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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1955. 4. ~ 1959. 12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의 생애와 사상 13 머리말 39 1955년 43 1956년 87 1957년 299 1958년 460 1959년 508 제2권 1960. 1. ~ 1969. 12 1960년 7 1961년 252 1962년 386 1963년 477 1964년 580 1965년 655 1966년 719 1967년 757 1968년 801 1969년 888 제3권 1970. 1 ~ 1974. 10 1970년 7 1971년 74 1972년 177 1973년 339 1974년 436 |
柳永模, 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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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 사상을 대표하는 다석 사상의 원류가 담겨 있어
앞서 말했듯이, “다석일지”(多夕日誌)는 류영모가 남긴 유일한 저서이다. 류영모는 1955년 4월 26일에 365일 뒤에 자신이 죽는다고(즉 1956년 4월 46일) YMCA 연경반 모임에서 선언했다. 건강에 큰 이상이 없었던 그가 65세의 나이에 사망 가정일을 선언한 것은 죽음에 대한 예행 연습이자 자신이 성숙했음을 완성했다는 하나의 선언과도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사실 류영모의 사망 가정일의 선언에는 자신보다 11세 어린 김교신(金敎臣)을 추모하는 뜻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김교신은 무교회주의 신앙 운동과 “성서조선”을 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해오던 차에 1945년 4월 25일 급서하고 말았는데, 그의 부음 소식을 들은 4월 26일을 류영모는 자신의 사망 가정일로 김교신을 추모하면서 잡은 것이다. 이때부터 류영모는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기록했다. 형식은 일기였지만, 자신의 신앙고백에 바탕을 둔 일종의 종교시라 할 수 있다. 특히 류영모는 서양 종교인 기독교 사상을 동양의 유, 불, 선과 하나로 묶어 사유했기에 그 독특함에서 차원을 달리할 뿐만 아니라 내면의 소리를 녹여내 글로 표현한 다채로운 시조 형식으로 한국 근현대 초기의 대표적 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1928년부터 무려 35년 동안 서울 YMCA 연경반에서 성경과 동양고전을 강의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류영모는 우리말 철학의 선구자로도 불리는데, 소리글자인 한글에서 뜻을 찾고 잊혀진 순우리말을 되살리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자연스레 그의 우리말 철학에 대한 관심과 집중은 그가 남긴 “다석일지”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그 해독이 무척 어려워 지금껏 몇 차례 시도가 있었지만 다석 사상을 제대로 밝혀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남긴 일기 속의 글자들을 보면 기존 한글의 스물여덟자 이외에 자신이 직접 만든 글자를 수없이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와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는 다석의 영성시(靈性詩) 이번 책의 주해자인 가톨릭 사제 정양모 신부에게 다석 류영모는 ‘시인’의 존재로 각인되어 있다. 강의할 때도 시를 줄줄 읊었고 친필로 남아 있는 글들 대부분도 시조와 한시류이다. 그래서일까? 이번 주해 작업을 마치고 ‘머리말’에서 그는 류영모를 13세기 페르시아의 위대한 시인 잘랄 에딘 루미(Djalal Eddin Rumi, 1207~1273)와 20세기 인도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평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