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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으로부터 시작된 영남우도의 사림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은 영남 지역의 유학을 대표하는 두 인물이지만 이들은 확연히 다른 학문적 경향을 보였다. 영남좌도(江左) 지역을 대표하는 퇴계는 성리학만을 고집하며 사대문화에 집착하는 태도를 보인 반면, 영남우도(江右) 지역을 대표하는 남명은 여러 학문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며 실천 중심의 학풍을 중요시하였다. 이와 같은 학문적 경향이 정치적인 면과 맞물리면서 두 학파는 서로 다른 행보를 보였는데, 퇴계학파의 문인들이 정계와 학계를 주도하며 중앙권력에 맞설 수 있는 세력 기반으로 성장한 반면, 출사出仕보다는 현실 개혁에 관심을 둔 남명학파의 문인들은 정치적으로 소외되어 갔다. 이런 이유로 남명학파는 조선시대 역사 연구에 있어 퇴계학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는데, 이는 일반적인 역사 연구가 집권세력들의 정치적 동향이나 학술 위주로 이루어져 왔던 풍토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역사의 시야에서 소외되었던 영남우도 지역(좌도와 우도의 중간지대인 강안江岸지역까지 포함)의 사림들을 조망한 이 책 『남명학파와 영남우도의 사림』은 그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영남우도 사림에 대한 새로운 시각 정립 영남우도 사림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남명 조식이며, 한때는 “그 문하에 쓸 만한 인물이 많다”(多有可任事之人)고 할 정도로 이 지역에서 배출된 인물의 위상과 그 영향력은 퇴계학파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았다. 청도의 김대유金大有와 박하담朴河淡, 합천의 이희안李希顔, 성주의 김희삼金希參, 밀양의 신계성申季誠, 단성의 이원李源, 거창의 임훈林薰, 영산의 배학裵鶴과 신륜辛崙, 고령의 박연朴淵 등이 그러한데, 이러한 인물들이 배출되던 시기가 바로 영남우도 사림의 전성기였다. 이러한 영남우도 사림이 점차 위세를 잃어간 것은, 영남좌도 지역이 조선조 정치사의 변동에 직접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던 것에 비해 영남우도 지역은 중앙정부와 심각한 정치적 충돌을 일으키는 등 매우 역동적인 면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이는 강렬한 현실 개혁의 의지를 드러낸 남명의 사상과 무관하지 않은데, 영남우도의 사림들은 임진왜란 때에 관군과 중앙정부의 부실한 대응을 믿지 못해 ‘의병봉기’를 주도하였고 이후로도 ‘광해군 복립모의’, ‘무신사변’, ‘진주민란’, ‘단성민란’ 등 여러 정치적 사건에 깊이 관련하였다. 이로 인해 이 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와 집권세력의 지속적 탄압 및 폄훼가 이루어졌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 지역 사림들의 강력한 연대는 해체되고 향촌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 책을 통해 집권세력에 대해 비판의식을 갖고 권력을 내세운 비리에 대해 강력히 저항했던 영남우도 사림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특히 출발선상의 위세는 영남좌도에 뒤지지 않았지만 중앙정권과의 갈등과 충돌 속에서 점차 위세를 잃어갔음을 알 수 있다. 영남우도 사림들의 역동적인 학문사상과 정치활동을 재확인함으로써 우리는 이 지역의 지방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을 뿐 아니라 더불어 조선 정치사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