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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탄생
이승원
휴머니스트 2005.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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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프롤로그. 학교 종이 땡,땡,땡

1. 입학시험-무시험에서 부정행위까지
2. 통학 길-학교 가는 길에 벌어진 에피소드들
3. 교과서와 수업시간-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배웠나?
4. 신체검사-위생과 단발
5. 성교육-사실과 구라의 경계
6. 운동회-근대적 스포츠의 탄생과 축제
7. 외국어 교육과 특목고-외국어만이 살길이다
8. 유학생-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 가다
9. 수학여행-국토를 발견하다
10. 학교의 안과 밖-먹물과 날라리의 세상살이
11. 학생운동-동맹휴학에서 단지동맹까지
12. 에필로그-빛나는 졸업장

저자 소개 1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가죽공예를 하며 마음을 추스른다. 그동안 100년 전 한국문학과 문화를 공부해 왔다. 지은 책으로 『사라진 직업의 역사』 『공방 예찬』 『조선신보, 제국과 식민의 교차로』 『나에겐 국경을 넘을 권리가 있다』 『저잣거리의 목소리들』 『소리가 만들어낸 근대의 풍경』 등이 있다. 정여울 작가의 『오직 나를 위한 미술관』 『가장 좋은 것을 너에게 줄게』 『내성적인 여행자』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빈센트 나의 빈센트』 『헤세로 가는 길』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등에 사진을 수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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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승원
인천대 강사. 인천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하였으며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그는 8여 년 동안 어지럽게 널려 있는 근대 초기의 각종 신문과 잡지를 찾고 읽고 정리하고 또 이를 바탕으로 여러 동학들과 함께 세미나를 진행해왔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100년 전 한국 사람들의 삶과 풍속 그리고 감각과 제도의 형성과정에 대한 연구에 열정을 쏟았다. 『학교의 탄생』은 그 성과를 담아낸 작품이다. 지은 책으로 『소리가 만들어낸 근대의 풍경』(2005)이 있고, 함께 쓴 책으로는 『철학극장, 욕망하는 영화기계』(2002), 『국민국가의 정치적 상상력』(2003), 『아브 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2004)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근대계몽기 서사물에 나타난 신체 인식과 그 형상화에 관한연구〉, 〈20세기 초 위생담론과 근대적 신체의 탄생〉, 〈다거점의 고향, 복수의 시공간―이용악론〉 외 다수가 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05년 04월 18일
쪽수, 무게, 크기
370쪽 | 624g | 153*224*30mm
ISBN13
9788958620402

출판사 리뷰

100년 전 학교의 풍경으로 본 근대의 일상
‘경쾌하고 발랄한’ 한국 근대의 고고학적 탐색
우리가 100년 전 학교의 풍경을 탐사하는 것은 한국 근대의 기원을 알기 위함이다. 또한 현재 우리의 몸 속 깊이 각인되어 있는 근대적 습속의 기원을 파헤쳐 보기 위함이기도 하다. 100년 전 학교는 단지 입시를 위한 교육기관이 아니었다. 근대 초기의 학교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려는 사람들의 욕망이 들끓었던 도가니였다.
100년 전 한국의 목표는 서구 문명의 수입을 통한 ‘부국강병’이었다. 부국강병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자주독립을 위해 학교는 우후죽순처럼 창설되었고, 근대식 학교는 온갖 이질적인 담론과 풍속들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학교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학생들을 교육함과 동시에 기존의 풍속과는 전혀 다른 서구적 풍속과 문화를 한국인들에게 제공하는 매개체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그렇기에 100년 전 학교의 풍경을 탐사하는 것은 때로는 굴절되고 때로는 왜곡된, 그리하여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인 한국 근대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과 맞물려 있다. 100년 전의 학교는 한국 근대를 다양한 시선에서 접근할 수 있는 프리즘이라 할 수 있다. 이 프리즘의 스펙트럼을 통해 한국 근대의 고고학적 탐색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100년 전 한국의 역동적인 풍경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속에서 발견한 100년 전의 학교의 모습은 무덤덤한 일상을 벗어나 다른 꿈을 꾸려는 욕망으로 가득 찬 나의 학창 시절과 겹쳐졌다. 100년 전의 학교는 서구로부터 유입된 문화와 풍속 그리고 제도들이 조선적 전통과 대결이 벌어진 빅뱅의 공간이었다. 그 폭발음 속에서 튕겨져 나온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바로, 지금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100년 전의 학교는 근대적 인간 만들기 프로젝트가 실험된 곳이지만, 또한 그곳은 골방에 유폐된 욕망들이 세상 밖으로 끝없이 흘러넘치는 역동적인 축제의 장이었고, 새로운 우정의 공간이었으며, 공생의 삶이 창조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 〈지은이의 말〉 중에서


학교 종이 땡 땡 땡! 어서 모이자 / 이 책의 특징 1
― 학교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00년 전,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한국을 침탈할 무렵, 오늘날과 같은 학교의 종소리는 울리기 시작했다. 그때의 종소리는 한국의 모든 청소년들에게 무사(武士)가 되라고 권했다. 공부도, 예술도 적과 싸우는 ‘무기’가 되어야 했다. 시대적 위기가 학교를 그렇게 만들었지만, 그 태생적 문제는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군사독재 시대를 거친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근대적 학교는 사회적 개인을 ‘길러내는’ 곳이다. 이 공간 안의 모든 것은 순위로 평가되기 일쑤다. 성적, 얼굴, 몸매, 싸움에도 순위가 매겨진다. 그 순위 안에서 학생들은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기성세대의 비뚤어진 문화를 모방해 어설픈 어른 흉내를 내기도 한다. 게다가 학교는 구성원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제도화했으며, 학생들은 그 구조 안에서 시간 규율에 훈련되고 길들여진다. 과연 무엇이 이런 문화를 만들어낸 것일까? 학교의 기원 속에 그 숨겨진 의미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아닐까?
『학교의 탄생』은 우리 근대의 기원을, 현재 우리의 몸 속 깊이 각인되어 있는 어떤 관념과 습속의 시작이 어떻게 만들졌는가?를 탐사한다. 이 책으로 말미암아 100년 전 학교가 어떻게 생겨나고 만들어졌으며, 그것이 어떻게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알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학생이 있어야 가르칠 것 아닌가. 그런데 수업을 들을 학생이 없었다. 서당이 아닌 신식 학교로 학생들이 앞다투어 몰려가지는 않았다. 학생이 없는데 입학시험이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학생들이 가끔 입학을 했지만 지금과 같은 어린 학생들이 아니었다. 상투 틀고, 갓 쓰고, 도포 입고, 장가가서 아이가 서넛 딸린 사람들이 학교에 들어왔다.
1885년에 설립된 배재학당의 경우 학생들을 시험을 통해 선발하기는커녕, 오히려 학생들에게 공책과 연필, 그리고 점심 값을 지불했다. 학생들은 돈을 받으면서 공부했다. 여학생 얻기는 더욱더 어려웠다. 그들은 귀하신 몸이었다. 1886년에 스크랜턴 부인이 설립한 이화학당은 학생 구하기가 힘들어 천연두에 걸려 광화문 밖에 내버린 아이들을 주어다가 치료를 해준 후 제자로 받아들였다. 학생이 귀했던 시대, 경쟁할 학생이 없었던 시대, ‘학생 품귀 현상’을 보였던 시대의 진기한 풍경이다.
고종의 교육조서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전국 곳곳에 공립?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한국 사람들도 신학문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일군의 아이들이 학교로 달려갔다. 대부분 평민들이었다. 나무장수, 농사꾼, 장사치, 신기료장수, 기생, 백정 등등. 거기에 양반의 자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근대 학교는 사농공상이 처음으로 한 공간에 총집합된 종합선물 세트였다.
학생 수가 늘어나고 신학문에 대한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학교들도 궤도를 수정한다. 입학시험을 실시한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국ㆍ영ㆍ수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능력평가제는 아니었다. 우선 학교의 등급에 따라 나이 제한을 두었다. ……그리고 시험을 보았다. 한문 강독과 한글 강독, 한문 글짓기와 한글 글짓기, 산술(수학), 체조였다.
― 『학교의 탄생』 본문 36~37쪽, 〈입학시험―무시험에서 부정행위까지〉 중에서


100년 전 학교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 이 책의 특징 2
― 미시적인 사건들의 연쇄

100년 전, 학교라는 공간에서는 갖가지 미세한 사건들이 물밀듯이 일어났다. 구시대의 선비와 전혀 다른 삶을 꿈꾸는 학생 사이의 갈등, 과거제도 폐지라는 날벼락을 맞은 조선의 선비들의 우울증, 서양인들에 대한 공포, 신분의 제약에서 풀려난 민중들의 희망, 서당과 훈장 선생님의 퇴출, 사춘기 학생들의 연애와 사랑, 외국어 열풍, 해외 유학의 욕망 등등. 학교를 둘러싼 무수한 관계들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고 있다. 왜 이런 사건들이 연쇄하게 되었을까? 당시의 학교는 지금과는 달리 혁명적인 공간이었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온갖 이질적인 담론과 풍속들이 교차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질적인 것들과 익숙한 것들이 교차하는 학교에서, 우리의 학생들은 입학시험에서부터 통학 길, 성교육, 운동회, 외국어 공부, 해외 유학, 학생운동 등을 경험하면서 문명과 만나게 된다.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가꾸어나갔던 것일까?

……그렇다면 100년 전 이상적인 연애와 결혼의 표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두 학생이 있다.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1906)에 등장하는 학생들이다. 남학생은 구완서이고 여학생은 김옥련이다. 이 둘은 미국 유학생이다. 외국에서 어렵사리 공부를 마친 이들은 어느덧 서로를 자신들의 반려자로 생각하고 결혼할 것을 다짐한다. 그런데 100년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옥련은 자신의 아버지 김관일의 의사와 상관없이 구완서와의 결혼을 결정한다. 구완서는 옥련과 김관일과 모여 앉아 자신들의 결혼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상한 일은 아버지를 앞에 앉혀둔 이들은 자신들의 결혼에 대한 얘기를 영어로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아버지는 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지 알 수 없었다. 부모의 뜻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뜻에 따라 결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그들의 의지는 언어까지 바꿔서 말할 정도로 구시대적 결혼제도에 대한 강한 저항감을 표출한다.
옥련과 구완서의 결혼관은 단순히 구습에 대한 반대가 아닌, 각자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최적의 배우자를 선택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이들의 결혼은 서로에 대한 낭만적 사랑에서 기반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이끌고 갈 동반자를 구하기 방법에 불과하다. 동지적 결합이자 일종의 계약이다. 옥련이는 “조선 부인 교육할 마음이 간절하여 구씨와 혼인언약을” 맺고, 구완서도 한국을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으로 옥련과 혼인언약을 한다. 자신들의 결혼에 대한 문제보다 국가를 향한 열정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옥련의 모습은 상식의 차원을 넘어 기이한 사명감으로까지 느껴진다. 비록 구완서와 김옥련의 이런 모습이 과장되어 보일지라도 국가에 대한 열정으로 표백되는 순간 아무런 문제도 없는, 그저 지고지순한 애국의 열정으로 비춰질 뿐이다. 옥련과 구완서의 결혼관은 ‘개인’보다 ‘국가’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시대, 개인의 모든 열정을 국가를 위해 헌납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현실 속에서는 참으로 모범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 『학교의 탄생』 본문 161~162쪽, 〈성교육―사실과 ‘구라’의 경계〉 중에서


최초 씨 : 배재학당에 들어갔더니 대부분 학생들이 상투를 잘랐어. 단발하고 다닌 거지. 그때는 신식 학생이면 으레 머리카락을 짧게 깎았으니까. 난 그때만 해도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었지. 신학교에 들어갔고 신학생들과 어울려 신학문을 배우려다 보니 나도 20년 가까이 고이 길렀던 머리카락을 싹둑 잘랐지. 그 허전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네. 찬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로 스멀스멀 지나가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지 않았겠나. 부모님 얼굴도 떠오르고…….
퉁명 씨 : 그거야 다들 한 번쯤 겪는 일이었죠. 조선에 태어나서 개화풍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유학 씨 : 그렇죠. 그렇지만 처음 단발했을 때 느낌은 아주 묘했어요. 죄인이 됐구나 싶다가도 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느낌이었죠. 그건 그렇고, 독학 선생은 혼자 어떻게 공부를 했습니까?
독학 씨 : 저야 선생님들처럼 정식 코스를 밟은 건 아니었죠. 더구나 그럴 형편도 아니었구요. 지금으로부터 27년 전, 1900년이군요. 그때 전 괴나리봇짐 하나만 달랑 메고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가고 있었습니다. 서울로 가던 길에 수원에 잠시 들렀습죠. 거기에 화성학교라고 있었는데, 지나가다가 우연히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장면을 봤지요. 깜짝 놀랐죠. 선생이 칠판에다 분필로 1, 2, 3 등 서양 숫자를 쓰지 않았겠습니까. 그러고는 더하기에 빼기에 하더군요. 무척이나 신기해 보였습죠. 한참 보다가 옳거니 했지 않았겠습니까. 야! 저게 조선의 셈보다 났구나! 당장에 저 서양식 셈을 배워야겠구나. 그렇게 저는 신학문과 첫 대면을 했더랍니다.
퉁명 씨 :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러십니까. 그럼 그때까지 1, 2, 3도 모르셨단 말입니까?
독학 씨 : 촌구석에서 자란 내가 뭘 알았겠소. 퉁명 선생이야 도시에서 자랐고 일찍 개화풍을 만났겠지만, 나야 그럴 수가 있었겠소? 매일 하던 일이라곤 농사짓고 짚신 꼬는 일밖엔 없었지 않았겠소. 그래, 그 서양식 셈을 보고선 신학문을 공부하겠다고 맘을 다잡았지요. 그때 마침, 이름을 잊었지만, 우연하게도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온 친구를 만났습죠. 그 친구에게 서양식 수학을 배웠지요. 덕분에 서양 수학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구요. 그러고는 곧 광성실업학교 야학부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일본어와 수학을 배웠지만, 일어는 포기하고 수학만 열심히 했답니다.
최초 씨 : 수학이 그렇게 좋았습니까? 저도 예전에 자퇴 선생에게 수학을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만, 뭐 잘해서 가르친 건 아닙니다. 그때가 일본 유학 시절이었는데, 일본 학교 입학시험 과목이 영어?일어?수학?한문?지리?역사였습니다. 그 중에서 영어와 일어, 그리고 수학을 중점적으로 공부했었지요. 그래서 저도 수학은 좀 하는 편이랍니다.
독학 씨 : 다른 신학문은 제 흥미를 별로 끌지 못했습죠. 그런데 수학은 무척이나 재미있더군요. 야학부를 졸업하고는 유일선 씨가 경영하던 정리사(精理舍)에 들어가 3년 동안 공부를 했습죠. 그 학교는 정신과(精神科)와 이과(理科)로 교과과목이 나눠져 있었습니다. 정신과에서는 심리?윤리?논리 등을 배웠고, 이과에서는 수학?물리?화학 등을 배웠죠. 여러 분야를 배웠지만 역시 수학이 최고였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다 보니 벌써 제가 학교를 경영하는 사람이 됐지요. 거기다 책도 쓰지 않았습니까. 참, 번역을 먼저 했군요. 찰스 스미스란 사람이 쓴 책인데, 영어를 몰라 일본판을 중역한 건데 『근세산술』(상?하)이지요. 그 책을 번역하면서 또 많은 걸 배웠습니다. 결국, 아마 1914년이지요, 아예 제가 책을 써버렸죠. 그것도 수학책을. 1914년에 『인수분해법』을, 그리고 1919년에 『중등교육산술교과서』를 썼지요. 자랑 같지만 18,000부나 출판했습니다.
― 『학교의 탄생』 본문 38~40쪽, 『별곤건』(1927년) 기고글 중에서


100년 전 학교는 빅뱅의 공간이었다 / 이 책의 특징 4
― 학교는 근대 문화와 조선 전통의 격전지

100년 전, 한국에서 일어난 근대 계몽은 ‘교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무지한 인민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태어났다고 하는 계몽 교사들의 전성시대가 100년 전 한국이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낡은 삶과 습속’에 대한 일대 전투를 벌였다. 계몽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은 일상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100년 전의 근대식 학교는 계몽가들의 꿈과 희망이 총집합된 공간이었다. 학교에서는 서구로부터 유입된 각종 근대적 문화와 풍속들이 조선적 전통과 일대 대결을 벌이게 된다. 학교를 통해 기독교가 전파되고, 근대식 스포츠와 놀이문화가 양산되고, 새로운 연애관과 결혼관이 성립되었으며, 서구식 제도가 일상화 되었다. 말하자면 학교는 근대인을 길러내기 위하 최첨단의 실험실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실험된 다채로운 ‘근대적 인간 만들기 프로젝트’는 시대와 이데올로기의 변화에 발맞춰 좀더 세련되게 재정비되어 ‘지금-여기’의 삶게까지 강력한 촉수를 뻗고 있다.

……500년 동안 지속되었던 유교문화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수업은 옛것과 새것의 아슬아슬한 공존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옛 학문과 새로운 학문이 공존했지만, 옛 학문을 담는 ‘그릇’은 새것이어야 했다. 어학분야에서는 한문과 한글을 동시에 가르쳤다. 모든 인민이 고른 지식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문자해독이 필수적인 문제였다. 이에 따라 한글의 위상은 전 시대보다 한층 높아진다. 한문은 배우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전 시대에 비해 그 중요도가 떨어지는 했지만, 한문 교육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교과서 또한 순 한글보다는 국한문 혼용을 기본으로 제작되었다. ……전 시대의 수업과 달라진 것은 강의 수용자의 인적 구성이다. 양반 자제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던 배움의 기회는 혁명적으로 확장되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학교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둘째는 강의공간의 변화다. 칠판과 교탁과 책상과 의자가 구들장과 좌탁을 대체했다. 이는 확실히 전 시대와는 구별되는 수업방식이다. 학생들보다 더 높은 위치의 강단에서 수업하는 교사를 중심으로 학생들의 시선은 모두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꼿꼿한 자세로 의자에 앉은 학생들은 선생이 서 있는 정면만 바라보아야 했다. 학생들의 시선은 분산될 수 없었다. 그럼으로써 선생의 권위는 더더욱 높아졌다. 즉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이분법으로 교실은 정확하게 구분된다. 이로 인해 교사와 학생이라는 신분은 철저하게 구별되고, 양자 사이에 건널 수 없는 바리케이트가 단단하게 쌓아올려진다. ― 『학교의 탄생』 본문 98~99쪽, 〈교과서와 수업시간―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배웠나〉 중에서


100년 전의 신문ㆍ잡지ㆍ소설이 꿈틀거리다 / 이 책의 특징 3
― 8년 동안 읽어낸 근대 초기의 신문과 잡지 그리고 소설들

이 책의 지은이는 8여 년 동안 어지럽게 널려 있는 근대 초기의 각종 신문과 잡지를 찾고 읽고 정리하고 또 이를 바탕으로 여러 동학들과 함께 세미나를 진행해왔다. 지금은 한발 더 나아가 정교(鄭喬, 1856∼1925)가 1864년(고종 1)부터 191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이 망할 때까지 47년 간의 역사를 강목체(綱目體)로 기술한 책인 『대한계년사』(전9권)를 읽고 정리하고 연구하고 있다. 8년 동안 각종 자료와 ‘뒹굴면서’ 100년 전 한국 사람들의 삶과 풍속 그리고 감각과 제도의 형성과정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집필하였다.

새로운 사우(師友)들을 만났다. 그들은 내 학교의 선후배이기도 했고, 다른 학교 출신의 선후배들이기도 했다. 그것도 아니면 정체불명의 아웃사이더들도 가끔 있었다. 그들과 처음 함께 읽기 시작한 텍스트는 100년 전 창간된 〈대한매일신보〉였다. 도대체 무슨 뜻인지도, 어떠한 맥락에서 나온 기사인지도 가늠하지 못하면서 한 1년간을 보냈다. 신문 읽기는 매우 지난하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신문 읽기의 힘겨움을 상쇄시켜준 건 다름 아닌 함께 공부한 사우들의 열정과 독특한 관계맺음이었다. 나보다 10년 이상의 사람들도 있었고, 어린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수직적이거나 일방향적인 관계로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나 선생이었고 학생이었고 그리고 친구였다.
사우들과 함께 근대계몽기(1894~1910)의 신문들, 즉 〈독립신문〉, 〈매일신문〉, 그리고 〈대한매일신보〉와 〈만세보〉등을 읽어 나갔다. 100년 전 신문과 잡지를 읽다보면 날 것 같이 꿈틀대는 언어 속에서 길을 헤매기가 일쑤였다. 한국의 근대가 어떤 방식으로 성립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 당시의 신문과 잡지를 읽기 시작했지만, 그것들은 튼튼한 빗장을 걸어 잠그고 좀처럼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신문 읽기가 2년 정도에 접어들었을 때 100년 전 텍스트들은 내게 소곤거리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 『학교의 탄생』 본문 7~8쪽, 〈지은이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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