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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답사 0번지 영암
송일준
스타북스 2025.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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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프롤로그

1. 신령스런 바위
영암, 왜 지명이 신령스런 바위靈巖일까 | 융성도서관 | 호동마을 카페 화담 | 길심 씨의 인생 여행 | 카페 화담에서 북카페 메종 인디아로 | 즉석 발열 떡국 | 달뜬 콩국수 | 카페 해올 | 카페 월요 | 갈낙탕의 탄생지 독천 낙지거리 | 임금님께 바친 영암어란 | 궁중 진상품 영암 참빗

2. 큰 바위 얼굴
기찬랜드 한국트로트가요센터 | 덕진 차밭, 월출산을 전망하는 최고의 지점 | 큰 바위 얼굴, 뉴햄프셔주와 영암 | 월출산 등산, 큰바위얼굴을 만나다 | 하늘 아래 첫 부처 길 | 영암과 세도나 | 800살 노거수 엄길리 느티나무 | 작고 예쁜 성당, 영암 신북성당 시종공소 | 영팔정과 아천미술관 | 이안 미술관 | 성재리 포구 | 구림 상대포역사공원의 야간 산책 | 쌍정마을과 리드미컬 프레임 | 송계마을의 왕버들 | 정겨운 광암마을과 찻집 명다헌 | 벼락 맞은 이팝나무와 한옥펜션 월인당 | 모정마을 한 바퀴 | 아름다운 폐교 학신분교 | 라이딩 길에 만난 폐교, 서호북초등학교

3. 영암 사람들
엄길마을 산책 | 복다회마을의 돌미륵 | 영보정 마을, 구림과 더불어 영암을 대표하는 명촌 | 주암마을 아천정과 경회 김영근 선생 | 영암에서 만난 아프리카 마콘데 조각 | 강박사의 보물창고 | 농촌 유토피아 신유토마을 | 김 시식자始植者 영암 사람 김여익 | 영암군립 하정웅미술관 | 목판화가 김준권 | 인생은 미완성 작사가 김지평 | 죽림정, 이순신 장군 영암에 오다 | 도림사 장군당

4. 지독한 사랑
마한시대 고분들과 마한문화공원 | 나주에서 만난 영암 고분 출토품들 | 성기동공원 왕인박사 유적 | 왕인박사, 천자문,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 | 엄길리 암각매향명 | 도선국사 백의암의 전설 | 월출산이 수리였다?! | 국사암과 국암사 | 을묘왜변의 영웅 양달사 의병장과 장독샘 | 바람벽에 쓴 시 | 양달사 시묘공원 | 상남자 호랑이 장군 김완 | 지독한 사랑, 기생 홍랑과 선비 최경창의 러브 스토리 | 의향 영암, 초등학생들의 동맹휴학과 일본인 교장의 자살 | 구한말 여성 의병 양방매 | 영암 근대사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 농민들은 못 쓰는 학파 1저수지 | 늦가을 도갑사

저자 소개1

1957년 영암에서 태어나 나주로 이사했다. 나주초등학교에 입학해 나주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주중학교로 진학했다. 나주중학교 1학년 때 상경, 덕수중학교(야간부), 양정고등학교, 고려대학교(사회학과), 한국외대 통역대학원(한영과)을 졸업했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에 능통하다. 연세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을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신문방송학과)에서 언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 『일본의 테레비』, 역서로 『거대 NHK 붕괴』 『미디어리터러시 접근법』 등이 있다. 1984년 MBC에 입사, 3년 간의 AD생활을 거쳐 PD로 승격했다. 〈출발 새 아침〉 〈취미여행〉 〈
1957년 영암에서 태어나 나주로 이사했다. 나주초등학교에 입학해 나주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주중학교로 진학했다. 나주중학교 1학년 때 상경, 덕수중학교(야간부), 양정고등학교, 고려대학교(사회학과), 한국외대 통역대학원(한영과)을 졸업했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에 능통하다. 연세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을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신문방송학과)에서 언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 『일본의 테레비』, 역서로 『거대 NHK 붕괴』 『미디어리터러시 접근법』 등이 있다.

1984년 MBC에 입사, 3년 간의 AD생활을 거쳐 PD로 승격했다. 〈출발 새 아침〉 〈취미여행〉 〈인간시대〉 〈PD수첩〉,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연출했다. 국제협력팀장, 도쿄PD특파원, 외주제작센터장을 맡아 떠나 있기도 했지만, 〈PD수첩〉과 함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2008년 4월 이명박 정부의 광우병 위험 미국쇠고기수입 무제한 허용 방침을 비판한 방송 후 오랫동안 고초를 겪었다. 보수정권 내내 제작현업에서 쫓겨나 사내 유배생활을 했고, MBC PD협회장, 한국PD연합회장이 되어 언론자유 회복 투쟁의 일선에서 싸웠다.

2018년 1월 광주MBC사장으로 부임하여 지역성과 보편성을 겸비한 글로벌 수준의 프로그램 제작, 지자체와 협력하여 지역발전에 도움이 되는 문화사업을 열정적으로 추진했다. 홍어를 180도 새로운 관점에서 들여다본 11부작 다큐멘터리 〈핑크피쉬〉(연출 백재훈 최선영)로 많은 상을 받았다. 나주정미소를 리모델링한 공연장 ‘난장곡간’, 광주 양림동 펭귄골목 입구의 라디오 오픈스튜디오, 담양에 추진 중인 LP뮤지엄 등으로 지역의 쇠락한 원도심을 활성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국의 방송에 PD저널리즘이란 용어를 탄생시킨 〈PD수첩〉의 대표적 얼굴 중 한 명으로 〈PD수첩〉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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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04월 22일
쪽수, 무게, 크기
568쪽 | 152*224*35mm
ISBN13
9791157957705

책 속으로

실제로 영암은 월출산이고 월출산이 곧 영암이라는 사실은 직접 영암에 와보면 알게 된다. 나주를 거쳐 영암 금정을 지나는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혹은 구불구불 옛 여운재 고갯길을 넘어서는 순간 너른 들판 끝에 갑자기 등장하는 거대한 바위산의 위용에 압도당할 것이다.

일주일 이상 차를 몰고 영암 이곳저곳을 탐방하고 있는 중인데, 몇 군데를 제외하고 어디를 가든 월출산이 보인다. 바라보는 앵글이나 거리에 따라 그 모습은 달라질지언정 월출산은 하루 스물네 시간 일년 삼백육십오일 사람들의 시야를 지배한다.

옛날 옛적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너른 평야에 갑툭튀한 거대한 바윗덩어리. 영암은 곧 바위였다.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전국 여기저기 흔히 보는 유의 전설이다. 중국 사람들이 조선땅에 큰 인물이 날 것을 우려해 해꼬지를 했고, 우리 조상들은 그걸 어떤 식으로든 극복했다는. 옛날 월출산 꼭대기에 동석(움직이는 돌)이 셋 있었다. 큰 인물이 날 것을 염려한 중국사람들이 동석을 세게 밀어 전부 떨어뜨려버렸는데, 그중 하나가 스스로 굴러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후 사람들은 이 고장을 영암이라고 불렀다.
---「15~16쪽 ‘영암, 왜 지명이 신령스런 바위(靈巖)일까’」중에서

세조실록에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세조 3년인 1457년 4월 16일자 기사다. 임금이 별진상(別進上)을 없애라는 교지를 내렸는데도 전라도 관찰사 송처관이 건어란을 바쳤으니 형조가 조사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는 내용이다. 세조는 정례 진상이 아닌 별도의 진상품을 마련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지방관아와 백성들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관찰사라는 자가 남들 안 할 때 아부해서 돋보이려고 바친 진상품이 건어란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어떤 생선알로 만든 것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그냥 말린 생선알이 아니라 엄청나게 공들여 만든 어란이었을 것이다. 전라도 관찰사였으니 송처관이 바친 어란은 영암어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란은 숭어 외에도 민어, 청어, 조기알로도 만들었지만 숭어알로 만든 것을 최고로 쳤다. 최태근 명장도 한때 민어알로 어란을 만든 적이 있었지만 그만두었단다. 숭어알에 없는 충이 있었다. 먹어도 지장은 없지만 꺼림칙했다. 현재는 오로지 숭어알로만 만들고 있다.
---「85쪽 ‘임금님께 바친 영암어란’」중에서

트로트 가수 명예의 전당. 유명 가수들의 사진 액자들로 채워져 있다. 영암 출신으로는 단연 하춘화가 있다. 오랜 무명생활 끝에 ‘땡벌’로 유명해진 가수 강진도 있다. 영암 출신인 걸 처음 알았다. 이발소, 손님들의 리퀘스트를 받아 틀어주던 DJ박스가 있는 다방, 문방구, 극장 매표소 등을 재현해 놓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는 옛날 주조장 바깥 풍경이다. 검은 자전거가 세워져 있다. 순식간에 먼 유년시절로 타임슬립했다.

술심부름이었을까. 아버지가 타던 큰 짐바리 자전거를 타고 가다 2미터는 될 개천 아래로 떨어진 적이 있었다. 안장에 앉으면 페달에 다리가 닿지 않아 안장 아래 프레임 안으로 한 다리를 집어 넣고 비스듬히 매달려 페달을 돌렸다. 그러다 균형이 무너져 추락했는데 개천 옆 돌밭이었다. 다행히 다친 데 하나 없이 멀쩡했다. 가난했지만 즐거웠던 시절이다. 그립다. 극장에서는 서너 명의 관객이 하춘화 다큐를 관람하고 있고 옆에 있는 노래방에선 반짝이 재킷에 모자를 쓰고 제법 가수 흉내를 내며 노래하는 이들이 있다.
---「106~107쪽 ‘기찬랜드 한국트로트가요센터’」중에서

월출산의 큰바위얼굴은 뉴햄프셔주 큰 바위 얼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지다. 옆 얼굴이 아니라 거의 정면이고, 크기도 8배 이상이나 된다(월출산 큰바위얼굴 높이 100m vs 뉴햄프셔주 큰바위얼굴 높이 12m). 다만, 불리한 것은 뉴햄프셔주의 큰바위얼굴은 평지에서 보이는데 반해 월출산의 큰바위얼굴은 산에 올라야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설명하기 나름이다. 성스러운 얼굴을 알현하는데 조금의 수고도 들이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뉴햄프셔주 큰 바위얼굴보다 해발로 200미터 정도 낮은 해발 750m 정도 높이에 위치한 월출산 큰바위얼굴은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는 힘들겠지만, 웬만한 보통 사람이라면 크게 어렵지 않게 올라가 볼 수 있다. 월출산, 나아가서 영암을 상징하는 엠블럼으로 이보다 좋은 게 있을까. 큰바위얼굴을 메타 엠블럼으로 삼고 그 아래 각종 특산품, 공예품, 관광지 마크를 사용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캐릭터 상품을 만드는 데도 큰바위얼굴한 게 없다.
---「125~126쪽 ‘큰 바위 얼굴, 뉴햄프셔주와 영암’」중에서

1930년대 어느 해 여름, 당산나무로 마을 사람들의 섬김을 받던 이팝나무에 벼락이 떨어졌다. 김창오 씨가 쓴 책 ‘모정마을 이야기’를 보면 말 그대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던 모양이다.
나무 아래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해전 하네(=할아버지)는 벼락 때문에 귀가 먹었다. 시끄럽게 울던 매미들은 우박처럼 우수수 땅바닥에 떨어졌다.

벼락에 맞는 순간, 나무 속 수맥을 따라 흐른 수억 볼트의 전기로 이팝나무의 몸은 폭발하듯 터지고 수천 도 뜨거운 불에 휩싸였을 것이다. 몸통의 반이 떨어져 나가고 중화상을 입은 이팝나무는 그러나 용케 살아남았다.

가장 잘 알려진 이팝나무의 유래는 꽃송이가 사발에 담은 흰 쌀밥 같아서 이밥나무라 하던 것이 이팝나무로 변했다는 것이다. 다른 설은 여름으로 들어가는 입하에 꽃이 피는 나무라고 해서 입하목(발음 이파목)=이파나무=이팝나무가 되었다는 것이다. 모정마을에서는 이팝나무를 외암나무라고 한다는데, 전라북도 일부 지역에서 이암나무라 하는 것과 같은 말일 것이다.
---「246~247쪽 ‘벼락 맞은 이팝나무와 한옥펜션 월인당’」중에서

형제봉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재판에 넘겨진 이들 가운데 최씨가 21명으로 가장 많았다. 모두 1920년대 서울과 광주에서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 가운데 광주농고를 졸업하고 300석 정도 농사를 짓는 부농이었던 최병수가 있었다. 2015년 일본대사관 앞에서 분신한 최현열 선생의 부친이다. 최병수는 1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실형을 산 사람들 가운데 최씨와 더불어 신씨들도 있다. 영보촌은 최씨와 신씨의 집성촌이었다. 영암 출신으로 교보생명을 창업한 대산 신용호 선생의 맏형 신일선도 시위에 참가했다. 징역 6개월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공으로 2018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둘째 형도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신용호는 6형제 중 다섯 째 아들이었다. 부친 신예범은 독립운동을 하느라 늘 집에 없었고, 감옥 생활을 했다. 집안 생계는 어머니가 꾸려가야 했다. 어린 신용호는 문학을 하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일찍이 사업의 길에 뛰어들었다. 중국에서 사업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댔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모토로 유명한 교보문고. 신용호 선생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광화문 사거리에 서점을 냈다. 교보문고의 5대 운영 지침은 신용호의 뿌리와 삶의 이력에서 나온 것이다.
---「301쪽 ‘영보정 마을, 구림과 더불어 영암을 대표하는 명촌’」중에서

전시 작품들 중에 눈에 익은 그림이 있었다. 2018년 4월 27일 오전,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화의 집으로 들어선 김정은이 방명록에 서명했다. 서서 지켜보는 문재인 대통령과 서명하는 김정은의 배경이 된 그림. 산운(山韻)-0901이다. 김준권 작가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백두대간 시리즈 작품 중 하나다. 백두대간의 상징성이 남북정상의 만남을 더욱 감동적으로 만들었다. 농담이 다른 첩첩한 산의 능선들이 파도처럼 출렁인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가슴 속에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인다. 신비롭고 황홀하다.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고 있는 백두대간. 백두대간과 지역마다 뻗어있는 여러 정맥들을 골격으로 삼은 한반도에서 우리 민족은 유사 이래 수천 년을 살아왔다. 분단 이후 섬에 갇혀 산 세월이 길어지다 보니 원래는 우리가 대륙국가였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지경이 됐다. 김준권은 백두대간이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백두대간 시리즈를 통해 관객들에게 우리 민족의 근원이 대륙에 있다는 것, 백두대간과 거기서 뻗어나간 수많은 산들, 그 품에 안겨 우리가 살아왔고 살고 있다는 것, 지금은 허리가 부러진 채로 있지만 반드시 하나로 이어져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364~366쪽 ‘목판화가 김준권’」중에서

이순신 장군의 얼굴. 얼마 안 되는 함선과 병사들을 이끌고 압도적 병력의 왜군을 무찌른, 후일 왜인들이 전쟁의 신으로 숭상한 장군의 얼굴이 너무 순하다. 필생즉사 필사즉생의 각오가 느껴지는 표정이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림 왼쪽에 ‘이순신 장군 1596년 영암에 오시다’라고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이다. 1596년 9월 1일, 이순신 장군은 병참 물자를 구하기 위해 영암에 왔다. 향사당에서 조팽년과 최숙남을 만났다. 두 사람 다 영암 출신 정랑이었다. 선조가 신임한 조팽년은 청렴결백하고 군무에 능통했다. 선조는 조팽년에게 남해에 가서 이순신과 함께 군무에 종사할 것을 명했다. 조팽년에게 그 말을 들은 이순신은 크게 기뻐했다. 9월 2일 이순신은 영암에 머무르며 전략을 논의했다. 9월 3일 아침 이순신은 영암을 떠났다. 현삼식 씨를 따라 죽림정으로 간다. 죽림정에는 이순신이 보낸 서찰 사본 7통이 보관돼 있다. 원본이 아니라 사본이다.
---「388~389쪽 ‘죽림정, 이순신 장군 영암에 오다’」중에서

일본인들 스스로 왕인박사를 일본을 만든 역사적 위인들 중 첫 자리에 모신다. 왕인박사는 고대 일본의 문화와 학문의 토대를 놓았다. 그 바탕 위에서 일본은 고대 국가의 틀을 다졌고, 아스카 문화를 꽃 피울 수 있었다. 그런데, 왕인이 전해준 천자문이 과연 어떤 천자문이었느냐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다. 하늘천 따지로 시작하는, 흔히 우리가 아는 천자문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나, 아니다.

왕인박사가 왜로 건너간 것은 405년. 하늘천 따지로 시작하는 주흥사의 천자문이 지어진 것은 6세기 초반인 502~521년 사이. 하여, 왕인박사가 주흥사의 천자문을 갖고 갔다는 건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얘기가 된다. 주흥사 이전에 천자문을 지은 이가 또 있었다. 중국의 위오촉 삼국 시대, 위나라 정치가이자 서예가인 종요(151~230 )라는 사람이다. 주흥사의 천자문이 천지현황 우주홍황(天地玄黃宇宙洪荒)으로 시작하는 데 비해 종요의 천자문은 이의일월 운로엄상(二儀日月雲露嚴霜)으로 시작한다. 시간 순서로 보면 왕인박사가 가져간 천자문은 종요가 지은 것으로 보는 게 더 자연스럽다.
---「448~450쪽 ‘왕인박사, 천자문,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중에서

도선국사를 명당풍수 음택풍수의 선구자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나 천만의 말씀이다. 도선 국사는 국토를 살아있는 몸이자 부처님으로 보았다. 몸이 아프면 침을 놓고 뜸을 떠 치료하듯 국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이른바 비보풍수다. 지구를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는 관점은 서양에도 존재한다. 20세기 제임스 러브록이 정립한 가이아(GAIA) 개념에 의해 본격적으로 확산되었지만 도선국사는 이미 천년도 훨씬 전에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통합적 상보적 지리사상을 주창했다. 최근 화두로 대두한 지속가능성의 관점에서 조금 과장을 보태 말하면 도선국사는 환경의 지속가능성에 기초한 생태학의 주창자라고 볼 수도 있다.
---「460쪽 ‘도선국사 백의암의 전설’」중에서

히트한 가요 덕분에 다시 많은 이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이름이 있다. 홍랑. 사람 이름 그대로 노래 제목이다. 민수현이 처음 부른 것을 임영웅이 불러 역주행했다. 유튜브에서 임영웅이 부른 홍랑의 조회수를 합하면 가볍게 2천 만을 넘어가고 민수현, 채수현 등이 부른 홍랑의 조회수도 수백 만이다. 노래 홍랑은 유명 음악인인 이호섭이 작곡하고 최흥호가 작사했다. 홍랑의 가사는 기생 시인 홍랑의 시조 묏버들가에서 빼고 보탠 것이다. 홍랑의 묏버들가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 나거든 나인 줄 여기소서

도치법 같은 글쓰기 기법도 놀랄만한데, 순수 우리말로 사랑에 사로잡힌 여인의 절절한 감정을 섬세하고 우아하게 표현해 조선 최고의 연애시로 평가 받는다. 고 양주동 박사는 묏버들가를 우리 시조 사상 최고의 걸작이라고 극찬했다. 국어 교과서에 실리고 대입시험에 나왔으니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것이다.

---「496쪽 ‘지독한 사랑, 기생 홍랑과 선비 최경창의 러브 스토리’」중에서

출판사 리뷰

송일준PD가 들려주는 신령스런 바위가 있는 천년고을 영암 이야기
“나는 긴 역사 속 흥미진진한 인물들과 이야기에 빠져 반년을 머물렀다”


퇴직 후 저자가 꿈꾸는 제2의 인생은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일 년에 한 권 정도 책을 쓰는 여행 작가의 삶이다. 저자의 첫 번째 결실은 '제주도 한 달 살기'였다. 한 달 간의 제주도 체류와 여행의 경험을 술술 읽히는 구어체와 유머러스한 필체로 엮어낸 '제주도 한 달 살기'는 440페이지에 달하는 적지 않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많은 독자들의 환영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다.
두 번째 결실은 '나주수첩'이란 타이틀로 나온 두 권의 여행서다. 저자는 전주와 함께 전라도란 명칭의 유래가 된 천년고도 나주에서 일 년을 살았다. 구석구석을 발로 뛰며 저자가 길어 올린 나주의 역사 문화 인물들의 이야기는 나주배 말고는 별반 알려진 게 없는 나주를 알리고 나주에 관해 아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가이드북이다.

세 번째 타이틀을 고민하던 저자가 영암을 선택한 계기가 있었다. 영암군수가 저자에게 영암군 홍보대사를 맡아 달라 요청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마음속에 고향에 대한 사랑에 더해 영암을 널리 알려야겠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남도답사 0번지 영암』은 무려 560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다. 가뜩이나 책이 안 팔리는 시대. 어찌 보면 출판사로선 무모한 모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출판사는 상업적으론 불리할지 모르지만 월출산 말고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 영암을 제대로 알리려면 최소한 이 정도 내용은 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저자의 의견을 존중했다.

『남도답사 0번지 영암』책에 담긴 소재는 다양하다. 암흑 속에 있던 고대 일본에 문명의 빛을 전해준 왕인박사, 천년 넘는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의 사고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온 비보풍수의 창시자 도선국사, 고려건국의 공신이자 천문학자인 최지몽, 조선 최고의 연애 시 묏버들가를 쓴 기생 시인 홍랑이 목숨 바쳐 사랑한 고죽 최경창, 왜란 때 이순신 장군을 지원하고 교류했던 현씨 가문과 죽림정, 부친을 모함해 죽게 한 원수인 간신 한덕수에게 살아생전 복수하지 못한 것을 죽는 날까지 원통해 했던 상남자 김완 장군, 을미왜변의 영웅 양달사 장군 같은 위대한 인물들의 스토리는 영암이란 지명의 유래가 된 월출산의 정기가 예사롭지 않음을 증거 한다.

고대, 백제가 지배적인 세력이 된 후에도 상당한 기간 남도를 지배했던 마한 왕국들의 고분과 출토품의 모습은 신기하고 대단하다. 조선시대 임금님 수랏상에 오르던 영암어란, 간척으로 갯벌이 변해 농지가 되기 전 지천으로 나던 낙지 덕에 유명해진 독천낙지거리와 거기서 탄생한 갈낙탕, 전국적으로 유명하고 최고가로 팔렸던 영암참빗 이야기도 재밌다.

영암이 배출한 인물들을 소개하는 장에서는 지금 전 세계에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김의 최초 양식자 김여익은 영암 사람이다. 당대 최고의 목판화가 김준권, 인생은 미완성 숨어 우는 바람소리 등 300곡이 넘는 유명 가요를 작사·작곡한 음악가 김지평, 영암아리랑을 불러 영암을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가수 하춘화의 고향은 영암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양의 예술품을 아낌없이 기증한 재일교포 메세나 하정웅의 스토리는 감동적이다. 하정웅의 부모는 일본에 살면서 평생 고향 영암을 그리워했다. 영암에 하정웅이 기증한 작품들로 세운 군립하정웅미술관이 있는 까닭이다.

영암에는 지역 이상의 흥미진진한 전설과 역사를 참 많은 고장으로 과연 남도 0번지답다.

─월출산 아래 있는 호남의 으뜸 명촌 구림마을에서 위대한 세 명의 인물이 태어났다. 고대 일본에 문명의 빛을 전한 왕인박사, 땅과 자연에 대한 우리 민족의 사고에 깊숙이 뿌리내린 비보풍수사상의 창시자 도선국사, 고려의 건국 공신이자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 최지몽.

─통일신라 말. 구림마을 한 처녀는 월출산 빨래터에 떠내려 오는 오이를 먹고 배가 불러 도선국사를 낳았다.

─조선 최고의 연애 시 묏버들가를 쓴 기생 홍랑은 뛰어난 시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영암 출신 선비 최경창을 지독히 사랑했다. 관습과 신분을 초월해 기생 시인 홍랑과 인격적으로 교감하고 사랑했던 선비 최경창을 기념하는 고죽관이 구림마을에 있다.

─임금님께 진상했던 영암어란. 더운 여름날, 학질에 걸린 병자에게 찬물에 만 흰밥에 영암어란 한 조각을 얹어 먹이면 자리를 훌훌 털고 벌떡 일어났다. 영암에는 세계 최고로 맛있는 어란을 만드는 장인이 있다.

─소년 김완은 원수를 갚기 위해 문신의 꿈을 버리고 무인이 됐다.
부친을 모함해 죽게 한 간신 한덕수를 죽이려 두 번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전쟁 영웅으로 벼슬이 높아졌지만 죽을 때까지 부친의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다. 저자는 호랑이장군 김완보다 효자이자 상남자 김완에게 끌린다.

─월출산 구정봉은 봉우리 전체가 사람 얼굴을 한 거대한 바위다. 명암대비로 얼굴이 또렷이 드러나는 정오 무렵, 전망대에 앉아 큰 바위 얼굴을 응시하면 순간 신비로운 기운에 사로잡힌다. 영암이 예로부터 기가 센 고장으로 알려진 데는 까닭이 있다.

또한 『남도답사 0번지 영암』엔 또 전작들처럼 저자가 좋아하는 카페와 찻집 이야기도 나온다. 저자가 영암에 내려가 처음 들른 다육식물 카페 화담과 거기서 이어지는 서울 방배동의 인도전문 여행사와 북카페 메종인디아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송일준PD의 세 번째 여행서 『남도답사 0번지 영암』은 두께가 무색하게 술술 즐겁게 금세 읽힌다. 37년의 방송 PD 생활에서 단련된 구어체 덕이 클 것이다. 글에서는 저자의 캐릭터가 그대로 느껴진다. 그것이 재밌다.

제목을 '남도답사 0번지'로 정한 것은 짐작대로 '남도답사 1번지 강진'을 의식해서다. 강진은 그런 수식어로 강진을 소개한 유홍준 교수 덕을 톡톡히 봤다. 영암에는 강진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은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있다. 안 알려지고 덜 알려져 있을 뿐이다. 책을 읽어보면 왜 영암이 ‘남도답사 0번지’로 불려 마땅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영암은 물론 남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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