해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수많은 증거를 보여 준다. 이 같은 증거는 역사가 투키디데스, 극작가 에우리피데스, 그리고 철학자 플라톤이 보여 주는 증거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 시대의 역사, 연극, 철학 분야에서 각각 가장 두드러진 인물들인데, 히포크라테스는 자신의 저술에 이 셋을 모두 끌어들여 자신의 의도대로 치환하고 원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히포크라테스의 사상으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부분을 크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시 널리 퍼져 있던 미신, 즉 질병은 신이 내린 벌인 동시에 신의 힘으로 낫기도 한다는 생각을 과감히 배척하고 자연 환경이야말로 건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확고히 한 점. 둘째, 특정 가문에 의해 독점적으로 전승되어 오던 의술을 외부에도 개방하여 널리 보급시킨 점. 셋째, 인간 존중 정신과 합리주의적 사고방식. 넷째, 임상의학을 창시하여 이후 의술의 발전에 크나큰 공헌을 한 점. 다섯째, 세밀한 관찰과 기록을 중시하여 의술에 과학의 토대를 마련한 점. 여섯째, 신체 기능의 상태를 전체로서 파악하는 사고방식(전체론). 더 구체적으로는 전신에 흐르는 기본적인 네 가지 체액, 즉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의 과부족으로 설명하는 체액론. 일곱째, 위생법의 중시. 여덟째, 인체는 우주의 축소판으로서 자연 치유력을 존중하고 치료는 그 힘을 보조하는 일이라는 사고방식 등이다. 히포크라테스라는 인물은 과거와 달리 이제는 모호한 존재가 아니다. 서지학과 금석학적 연구가 히포크라테스의 생애와 저술에 신선한 통찰력을 계속 불어넣고 있기 때문에, ‘의학의 아버지’는 이제 서서히 위인전의 책갈피에서 벗어나 살아 있는 인간 역사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인간 존중 사상을 강조하고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의 초석을 놓은 그의 위대한 정신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흐른다 해도 결코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