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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비단에 싸인 밤
스물세 개의 계단으로 오는 가을 나의 하이네켄 스토리 신 삼국유사 가락국기 우린 때로 사랑에 빠지기도 했었지 윤희하원 갑오징어의 사랑 잃어버린 우산을 추억함 쥐와 장미 이태리 다방 내 마음의 헛간 매기의 추억 |
YOON DEA NYUNG,尹大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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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가든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는 작가의 분신 격에 해당하는 인물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감추려고 해도 곧잘 실패하고 만다. 가령 재채기나 가난처럼 말이다. 『열두 명의 연인과 그 옆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옆 사람에 해당하는 ‘나’를 통해 우리는 궁금해 마지않던 작가 윤대녕을 엿볼 수 있다. 등단을 준비하는 소설가 지망생 ‘나’라든가 맥주를 좋아하고 올드 팝을 즐겨 듣는 ‘나’, 언젠가 일본에 들러서 초밥을 먹었던 ‘나’ 같은 곳에서 말이다. 어쩌면 일본에 들러서 초밥이 아니라 라멘을 먹었을 수도 있지만 뭐, 어쨌든 중요한 것은 소설보다는 더 많은 부분에 있어서 작가의 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앞서 밝혔듯 이 책이 ‘산문’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열두 편의 산문은 2002년 10월부터 2003년 9월까지 월간 《까사리빙》에 연재했던 것이다. 소설에서 못다 한 얘기들을 하고 싶었던 작가는 이미 여행산문집을 한 차례 낸 적이 있었고 자칫 긴장감이 떨어지기 쉬운 에세이보다는 이런 식의 산문에 큰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미루어 짐작컨대 윤대녕이 소설가로 살아가는 한 앞으로 계속 윤대녕의 산문집을 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란 무릇 추억을 완성하기 위해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는 윤대녕은 열두 개의 이야기를 통해 줄곧 은근하게 사랑 예찬을 하고 있다. 참을 수 없는 고독을 이기기 위해서는 결국 사랑밖에 해결책이 없다는 것은 작가의 체험적 진술처럼 여겨진다(특별한 장치 없이 독자가 작가에게, 혹은 작가가 독자에게 가깝게 다가설 수 있다는 게 바로 산문의 매력 아니겠는가!). 열두 가지 색깔의 사랑 이야기_작품 속으로 _하나, 푸른 비단에 싸인 밤 오디오 파일 동호회를 통해 만난 여자 진성(眞星)과 내가 서로 호감을 가진 채 메일을 주고받고 전화 통화를 하다가 결국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고 인연은 비껴간다. 진성이 남긴 ‘푸른 비단에 싸인 밤’이라는 이름을 가진 쿠션만이 분명한 현존으로 꿈꾸듯 내 소파 위에 놓여 있다. _둘, 스물세 개의 계단으로 오는 가을 그녀는 내가 다니던 치과병원의 간호사이다. 그녀와는 스물네 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나오는 허름한 ‘종다리 밥집’에서 된장찌개를 먹는 사이일 뿐이다. 마치 시간이 멈춰 있는 듯한 고요한 그 밥집의 방 안에서 그녀와 나는 가끔 만나서 오래된 연인처럼 밥을 먹는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곧 결혼할 남자가 있다. 서로의 사랑을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만나던 어느 날 그녀는 나에게 결혼 날짜가 잡혔음을 알린다. 그녀와는 결국 그렇게 헤어지고 십 년이 지난 어느 날 그 밥집을 찾은 나는 그 밥집을 오르는 계단이 스물네 개가 아니라 스물세 개임을 알게 된다. _셋, 나의 하이네켄 스토리 하이네켄 마니아 그녀와 나는 대학 동창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호텔 사장이고 나는 가난한 소설가 지망생일 뿐이다. 그녀는 나의 자취방에 찾아와 소고기와 쌀과 김치를 놓아두고 간 적도 있다. 하지만 졸업 후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고 한때나마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했던 나와 그녀는 이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게 된다. _넷, 신 삼국유사 가락국기 허정옥(許貞玉)은 내가 광고회사에 다닐 무렵 회사의 가슴 전속 모델이었다. 자신이 인도 왕족의 후손이라고 우기는(?) 그녀는 내게 적극적으로 구애를 해온다. 나는 싫지 않지만 그닥 내키지도 않는다. 결국 나는 그녀의 사랑을 모른 척하고 그녀는 모델 일을 그만둔다. 훗날 나는 달력 속에서 비키니 차림의 그녀와 조우한다. _다섯, 우린 때로 사랑에 빠지기도 했었지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그와 나는 취향이 비슷하고 처지도 비슷하여 급속도로 친해진다. 남자끼리 같이 다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동성애자로 오해하기도 한다. 회사를 그만둔 그와 한 달간의 긴 여행을 떠난 나는 여행지에서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을 밝히고 둘은 의형제로 지내기로 한다. _여섯, 윤희하원 윤희와 하원은 오랜 친구 사이이다. 예쁘장하게 생긴 윤희에게는 날파리처럼 따라다니는 남자가 많고 하원은 그때마다 그들을 쫓아내는 역할을 자청한다. 나는 우연찮게 소개팅 비슷한 자리에 불려나가 그 둘을 만나게 되는데 나는 하원과 파트너가 되어 둘이 많은 얘기를 나눈다. 알고 보니 하원은 이반(동성애자)으로 윤희를 오랫동안 사랑해오고 있었다. _일곱, 갑오징어의 사랑 나는 세상에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의 교감을 느낀다. 그녀는 다른 듯 같은 모습으로 곳곳에서 나와 만난다. 나는 꿈결처럼 자신을 휘감는 그녀로부터 뒤돌아서고 만다. _여덟, 잃어버린 우산을 추억함 나는 이탈리아 밀라노에 갔다가 마음에 쏙 들지만 화려한 우산을 구입한다. 나는 광고 업체에 근무하고 있는데 거기서 한 디자이너를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 호감을 느낀다. 나는 그녀가 그 우산과 썩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게 권태로운 그녀는 한때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던 과거가 있으며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 내가 그녀와 마지막으로 만난 날 둘은 호텔 바에서 술을 마셨는데 나는 깜박 우산 챙기는 것을 잊고 만다. 세월이 흘러 나는 우연히 길에서 그 우산을 쓰고 있는 그녀와 어색하게 만나게 된다. _아홉, 쥐와 장미 소설가와 독자의 입장에서 나와 그녀는 만났다. 그녀는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보고 미니 마우스를 끼고 살았던 이십대 초반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내가 그 얘기를 소설로 쓰기를 원한다. 일 년 후, 나와 그녀는 일본에서 우연히 만나서 술을 마시는데 둘 다 기분이 묘하게 좋지 않다. 그렇게 헤어진 그녀를 나는 오랜 후에 한국의 어느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운전자와 신호대기를 받고 서 있는 보행자로 만나게 된다. _열, 이태리 다방 나와 정선(貞宣)은 대학 때 고전음악감상 동아리에서 만났다. 그녀와 나는 ‘이태리 다방’에서 줄곧 만나왔다. 나와 그녀는 서로 호감을 느끼는 사이지만 이상하게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많았다. 결국 내가 군대에 간 사이 그녀는 결혼을 한다. 하지만 그 후에도 이태리 다방에서 만나 가끔 맥주를 마시곤 했다. 어느 날 그녀는 내게 이혼을 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고 말한다. 변함없이 서로를 좋아하지만 둘은 결국 그렇게 헤어지고 만다. _열하나, 내 마음의 헛간 나는 빌라 지하 창고를 ‘나의 헛간’으로 사용하던 중 이사를 하면서 그 빌라는 신혼부부에게 전세를 준다. 신혼부부는 그 창고가 불필요했기 때문에 나는 나의 헛간을 그대로 유지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빌라 근처에 볼일이 있어 그 헛간에 들렀는데 그곳에 세를 놓은 집에 사는 젊은 부인이 있었다. 그녀도 나처럼 혼자만의 공간인 헛간을 은신처 삼아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었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그 공간을 내주고 돌아 나온다. _열둘, 매기의 추억 《미란》이라는 그의 장편소설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여자 미란과 나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생에 있어 괴롭고 외로운 때 힘이 되어준 여자, 미란. 결혼하기 전까지 서툰 사랑 한 번 해보지 않은 그녀는 받아들이고 수긍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나는 따뜻한 두부 같고, 미래의 내 어머니 같은 그녀를 예전에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고 느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