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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Chapter 5. #Chapter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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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성. 왕국 키르케의 지도에서는 찾을 수 없는 헤르신트의 사성. 제 소꿉친구이자 은애하는 아이를 데리고 나가기 위해 돌아온 사내는 넋을 놓고 뒤늦은 두 방문자를 응시했다.
얼굴엔 새하얀 가면을 덮어쓴 푸른 은발의 사내가 단연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는 여유작작한 움직임에는 전혀 다급함이 없었으나, 한 발 한 발 내딛음에 섣불리 다가설 수 없는 위압적인 것이 스며 있었다. 얼굴의 윗면을 가린 하얀 그 안의 얼굴이나 표정이 어떨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보이는 것은 검붉은 눈동자와 비껴 드러난 입술.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여자. 표정일랑 지을 줄 모르는 인형처럼 싸늘하게 낯선 이들을 돌아보는 그 시선은 굽어보는 듯한 경시다. “세……르티아 씨? 가, 각하!” 가장 먼저 그들을 알아보고 반응한 것은 시엔이었다. 온몸은 먼지투성이, 피투성이의 지저분한 꼴의 작은 고용인은 본능적으로 달려가 믹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이미 렉타인과 믹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고 사내라기엔 왜소한 체구의 고용인의 몸은 표준의 남성을 가리기엔 충분치 않았다. 반쯤 어정쩡하게 일어나 시엔에게 다가가려 했던 믹은 자신이 들은 단어에 혼선을 빚었다. ‘각하?’ 지금 각하라고 했나? 무슨 소릴 하냐며 물으려던 찰나, 데이안이 느리게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을 등지고 믹을 막아선 시엔을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짜증나는 녀석들. 또 왔나?” 유령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사내의 음성은 신경질적이다. 믹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제 친구의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시엔?”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정신도 없었거니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르는 데만 한참이었기에 낭패감 감추지 못한 얼굴로 믹을 향해 힐끗 시선을 주었을 뿐이다. 세르티아와 그리파란 제후 공작. 그들이 방문하기까지엔 시일이 조금 더 걸릴 거라 생각했다. 또한 마지막 떠날 적 세르티아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 그의 등장은 분명 예상 밖이었다. 게다가 저렇게 예고도 없이. 평소라면야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귀신이 솟아난 마냥 갑자기 믹이 나타나 있었고 데이안을 죽이려는 렉타인까지 한 자리에 있었다. 저들이 ‘누구냐.’ 물으면 뭐라 대답해야 하나 혼란스러운 마음에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으니 세르티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놀러 온 건 아니지요. 저나 체리나 용건이 있습니다. 헌데 이게 지금 무슨 일입니까? 엘테어의 광인이 성을 돌아다니다니.” 세르티아는 이미 렉타인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체리아나는 ‘엘테어’라는 이름에 조금 놀란 듯 렉타인을 바라보았다. “저자가 그 말로만 듣던 엘테어의 사냥개라고?” 체리아나의 주홍빛 눈동자에 노골적인 불쾌감이 감돌았다. 렉타인은 세르티아를 향해 감추지 않은 적의를 보이며 검을 꺼내어 들었다. “아, 아저씨. 그러지 마세요! 저, 저분은 그리파란의 각하…….” 시엔이 놀라 소리쳤지만 렉타인은 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세르티아는 자이세파의 사람이니 키르케 왕국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와 함께 선 저 여자는 그리파란이다. 키르케 왕국의 제후 공작 중 한 사람의 앞에서 검을 꺼내어 든다는 것은 그 자리에서 참수당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 그리파란 제후 공작 각하……?” 믹이 옹알이 하듯 부정확한 발음으로 시엔의 말을 따라 읊었다. 아직도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기에 자신이 아직도 꿈을 꾸나 했다. 각하? 그리파란? 생각할 필요도 없는 뻔한 이야기였다. 키르케의 공작 가문 중 하나인 그리파란 공작가. 게다가 지금 그리파란의 작위를 승계받은 현 공작은 여자라는 것 또한 모르는 이가 없으니 저 여자가 그리파란 제후 공작이라는 말이다. 그걸 깨달은 순간 믹이 황급히 고갤 푹 숙였다. 체리아나의 주홍빛 눈동자에 싸늘한 진노가 서렸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인지 설명하겠나, 알로이드?” 체리아나 루르스 그리파란. 그녀의 싸늘한 시선이 시엔을 향해 박혔다. 그녀와 얼굴을 마주한 기간도 짧긴 했지만 그녀는 보통 평온하고, 혹은 차갑기만 했다. 마지막 그녀가 이 성을 떠날 때 그녀는 도리어 시엔을 염려해주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나. 저리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머릴 굴려도 변명할 도리가 없었다. 렉타인이야 데이안을 쫓아 이 성까지 찾아왔다지만 믹은 명백히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 그것도 자신을 쫓아온 녀석이다. 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음에도 그 괴로움마저 일순간 날아갈 만큼 놀란 시엔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공작 각하, 이건…… 사정이…….” “저자가 엘테어의 엘테어의 사냥꾼이라면, 저쪽의 사내는 누구냐.” 믹은 자신을 향해 쏘아 박히는 주홍빛 눈동자를 느끼며 숨을 들이켰다. 전부 다 사실이었던 것이다. 시엔이 죽어라 입을 다물고 자신에게 “네가 위험해져.”라고 했던 것은 시엔이 유령에 홀렸기 때문이라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라 저런 대귀족이 뒤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믹은 온몸이 저릿한 긴장감에 입술이 바짝 타는 것을 느꼈다. 생전 처음 보는 왕국의 수뇌에 가까운 귀족. 자신 같은 시골의 낮은 귀족이 아니라 유서 깊고 왕족에 필적하는 권세를 가진 진짜 귀족을 공식석상에서 멀찍이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이리 코앞에서 보게 되다니. “저는…….” 말을 하려다 말고 믹은 목구멍이 턱 막히는 질식감에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에 제 벗의 좁다란 어깨가 비쳤다. ‘망했다. 망했어.’ 시엔은 끊어지는 믹의 음성을 들으며 덜덜 떨리는 몸을 애써 가라앉혔다. 그들이 자신에게 요구했던 유일한 것이 비밀 유지였다. 그것은 데이안의 상황을 고려해보자면 당연한 것이었고, 지금 그 약속을 어긴 것은 자신이었다. 어떤 변명으로도 쉽사리 넘어갈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은 지금 저들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묘한 눈빛으로 성안을 쭉 둘러보던 세르티아는 시엔에게서 시선을 거둔 후 계단의 난간에 기대어 선 피투성이의 데이안을 언짢다는 듯 올려다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데이안 님? 지루해서 엘테어의 사냥개와 담소라도 나누려는 것은 아닌 듯 보이는데.” 내내 입술을 다부지게 다물고 있던 렉타인이 그의 말을 받았다. “네가 천년 백작. 매번 다른 이름으로 인간들을 조롱한다는 그 괴물이 맞나.” “초면에 괴물이라고 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모로?” 세르티아의 허탈한 웃음이 침묵에 빠진 성을 울렸다. 파랗게 질린 시엔은 그저 그들의 서로를 할퀴는 음성을 들으며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 “알로이드, 제대로 나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네 목이 달아나게 될 거다.” 체리아나는 여전히 엎드린 시엔의 뒤통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 말에 놀란 믹이 벌떡 일어났다.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저, 저……는!” “너는?” 체리아나는 어떻게 설명해도 먹히지 않을 듯 완고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믹은 숨통 막히는 위압감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하기야 그도 그럴 것이 그녀로서는 지금 이 상황이 매우 언짢았다. 엘테어의 사냥개가 끝내 이 성을 찾아왔다는 것은 데이안에 대한 정보가 새어나가고 있다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는 말인데다가 듣도 보도 못한 웬 청년마저 성에 머물고 있었다. 가뜩이나 자이세파와의 일로 예민한 찰나. 최악의 경우엔 입을 막기 위해 모두 참수할 각오까지 다지고 있었다. “애쉬튼의…….” “뜸 들이지 마라.” 체리아나의 냉랭한 진노에 시엔이 어깨를 떨었다.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온몸의 피가 모조리 빨려나가는 기분이었다. 오죽이나 차가웠는지 믹은 그녀의 한기에 제 입술마저 얼어붙은 줄 알았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픽, 하는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마 제대로 미친 것 같은 세르티아를 제외하고는 이 순간 웃을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으리라. 모두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비웃는 듯한 그 소성을 따라 움직였다. 난간에 기대어 있던 데이안이 어느새 계단을 내려와 싸늘하게 체리아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누가, 누구의 앞에서, 허락 없이 목을 친다는 거지?” 체리아나를 향한 적의는 선연했다. 데이안이 팔짱을 낀 채 조소했다. “꺼져라, 그리파란. 계집을 내 성에 들도록 허락하지 않겠다 했던 것을 잊었나.” 시엔이 움찔함과 동시에 믹이 그도 모르게 시엔을 돌아보았다. 렉타인 또한 무의식적으로 시엔을 향해 고갤 돌렸으나 그것을 알아챈 것은 세르티아뿐이었다. 세르티아가 웃으며 체리아나의 앞으로 나섰다. “데이안 님. 언짢게 한 것은 미안하지만 이 상황이 썩 좋은 상황은 아니라는 것 잘 아시지요. 지금 꼴은 그게 뭡니까. 체통 없이.” “입 다물어라, 이아너그.” 체리아나가 숨을 고르며 믹에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예의를 갖추듯 살짝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비껴 숙였다. “송구합니다, 헤스터 님. 제가 경망스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 건데.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입 발린 소리 처하는 꼴하고는.” 믹이 저도 모르게 떡 입을 벌리고 데이안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성격이 딱히 사근사근하지 않고 무뚝뚝하다는 것이야 지난번 방문 때 알았지만 상대가 그리파란이라면 말이 다르다. 미친 것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키르케 내에서 제후 공작들에게 저리 하대할 수 있는 것은 왕족들뿐일 터다. 믹의 머릿속에 돌연 일련의 기억이 스쳤다. ‘데이안 헤인 헤스터. 헤르신트의 마지막 왕자’. 온몸이 얼어붙는 소름에 숨이 막혀왔다. 당황한 믹의 시선이 제 옆얼굴을 간질이는 것이 언짢은 듯 데이안이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믹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헤스터 님.” “됐어, 체리. 여전히 예민하기 짝이 없으시니 내가 이야기하지.” “……이안.” 체리아나가 조심스레 물러났다. 세르티아가 먼저 렉타인을 향해 턱짓했다. “그쪽, 엘테어 씨. 저와 죽을 각오로 칼부림을 하려는 게 아니라면 검을 거두시지요. 지금 전 당신에겐 하등 관심이 없으니까요.” 가면에 가려진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드러난 입꼬리가 조롱하듯 말려 올라간 것이 언뜻 비칠 뿐이다. 하지만 석상처럼 꿈쩍도 않는 렉타인은 도무지가 그 검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고 결국 시엔이 바들거리며 일어나 그의 팔을 끌어 내렸다. “아저씨. 그러지 마요.” 어떻게든 일이 더 커지는 것만은 막아야 했기에 시엔의 음성은 간절했다. 결국 마지못해 검을 내려뜨린 렉타인이 차가운 얼굴로 세르티아와 데이안을 번갈아 노려보다가 밖으로 나가버렸다. 커다란 흉기를 가진 사내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코웃음 치며 바라보던 세르티아가 말을 이었다. “코가 좋은 건지, 아니면 조력자가 있는 건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요. 엘테어의 사냥개는 오랜만에 보는군요.” 싸늘하게 말끝이 내려앉았다. 시엔은 마치 제 목이 칼이라도 들이밀어진 듯한 서늘함이 차올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렉타인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한 체리아나가 다시금 말을 꺼냈다. “헤스터 님, 입으신 상처는 저 엘테어 때문이신가요?” 노파심 가득한, 우려 섞인 음성이었음에도 데이안은 조롱이라도 당한 사람마냥 그녀를 쏘아보았다. 도무지가 입을 다물고 살벌하게 쏘아보는 통에 체리아나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보다 못한 세르티아가 느릿한 음성으로 그녀를 옹호했다. “체리에게 화낼 상황이 아니란 건 아시면서 어린애처럼 그러십니까. 엘테어의 사냥꾼이 여기까지 쫓아왔다는 건 필경 누군가가 이 성의 소재를 알아챘다는 것인데, 기밀이 더 이상 기밀이 되지 못한다면 당신은 이곳에 머물지 못할 테고, 그것은 당신 본인도 원하지 않는 바 아닙니까?” “그래. 내 머릿속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모양이지?” “나참, 이리 ‘가솔’들을 끼고 있기에 좀 나아졌나 했더니만, 여전히 냉정하시군요.” 왠지 점점 격해지는 것 같은 데이안과 세르티아 사이의 기류를 느낀 시엔이 다시 바짝 엎드렸다. 눈앞이 핑글핑글 돌고 가슴이 답답하고 쿵쾅거려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금방이라도 까무러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저, 세, 세르티아 씨. 이건…… 저 친구는…… 세르티아 씨, 그게…….” “예, 시엔 씨. 듣고 있습니다.” 빙그레 웃는 입꼬리, 그의 하얀 가면이 시엔을 향했다. 엎드린 채 그 안의 검붉은 눈동자와 마주한 시엔은 절로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찬 바닥을 디딘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본능이 울리는 적신호에 이가 딱딱 부딪쳤다. 체리아나가 목이 달아날 거라고 말했다. 믹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길을 잃어 성을 찾아왔다 따위의 변명 따윈 그녀에게 납득되지 않을 문제였다. 도리어 성의 위치를 들켜버렸으니 입막음으로 죽이려 들지도 몰랐다. 그녀에게 자신이 아는 친구이며 믿어도 좋다고 말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비밀 유지에 관한 항목을 어긴 것이 되어버리니까. 어떤 변명을 하려고 해도 결과는 하나로 귀결되기에 말문이 막혀버린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믹이 정신을 차린 모양인지 먼저 몸을 일으켜 체리아나와 세르티아를 향해 공손하게 허릴 숙이며 인사했다. 아닌 듯 보여도 그는 귀족이었고 귀족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지 않는 애쉬하르트의 후계자였다. “저, 저는 저 아래 작은 영지 애쉬튼을 통치하고 계신 체빈 카르틴 애쉬하르트 자작의 독남으로, 믹 자이드 애쉬하르트라고 합니다. 각……하. 그리고…….” “세르티아라고 부르면 됩니다. 소자작이셨군요?” “이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넉살 좋게 믹의 말을 받아주는 세르티아를 향해 체리아나가 앙칼진 핀잔을 놓았다. 그에 세르티아가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이야기를 들어본 뒤에 처리해도 되지 않겠어?” 웃고는 있으나, 세르티아 또한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최후의 희망마저도 사라진 이 암담한 상황에 시엔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침묵으로 서서 여전히 체리아나와 세르티아를 노려보고 있는 데이안의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고 그가 나서주어 도와주길 바랄 수도 없었다. 그는 애당초 자신을 내쫓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이고 이 기회에 자신이 성 밖으로 쫓겨난다면. 오히려 귀찮은 것들이 떨어져 나갔다며 좋아할지도 몰랐다. 그런 서글픈 불안을 느낀 것일까. 데이안의 파란 눈동자가 잠시 시엔을 향했다. 엉망인 꼴로 잔뜩 겁먹어 그를 올려다보는 초록 봄의 눈동자가 사시나무처럼 떠는 그 모습이 그의 눈동자에 맺혔다가 사라졌다. “그래서 믹 씨. 믹 씨라고 부르지요. 왜 여기에 와 계신 겁니까? 그러고 보니, 애쉬튼이면 시엔 씨의 고향……은 아니지만 뭐, 그 비슷한 곳 아닌가요.” 아일로이드를 알고 있는 자의 노골적인 비웃음이었다. 내막을 모르는 믹 또한 느낄 수 있을 만큼 선연했다. “맞습니다. 애쉬튼은…….” 똬리를 튼 뱀에게 제 몸을 칭칭 감긴 기분에 돌연 숨이 막혀 시엔이 풀썩 무릎을 꺾었다. 자존심은 없었다. 믹까지 말려들게 된 마당이다. 그들에게 동정을 구걸해서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리할 요량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처신을 잘못했습니다. 나쁜 의도로 그런 것이 아니니 부디 선처를…….” “선처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시엔 씨. 체리와 저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죽어요.” 어쩜 저리 웃으면서 사람을 겁박하는 것에 위화감이 없을까. 시엔이 몸을 떨었다. “그게…… 저와 믹은 주인님께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 “그만.” 누군가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싸늘하기 짝이 없는 그 명령에 시엔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조금은 거칠고, 조금은 나직한 명령. “……네?” “일어나.” 데이안이었다. “……?” 데이안은 여전히 세르티아를 노려보고 있었기에 시엔은 그가 누구를 향해 명령한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멍청하니 있으니 그가 다시 한 번 싸늘하게 명령했다. “일어나라는 말 안 들리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칼날처럼 시린 음성에 시엔은 위축된 어깨를 감싸며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그 단순한 동작을 행하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휘청거렸다. 호오? 세르티아가 흥미롭다는 듯 데이안을 돌아보았다. “저 고용인, 귀찮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더러 데리고 꺼지라고 고래고래 소릴 지르시더니.” “저 가증스런 계집과 네 앞에서 엎드린 모습이 더 꼴사납군.” “그것뿐입니까?” “그러면 또 무슨 이유가 있길 바라나.” 멀리서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던 체리아나의 표정 또한 묘하게 변했다. 그가 지금 하는 행동이 그들의 예상을 벗어난 탓이다. 여태까지 이 성에 머물던 고용인들은 대부분 그들의 손에 죽어나갔고, 데이안은 그것을 알면서도 묵인했다. 도리어 “그깟 놈들.” 하며 코웃음을 칠 정도였지 않나. 그런데 지금 그의 행동은 명백히 시엔을 감싸는 행위처럼 비친다. 체리아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헤스터 님. 지금…….” “그리파란. 네 머리채를 잡고 내 성에서 끌어내기 전에 입 다물고 빠져.” 그 진심 어린 살기에 체리아나가 항변조차 못하고 물러났다. 믹 또한 멍한 표정으로 데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리파란의 제후 공작이 꼼짝도 못하는 저 사내의 정체가 정말 헤르신트의 마지막 왕자라는 것에 대한 심증이 굳어지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이 분명한 이 상황. 저자의 정체가 유령이 아니라면? 좀 전의 검잡이의 말처럼 정말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이라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시엔이 잔뜩 기죽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주인……님, 저…….” “데이안 님. 체리에게야 그리 대한다고 하더라도, 저는 어찌 막으실 겁니까? 저자의 신병에 대해 납득하지 못한다면 위험분자로 간주. 이 성에서야 손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밖을 나가는 순간 그 목을 쳐버린다면 손쓸 도리가 없을 텐데요.” 시엔의 말허리를 무자비하게 자르는 것은 세르티아다. 그는 마치 데이안과 단둘만이 존재하는 공간에 선 사람처럼 데이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에 데이안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이아너그. 그래.” 늘 생각했지만 그리파란을 대하는 태도와 세르티아를 대하는 태도는 분명 흡사한 증오이나 다르다. 데이안은 끓어오르는 노기를 억누르는 듯한 음성으로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내 성에 멋대로 사람을 밀어 넣을 때는 내 의사 따윈 필요 없다……더니, 그 반대의 경우도 같다?” “그리 말하시면 서운하지요. 전부 당신의 평온과 안위를 위함인데.” “퍽이나 그렇겠군.” 데이안이 흘깃 시엔을 곁눈질 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창백한 얼굴을 한 시엔은 거의 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기야 평소 아무리 당차고 겁대가리 없는 모습을 보인다고 한들 높고 높은 이가 저와 제 친우의 목을 쳐버린다 따위를 서슴없이 내뱉고 있는 와중이다. 목숨을 담보로 협박하는 이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절망적이기도 할 것이다. “지금껏 당신의 평안한 삶을 위해 진창 손에 피를 묻힌 그리파란의 마음도 헤아려주시지요.” 시엔이 흠칫 떨었다. 데이안의 비밀 유지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그것 또한 내 알 바 아니지, 이아너그. 믿을 수 없는 속 시커먼 계집 따위를 지나치게 감싸는군. 정분이라도 난 모양이지.” ‘계집 따위를’이라는 말과 동시에 세르티아의 가면에 반쯤 가려진 검붉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가 반쯤 엎드린 시엔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계집 따위를……인가요.” 중얼거렸다. 그 혼잣말이 귓바퀴에 감겨드는 것을 느끼며 시엔은 숨을 멈추었다. “뭐, 믿을 만한 구석이 있으니 제가 이러는 게 아니겠습니까. 헌데 지금 그리파란의 신뢰도를 논하는 것보다 다른 게 우선인 듯싶습니다만.” 하얀 가면 안의 눈동자가 소리 없이 움직여 믹에게로 향했다. 데이안의 피로한 얼굴에 감추지 못한 짜증이 배어들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설명을 해주시지요?” 시엔이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대로 말하고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떤 거짓말로도 저자를 속여 넘길 수는 없을 것이라는 근본 모를 확신이었다. 막 마른 입술을 벌리며 참았던 숨을 토해내는데, 데이안의 말이 더 빨랐다. “저 녀석은…….” 시엔과 믹을 번갈아 바라보던 세르티아는 참을성 있게 데이안의 말을 기다렸다. 잠시 피곤함에 제 입술을 매만지던 데이안은 반쯤 혼이 빠진 믹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내 성의 요리사다. 위험한 놈은 아니니 신경 꺼.” ‘뭐?’ 믹마저 입을 떡 벌렸다. 시엔 또한 그 말에 벙찐 얼굴로 데이안을 응시했다. 성을 떠났던 그를 다시 본 것은 그도 지금이 처음일 텐데 갑자기 요리사라니. 그에게 위험이란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고,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일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는 믹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듣는 귀가 놀라건 말건 데이안은 아랑곳 않으며 팔짱을 꼈다. “요리……사요?” 체리아나마저도 너무 놀란 나머지 움찔할 정도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기에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그 침묵을 깬 것은 역시나 세르티아였다. “지금, 당신이…….” 그의 숨이 뚝뚝 끊겼다. “섭식을, 하신다고, 말하신, 겁니까?” 무언가를 참는 듯 끊어 말하던 그는 시큰둥한 표정의 데이안을 빤히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뭐라고요? 당신이 지금 음식을 먹는다고? 인간처럼?” 누구도 소리 내지 못하는 그 답답한 공기 속, 인상을 찌푸리던 그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세상에 더 없는 즐거운 농담이라도 들은 사람마냥 웃기 시작했다. 체리아나는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믹을 내려다보았고, 믹은 멍청한 얼굴로 데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얽히는 시선 속에서 시엔은 신음할 뿐이었다. “아…….” “이제 됐나?” 데이안이 귀찮음 역력한 어조로 덧붙였다. 시엔은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데이안의 너른 등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그가 지금 나서서 믹을 보호해준 것이다. 고마움보다도 당황스러움이 먼저 밀려왔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렇게 내 요리가 못 참을 정도였나?’ 하는 상황에 맞지 않는 생각마저 떠올릴 정도였다. 데이안의 널찍한 등, 자신이 업혔던 그 등의, 그 따뜻하던 심장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세르티아의 웃음이 막 멎어들어감에 그가 마지막으로 이 사태의 종지부를 찍었다. “설명이 끝났으니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마라.” “아아아, 이거 참. 사실이라면 납득하고말고요. 그런데 섭식을 한다?” “헤스터 님께서…….” 데이안의 시선이 잠시 체리아나에게로 향했다. 시퍼런 그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체리아나는 언제나 그랬듯 살포시 미소 지으며 고갤 숙였다. 하지만 그 얼굴은 이미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수십 년, 아니 어쩌면 그보다 오랜 세월 스스로 무언가를 입에 대길 거부한 그가 제 입으로 ‘자신의 요리사’라고 말했다는 것이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도무지가 당황스러워 입도 벙긋 하기가 어려운데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세르티아는 여전히 간헐적인 웃음을 터뜨린다. 데이안은 곧 빈정 상한 표정으로 계단을 올랐다. “뭘 먹는다고? 당신이?” 멀어지는 그의 등 뒤로 또다시 대소하는 그의 웃음이 따라붙었으나 데이안은 더 이상 상종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멀어졌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발소리만 남자 피식거리던 세르티아는 제 얼굴에 손을 뻗어 가면을 벗었다. 드러나는 조각 같은 콧날, 희멀건 피부, 그리고 검붉은 눈동자가 사라진 그의 등을 좇았다. “엘테어를 집 지키는 번견인 양 두고, 정체 모를 고용인을 감싸는데다가, 작은 영지의 귀족 후계를 요리사로 부리고 있다니.” 나른한 세르티아의 중얼거림. 체리아나는 이 상황에 말을 잊고 타성적으로 울리는 데이안의 발소리를 들었다. 믹 또한 부지 간에 ‘성의 요리사’가 되었다는 것에 말을 잊었으나 상황이 어떻게든 무마되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기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윽고 데이안의 발소리마저 사라져버릴 즈음, 시엔이 다리에 힘이 풀린 사람처럼 비틀거리다가 주저앉았다. “뭐, 그건 그렇고.”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맨바닥의 냉기가 손끝을 엔다. “시엔 씨, 인사가 늦었네요.” 돌연 세르티아가 어울리지 않게 쪼그려 앉아 시엔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늘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또 어떤 말을 할지 짐작도 되지 않아 시엔은 긴장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기대 이상이니, 만족스럽습니다.” 진정으로 즐거운 웃음을 삼킨 미성, 그의 어깨 너머로 체리아나의 음성이 언뜻 들려왔지만 시엔은 귓속을 채우는 이명을 떨쳐내기 급급했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 이내 흐려지는 시야에 고개를 꺾었다. 안도와 함께 몰려오는 피로함에 잊었던 복통마저 시작된다. ‘아, 빌어먹을.’ 결국 시엔이 바닥으로 엎어졌다. --- 본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