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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_ 삼중의 전쟁
제1장 남침 제2장 피난 제3장 유엔 67개국 지원 제4장 시찰 제5장 북진 제6장 중공군 침략 제7장 유엔 16개국 파병 제8장 민간인 학살 제9장 통일 제10장 휴전 협정 제11장 포로 석방 제12장 상호방위조약 제13장 정치회담 맺는 글 _ 미래 한국 수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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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후에는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을 직접 방문했고, 여기서 의정부의 2개 방어선이 북한군 탱크를 막지 못해 모두 뚫렸다는 전선 상황을 보고 받았다. 경무대로 돌아오는 길에는 이미 서울 상공에 적군의 야크 전투기가 출현하여 맴돌고 있었고, 이 대통령 일행은 전투기가 뜰 때마다 방공호로 들어갔다 나와야 했다.
--- p.50 전쟁 중, 위험한 지역을 가리지 않고 전용 비행기 없이 작은 경비행기를 타고 수백 회의 전선 시찰을 다니고, 그로 인해 늘 영부인의 마음을 졸이게 한 이승만. 바위보다 더 단단한 그의 애국정신과 불굴의 국가 수호 의지를 짐작할 수 있다. --- p.100 16개 나라에서 온 장병들은 그야말로 당시 한국이란 신생 국가의 이름도 지리도 아무것도 모르는 낯선 땅에 와서, 그들의 소중한 생명을 바쳐 싸운 젊은이들이었다. 미군을 비롯하여 한국에 파병된 16개 나라의 젊은 청년들은, 특히 처음에는 자신이 와 있는 곳이 어디이고 여기서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른 채, 어느 날 갑자기 이역만리 낯선 한국 땅에 실려 와서 한국에서 비참하게 싸웠고 또 죽었다. 이 대통령은 이런 젊은 외국 청년들의 실정을 안타깝게 여기고 종종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외국 군인들이 아무런 준비도 없고 생각도 없고, 또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도 모르던 사람들이, 이번 전쟁으로 미리 어떤 소식도 들은 것이 없이, 갑자기 우리나라에 끌려 나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비행기로 8천 킬로, 1만 킬로를 날아와, 땅도 모르고 사람도 모르는 여기에 난데없이 실려 왔지만, 자신이 무슨 까닭으로 여기 와 있는지, 여기서 왜 싸움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 p.150 이승만이 통일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고난의 역사를 우리 당대에서 겪어내고, 후손들이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길’이 통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끝내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분단으로 전쟁이 종결되고 그 후 75년이 지난 현재, 당시 이승만의 판단이 옳았는지 당시 그를 통일 병자라고 조롱했던 미국 유엔이 옳았는지는 이제 삼척동자도 안다. “통일 이외 어떤 것도 참혹한 희생의 대가가 될 수 없고, 전쟁의 해결이 될 수 없다.”라는 그의 말은 맞았다. 이승만은 소련이 내세우는 공산주의와 타협으로 세계 평화와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시 정확하게 간파했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타협은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이 불리할 때 시간을 벌기 위한 책략일 뿐이란 것을 누차 설명했지만, 우방인 미국과 유엔 지도자들은 이승만의 말을 경청하지 않았다. 온 민족이 피 흘리며 귀중한 생명과 모든 것을 바쳐 온 이유는, 오직 이 나라의 자유 민주 통일을 위해서다. 고난의 역사는 우리 당대에서 겪어내고, 후손들은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려고, 나는 어떠한 희생도 각오하고 있다. 이번 기회에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장래 우리 민족이 겪게 될 더 큰 비극과 희생은 누가 막아 줄 것인가? --- p.200 덜레스 국무 장관 방한 8월 5일, 덜레스 국무 장관이 서울에 도착하여 상호방위조약의 세부 내용을 조율하고 완성하였다. 8월 8일, 대통령 집무실에서 이승만이 증인으로 참석한 가운데 한국 변영태 외무장관과 미국 덜레스 장관의 서명으로 서울에서 방위조약을 가조인했다. 그런데 사실 회담 장소가 처음부터 서울로 합의된 것이 아니었다. 미국 덜레스는 당초 태평양의 중간 정도에 있는 섬을 회담 장소로 제안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전시 상황에서 한국을 떠날 수 없었고, 또 장관이 한국을 찾아주는 것이 상식이라고 여겨 한국 진해를 요구했다. 진해에서 최종적으로 서울로 결정되었으나 이승만 뜻대로 한국에서 회담이 개최된 것이다. 그런데 방위조약의 체결 자체도 한국으로선 기적적인 성과였지만, 한국에 방한한 덜레스는 미국 국무 장관인 자신이 약소국가에 직접 방문한 사실에도 스스로 큰 의미 부여를 했다. 8월 5일, 회담에 참석했던 올리버 고문이 이승만과 덜레스가 처음 만나는 상황을 기록했다. --- p.2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