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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
문화 군주 세종대왕의 형님 이야기
이복규
유아이북스 2025.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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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차례
머리말 · 4

1 · 탄생과 유년 시절 · 9
2 · 효성스러운 아들 · 22
3 · 동생 세종과의 우애 · 27
4 · 불교 신자 효령대군의 신비 체험 · 40
5 · 희우정 별장에서 있었던 일 · 53
6 · 수륙재의 파장 · 63
7 · 91세 장수와 그 비결 · 74
8 · 며느리 간택의 구설수 · 82
9 · 형 양녕대군과의 우애 · 91
10 · 최초의 지방자치 규약 ‘향헌’의 제정 · 99
11 · 효령대군이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다 · 111
12 · 《부모은중장수태골경합부》 필사 · 124
13 · 원각사 창건에 얽힌 일들 · 132
14 · 임종과 후일담 · 144
15 · 효령대군에 대한 오해와 진실 · 159
16 · 효령대군 행적의 인문학적 가치 · 173

[부록] 효령대군 연보 · 189

저자 소개 1

이복규(李福揆)는 전북 익산에서 출생했다. 현재 서경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명예교수이고, 경희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 숭실대학교, 총신대학교에서 강의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문초서연수과정을 수료해 『묵재일기』를 검토하다 최초의 한글 번역 소설 「설공찬전」 국문본을 발견하는 행운을 누렸다. 아현동 산성교회 장로로서 밥죤스신학교 학부와 연구원에서 신학을 공부해 성경 공부를 인도하고 있다. 저서로 『부여·고구려 건국신화 연구』(집문당, 1998; 1999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설공찬전의 이해』(지식과교양, 2018), 『교회에서 쓰는 말 바로잡기』(새물결플러스, 2020) 등이 있
이복규(李福揆)는 전북 익산에서 출생했다. 현재 서경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명예교수이고, 경희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 숭실대학교, 총신대학교에서 강의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문초서연수과정을 수료해 『묵재일기』를 검토하다 최초의 한글 번역 소설 「설공찬전」 국문본을 발견하는 행운을 누렸다. 아현동 산성교회 장로로서 밥죤스신학교 학부와 연구원에서 신학을 공부해 성경 공부를 인도하고 있다. 저서로 『부여·고구려 건국신화 연구』(집문당, 1998; 1999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설공찬전의 이해』(지식과교양, 2018), 『교회에서 쓰는 말 바로잡기』(새물결플러스, 2020) 등이 있고, 공저로 『한국 그리스도교 민속론』(민속원, 2014), 『우리신화 한국신화』(교우사, 2018) 등이 있다. 이복규 교수의 교회용어·설교예화 카페(http://cafe.naver.com/bokforyou)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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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04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216쪽 | 412g | 152*225*20mm
ISBN13
9791163221661

책 속으로

효령대군은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문화 군주 세종을 있게 한 분이자 성종 때까지 장수하면서 나라와 왕실을 위해 힘쓴 어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종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효령대군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많습니다. 심지어 스님이 되었다거나 후손을 두지 않았다고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 p.5

온화하고 아담하였으며 효제충신, 즉 효도, 우애, 충성, 신의의 행실이 돈독하다고 했습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사람답게 살았다는 말입니다. 학문을 좋아했으며 겸손하고 어질기도 하여 장래가 촉망된다고 하였습니다. 남자 나이 15~20세에 관례를 행하면서 자를 지어주는 게 예법의 규정이었으니, 효령대군의 이 같은 성품과 행실은 당시에 이미 소문이 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p.19

효령대군을 상징하는 글자가 있습니다. ‘효도 효’ 자입니다. 왕자로서의 이름을 지을 때 ‘효령’이라 한 데서 잘 알 수 있습니다. 12세 때 ‘효령군’으로 봉해졌는데 부모에 대한 효행이 인상적이어서 그렇게 지었을 것입니다. 별세 후에 지어준 시호 ‘정효공’에도 ‘효’자가 들어 있습니다. 시호 풀이를 보면 “지혜롭게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한 것을 효라고 하였다” 하니 효령대군이 평생 효성이 얼마나 지극한 분이었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 p.24

효령대군은 우애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형제간의 우애가 아주 좋았습니다. 세자 자리를 양보한 일이 그 대표적인 사례로 우애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권력욕은 무서운 것인데 이를 극복하고 양보했으니 미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 p.29~30

중국에서 왕위를 양보한 태백과 우중, 백이와 숙제 형제처럼 우리나라에는 양녕과 효령이 있다고 하여 일찍부터 찬양해 마지않았습니다. 형제 우애가 권력욕을 앞선 매우 드문 사례라는 점에서 두고두고 기릴 만하다 하겠습니다.
--- p.34

효령대군이 중병을 앓다가 치유되자 세종이 이를 축하하는 잔치를 열었다는 것인데 효령을 만난 세종이 눈물을 흘리고 효령도 울었다는 대목은 읽는 이의 마음을 찡하게 합니다. 중략한 부분에서는 그간 간호한 모든 사람에게 일일이 상을 주고 있어 효령이 병에서 나은 것을 세종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충분히 짐작하게 합니다.
--- p.39~40

세종 임금이 조문하는 이 마음은 바로 효령대군도 같았을 것입니다. 남동생, 부모님에 이어 여동생이 연거푸 떠나가는 것을 겪으면서 그는 더욱 더 불교에 빠지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이 세상의 삶이 허무하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후의 영원한 생명을 추구했고, 그것을 불교의 내세관과 영혼관에서 찾아 깊이 믿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런 아픔을 겪는다고 모두가 불교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천성적으로 그런 성향이 있었다면 이런 후천적인 충격이 더해져 종교심이 크게 발현될 수도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 p.57

이 대목을 보면, 효령대군이 병이 나자 이곳에 와서 요양하였고, 그 효과를 보아서 낫자, 세종이 들러서 축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이 공기도 좋고 경치도 수려해 치유하기에 좋은 곳이었다는 것과 효령대군이 약질이었다는 것도 알려주는 기록입니다. 세종이 두 공주와 함께 와서 위로하고, 날이 저물어서야 궁으로 돌아갔다고 하여, 두 분의 우애를 다시금 느끼게 합니다. 세종의 희우정 나들이는 공적으로는 백성의 농사를 살피기 위한 목적이었고, 사적으로는 병이 나은 형님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일석이조의 거둥이었습니다. 효도와 우애를 중시하던 조선시대에 임금의 우애 실천이야말로 지도자의 도덕적인 권위를 솔선해서 보여주는 기회라고 본다면, 이 또한 고도의 통치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 p.61~63

이렇게 하여 월산대군의 정자가 된 이곳은 현재 망원정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시대가 흘러 이곳이 지닌 기능은 다른 데로 대체되었으나, 그 정신만은 계속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특히 희우정이란 전설이 머금고 있는 지도자의 애민의식은 물론 이곳에서의 형제 우애는 오래 기억되어야 마땅합니다.
--- p.68

혈연과 학연을 떠나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가서 함께 어울렸던 효령대군의 자세야말로 이 시대에도 여전히 요구되는 리더십이자 인간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p.79

효령대군은 매우 장수하신 분인데 무려 91세를 살았으니 그 시대의 평균 연령에 비추어 아주 이례적입니다. 양반의 평균 수명은 51세~56세였고 임금의 평균 수명은 47세였습니다. 환갑 자체가 큰 경사로 여겨지던 시절이었습니다.
--- p.80

이 내용을 보면, 효령대군은 병 때문에 불경 읽기를 했고, 그런 신앙심 때문에 병도 나아서 건강하게 오래 살았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일반적으로도, 종교를 가지면 마음의 평정과 평안을 유지하는 데 유리하다고 합니다. 변수가 많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절대자의 섭리라고 믿으며 살아가니 스트레스가 적었을 듯합니다.
--- p.85

효령대군의 사경을 모시고 있는 광덕사와 효령대군은 어떤 관계일까요? 대군이 1461년(세조) 5월 21일 이곳 광덕사의 법당에서 불공을 드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법당의 부처님 사리에서 상서로운 빛이 터져 나와 광덕산을 뒤덮으며 그윽한 향기를 뿜어냈고, 하늘에서는 북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으며, 빛을 내던 사리는 25과의 사리로 분신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군이 감격하여 불전에 예배하면서 사리를 수습하여 세조대왕에게 바쳤고, 세조는 상서로운 조짐이라면서 정희왕후가 머물던 궁에서 함께 예불을 모시면서 부처님 공덕을 찬탄하는 노래를 지었다고 합니다.
--- p.136~138

그럴 만도 한 게 효령대군의 신비체험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후의 기록을 보면, 부지 확보를 위해, 민가를 철거하는 데 따른 보상 대책을 논의하는 등, 치밀한 계획에 따라 원각사 건축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효령대군은 계속 다음과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보고하여, 이 절의 창건이 초월적인 뜻에 따른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p.143

이 대목을 보면, 따로 띠로 지붕을 인 집에서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다 작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왕자로 태어나, 왕의 형으로서 또는 왕실 어른으로서 무려 아홉 왕을 겪으며 91세까지 장수한 분답지 않게 살았다니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높은 사회적 신분에 걸맞은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자세를 보여준 분이었음을 느끼게 합니다.
--- p.153

여기에 비하면 효령대군에 대해 한 줄 비판적인 내용을 적은 것은 사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공이 아무리 많더라도 과실이 있다는 말이 있으면 함께 남기려고 노력한 사관의 자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는지 알 만한 부분입니다.
--- p.166

그러나 왕이 만능은 아니기에 혼자만으로는 태평성대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효령대군은 자신이 지닌 역량을 동원해 바로 그 여백을 채우다 간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왕실이든 조정이든 부르는 곳이면 달려가 도왔으며, 특히 소외당하던 불교를 위해 자신만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을 다한 분입니다.

--- p.178

출판사 리뷰

9명의 왕을 거치며 91세까지 장수한 왕실의 어른
50만 후손을 거느린 효령대군의 삶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

조선시대 양반의 평균 수명은 51세였고 임금의 평균 수명은 47세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91세까지 장수한 왕가의 인물이 있습니다. 그의 후손은 현재 무려 50만 명에 달합니다. 바로 세종대왕의 형, 효령대군 이야기입니다. 그는 살아온 긴 시간만큼 다양한 일을 겪었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신념을 지키며 묵묵히 살아간 신비한 인물입니다.
그의 후손이라 할지라도 세종대왕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정작 효령대군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많습니다. 심지어 스님이 되었다거나 후손을 두지 않았다고 아는 사람까지 있는 실정입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남겨진 기록들로 효령대군을 그려보면 세종대왕의 형제답게 엄청난 영향력과 깊은 지혜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왕의 덕목을 갖춘 동생에게 자리를 양보한 후 백성들과 시간을 보냈습니다.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신비체험까지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무려 아홉명이나 되는 왕의 시기 동안 백성들의 존경을 꾸준히 받았습니다. 91세라는 나이까지 장수하며 평생을 나라와 문화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후대를 위한 여러 기록들까지 남겨두었는데 이는 조선 초기의 역사와 문화유산까지 알아볼 수 있는 귀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1장에서는 어린 시절의 효령대군을 그리며, 2장에서는 효심이 지극하여 그와 관련된 이름까지 얻은 이유를 설명합니다. 3장에서는 동생 세종과의 일화로 그들의 우애를 되짚어보고 4장에서는 불교 신자였던 효령대군이 겪은 신비 체험을 풀어봅니다.

5장에서는 효령대군의 별장인 ‘희우정’에서 있었던 다양한 일화를 다루며 6장에서는 그가 열었던 행사인 ‘수륙재’를 이야기합니다. 7장에서는 장수를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을 짚어보고 8장에서는 당시 겪었던 구설수와 오해를 풀어봅니다. 9장에서는 형인 양녕대군과의 일화로 그들의 우애를 되짚어 보고 있습니다.

10장에서는 우리나라 지방자치제 규범인 향약의 시초인 ‘향헌 56조’를 최초로 제정하여 민생에 힘쓴 내용이 나옵니다. 11장은 동생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로 불경을 번역해 한글의 대중화에 힘쓴 내용입니다.

이어지는 12, 13장은 《부모은중경》 필사와 원각사 창건에 관한 일까지 자세하게 다루며 역사적 의미를 설명합니다. 14장에서는 임종과 후일담을 다루고 15장에서는 그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을 바로잡고 있습니다. 마지막 16장에서는 효령대군의 행적이 현 시대에 갖는 인문학적 가치에 관하여 이야기 합니다. 더불어 부록에서는 연표로 그의 일생을 한눈에 볼 수도 있습니다.

한편, 효령대군의 묘는 현 방배동 청권사 내에 있습니다. 청권사(靑權祠)란 효령대군의 사당 이름입니다. 청권(靑權)은 《논어》에 나오는 ‘신중청폐중권(身中淸廢中權)’에서 인용된 말입니다. ‘청렴하고 깨끗한 처신은 청도(淸道)에 맞았고, 나를 버리고 권력을 탐하지 않은 것은 권도(權道)에 맞았다’는 뜻으로 왕위를 동생 세종에게 양보하고 청렴하게 살아온 그의 삶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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