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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장 존재로서의 포로 2장 장소로서의 수용소 3장 포로 재교육 4장 판문점과 포로 협상 5장 판문점과 DM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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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체를 살펴보면 붓 같은 필기구로 쓴 글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혈흔 같은 게 글자 주변에 묻어있어 혈서로 보인다. 우리 현대사의 한 순간에 그대로 멈춰버린 이미지. 이 소리 없는 아우성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이들은 어떻게 이 열차에 타게 됐을까?
한국전쟁 동안 포로로 잡힌 조선인민군 간호장교와 간호병은 모두 668명이다. 이들은 정전협정 이후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북한 송환을 선택했다. 이들은 ‘2부산(병원) 포로수용소’ 6수용동(2개 천막)에서 아동 25명(영유아 4명 포함)과 함께 집단 수용됐다. --- 「프롤로그」 중에서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포로수용소에서 17만여 명이 이런 카드에 등록됐다. 하지만 이 기본인적기록 카드에서 포로 특성을 규정하는 ‘반공포로’ 라든지 ‘친공포로’, ‘악질포로’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포로를 구분하는 이런 수식어는 언제, 누가, 왜 붙였는지, 한국전쟁기 포로라는 존재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보자. --- 「1장. 존재로서의 포로」 중에서 “그해 9월부터 12월까지 한국군과 미군 방첩대, 정보기관 요원이 귀환한 한국군 포로 약 1700명을 두 차례에 걸쳐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강도 높은 반공 사상 교육과 세뇌 프로그램이 병행되었다.” “교육 내용은 반공주의,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 개인의 자유 강조 등을 중심으로 구성했고, 실제로는 일방적인 세뇌와 정치 교화에 가까운 과정이었다. 한국전쟁기 유엔군의 포로 재교육은 단지 전쟁포로를 관리하는 차원을 넘어, 이념전과 심리전을 위한 실험장이자 정치적 도구로 활용한 셈이다.” --- 「3장. 포로 재교육」 중에서 1951년 7월부터 개성 내봉장에서 열린 정전회담은 보안 이슈와 한국군 억류 등 돌발 상황이 생기면서 전면 중단됐다. 그 뒤 양측은 새 협상 장소 협의를 실무 단위에서 진행했다. 황해도 개성시 널문리 판문점을 새 장소로 확정하고, 1951년 10월 11일 그곳에서 먼저 연락장교 회의를 열었다. 이어 10월 25일 제1차 판문점 정전회담 본회의가 열렸다. 2기 정전회담의 시작이다. --- 「4장. 판문점과 포로 협상」 중에서 하지만 본국 송환이나 남한 또는 북한 잔류를 선택하지 않은 미송환포로도 있었다. 미송환 조선인민군 포로 76명과 미송환 중국인민지원군 포로 12명 등 88명이다. 이들은 중립국송환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일단 중립국인 인도로 갔다. --- 「5장. 판문점과 DMZ」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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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는 먼저 한 장의 매우 강렬한 포로 이미지로 시작한다. 1953년 8월 6일, 즉 정전협정 체결 10일 뒤 미 해병 1사단 소속 나우프트 상사가 촬영한 사진이다. 앵글 속에 담긴, 미군 송환열차에 탄 조선인민군 여군 포로 모습은,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아아 할 전쟁의 비극을 그 어떤 피사체보다 절절하게 표출한다.
1부 ‘존재로서의 포로’는 이환천(Lee Hwan Chon)이라는 이름의 조선인민군 포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의 키는 5피트 10인치이고, 몸무게는 150파운드다. 고향은 평안남도 강동군 원탄면 문우리다. 고향 집에 처 이정숙과 자녀 2명을 두고 왔다. 종교는 천도교다. 75년 전 홍천 전선에서 포로가 된 한 조선인민군 병사의 인적사항을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자세히 알 수 있을까. 2부 ‘장소로서의 수용소’는 처음에 세상에서 가장 ‘스윗(sweet)’한 ‘홈(home)’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그러다가 정치교화와 세뇌공작, 폭력과 폭동, 살인 방화가 난무하는 ‘지옥도’(地獄島)를 펼친다. 3부 ‘포로 재교육’은 뜨개질, 목공, 철공, 도자기, 재봉 교육 등을 받는 포로들의 모습과 교육 이면에 있는 전향 공작, 이에 반발한 폭동 등이 어떻게 터져나왔는지를 생생한 사진과 영상으로 재현한다. 4부 ‘판문점과 포로 협상’은 1951년 7월 한국전쟁 정전회담 개시를 위해 유엔군과 공산군 측 연락장교가 모여든 개성시 내봉장의 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후 정전회담은 널문리에 세운 천막, 판문점으로 장소를 옮겨 계속된다. 이후 수백 차례의 회담 끝에 양측은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정전협정을 체결한다. 정전회담 주요 의제는 포로 처리 문제다. 회담 진행과 맞물려 포로수용소에서는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는다. 4부는 이처럼 판문점의 정전회담과 포로수용소의 대립을 두 축으로 전개한다. 5부 ‘판문점과 DMZ’는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조산리 359번지로 이전한 새 판문점 각 건물과 공동경비구역 배치도로 시작한다. 이어 정전협정 직후 설치된 비무장지대 식별 간판과 영어 중국어 한국어로 기재된 군사분계선 이미지 등이 나온다. 또한 판문점을 통해 본국으로 귀환하거나 제3국행을 선택한 포로들의 모습에서 이념 갈등과 폭력, 그리고 전쟁이 파괴한 공동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