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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실마리
첫째 이야기_황해의 탄생 둘째 이야기_한반도의 원주민 셋째 이야기_인류 문화의 발전 넷째 이야기_한반도의 문화 다섯째 이야기_졸본성 여섯째 이야기_므음드레 일곱째 이야기_새 터전을 찾아서 여덟째 이야기_낙랑성 아홉째 이야기_위례성 열째 이야기_미추홀 열한째 이야기_원양국 열두째 이야기_백제의 성립 열셋째 이야기_고구려의 융성 열넷째 이야기_삼국의 각축 열다섯째 이야기_한반도의 통일 열여섯째 이야기_경기만의 번성 열일곱째 이야기_고려의 성립 열여덟째 이야기_거란과의 전쟁 열아홉째 이야기_몽골의 흥기 스무째 이야기_몽골의 침입 스물한째 이야기_다루가치 탈타아 스물두째 이야기_경기만의 교역 스물셋째 이야기_왜구의 침입 스물넷째 이야기_조선 왕조의 성립 스물다섯째 이야기_성리학의 정착 스물여섯째 이야기_훈민정음의 탄생 스물일곱째 이야기_탐험의 시대 스물여덟째 이야기_임진왜란 스물아홉째 이야기_병자호란 서른째 이야기_병인양요 서른한째 이야기_광성보 서른두째 이야기_개항 서른셋째 이야기_임오군란 서른넷째 이야기_센자이마루 서른다섯째 이야기_셰챵 바늘 서른여섯째 이야기_동학란 서른일곱째 이야기_청일전쟁 서른여덟째 이야기_갑오경장 서른아홉째 이야기_삼국 간섭 마흔째 이야기_약대인 마흔한째 이야기_을미사변 |
BOK,KOH-ILL,卜鉅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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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내 얼굴을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와 자식들은 어쩔 수 없지만, 아내는 얼굴도 떠올릴 자격이 없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서, 그는 서해 바다를 대신 떠올렸다. ‘황해’라는 본 이름이 드러내듯, 깊지도 않고 차갑도록 파랗지도 않은 그저 뿌연 빛깔의 바다를, 그의 몸속에 든 그 부드럽고 너그러운 바다를 떠올렸다
--- p.12 (황해의) 동해안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단연 경기만(京畿灣)이다. 크고 작은 섬들이 모여 있고, 한반도 중부의 큰 물길들이 - 예성강(禮成江), 임진강(臨津江), 한강(漢江), 삽교천(揷橋川)이 - 삼면에서 흘러든다. 그 물길들을 따라 평야가 펼쳐져서 물산이 풍부하다. 자연히, 좋은 항구들도 많아서, 교류와 교역의 중심이 되었다. 고려가 개경(開京)을 도읍으로 삼자, 경기만은 번창하기 시작했다. 조선이 한성(漢城)을 수도로 삼았으므로, 경기만의 번창은 이어졌다. 근대에 서양 세력이 밀려오고 조선이 제물포(濟物浦)를 개항장으로 삼자, 경기만은 세계 역사의 숨 가쁜 현장이 되었다. --- pp.16-17 … 중국 문명은 다른 문명들보다 훨씬 늦게 일어났다. 현생 인류가 동아프리카에서 북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으므로, 인류 문명은 자연스럽게 서남아시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먼저 발전했고 둘레로 퍼졌다. 그래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문명은 인류 문명의 주변부였다. 문명의 중심부는 늘 메소포타미아의 문명과 그것을 이어받은 문명들이었다. 그런 상황은 석기시대 이래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다. 한반도는 줄곧 중국 문명의 주변부였다. 즉 문명의 주변부의 주변부였다. 그것이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를 규정한 근본적 조건이었다. 한반도의 대한민국은 그런 근본적 조건을 뛰어넘어 마침내 21세기에 통합된 인류 문명의 중심부로 진입했다. 현실에선 나올 법하지 않은 동화 같은 그 일을 찬찬히 살피는 것이 이 이야기의 주제다. --- pp.29-30 “전하, 여기 보소서.” 그녀는 돌아서서 너럭바위의 위쪽을 가리켰다. “저기 ‘늑대바위’ 옆에 므음드레가 피었지요?” ‘늑대바위’ 아래쪽에 깊게 파인 부분이 있어서 거기 흙이 좀 모였는데, 그 좁은 터에 민들레 두 송이가 피어 있었다. 좀 작은 송이는 이제 꽃이 활짝 피었지만, 큰 송이는 이미 쇠어 씨를 날리고 있었다. “전하,” 그녀는 간곡하게 말했다. “풀도 저렇게 씨를 퍼뜨립니다. 씨가 널리 퍼지라고, 깃털들이 달렸습니다. 한데 모여 오글오글 산다면, 제대로 살겠습니까?” 추모는 유난히 작은 므음드레 송이들을 처연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 p.59 온조는 여드레 뒤에 돌아왔다. 그가 내놓은 목패엔 ‘미추홀 성주 고비류(彌鄒忽 城主 高沸流)’라고 씌어 있었다. … 떠나기 전날 밤, 비류는 어머니에게 생각을 밝혔다. 이제 여기 위례성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겠노라고, 미추홀에 뼈를 묻겠노라고. 어머니 생신에만 위례성을 찾겠노라고. 아버지 제사도 미추홀에서 지내겠노라고. 소서노는 그런 아들이 대견스러웠다. 그녀는 자신이 추모왕에게 했던 므음드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새로운 땅에서 자라나라고 축복해주었다. --- pp.110-111 역사적으로, 이 시기는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옮겨가는 시기였다. 수렵-채취 사회나 유목 사회는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늘 낯선 상황에서 활동해야 했다. 따라서 종족이나 씨족의 지도자는 건장한 성인이어야 했고, 지도자의 지위는 형제 상속을 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농경 사회에선 지도자의 어린 자식이 자라나도록 기다릴 수 있었다. 그래서 부자 상속이 점차 대안이 되었다. 일정한 지역에 자리 잡은 농경 사회에선 그래서 형제 상속의 풍습이 부자 상속의 욕망과 부딪치는 경우들이 흔했다 고비리국이 마한의 국방에서 중요한 변경 국가였고 말갈군이 실제로 침입했던 터라, 신지 집안의 분열은 모두에게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인근 국가들의 신지들이 모여서 사태를 논의했다. ... 자신의 사위 일인지라 나서지 않던 국왕은 여론이 호의적이 되자, 온조를 고비리국 신지에 임명했다. 그리고 국명을 고쳐, 백제국(百濟國)이라 칭하도록 했다. ‘백 개의 나루를 가진 나라’라는 뜻이었다. --- pp.144-145 조선 사회에선 노비들이 많았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배계급인 사족은 노동을 전혀 하지 않아도 노비들의 노동으로 유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고, 관노비들이 없으면, 중앙과 지방의 행정 기구가 마비되었다. 더구나 조선 사회에선 노비들이 자신들의 실질적 가족을 유지할 길이 없었다. 노비들의 신분은 그들의 자식들에게 세습되었고 천인 신분에서 벗어나는 속량(贖良)의 길이 실질적으로 막혔었다. 그래서 조선 사회는 ‘진정한 노예 사회’를 넘어 ‘완전한 노예 사회(complete slave society)’가 되었다. --- p.239 결정적 요인은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압도하고 제해권을 장악했다는 사정이었다. 조선 수군의 공격을 피하면서 조선의 일본군에 보급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졌다. 아울러, 조선 수군의 우세는 서해를 통해서 북쪽으로 진출한 일본군 주력에 직접 보급하는 길을 막았다. 이런 상황은 히데요시를 비롯한 일본 지도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제해권을 잃는 상황은 특히 뜻밖이어서, 일본으로선 대처하기가 힘들었다. 그때까지 해전에선 거의 언제나 왜구가 명군과 조선군을 압도했었다. 조선 수군의 승리는 온전히 이순신의 공이었다. 그의 고결한 인품과 빼어난 지도력은 세계 해전의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승리를 이루었다. 이순신의 높은 인품을 증언하는 일화들은 많다. 아마도 가장 시사적인 것은 조선을 구원하러 온 명의 수군 장수 진인(陳璘)이 그를 흠모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 p.275 당시 일본 사람들은 “중국에 몰려드는 이슬이 일본에 서리가 되어 내리지 않으리라고 어찌 알겠는가?”라고 걱정했다. 그런 걱정은 일본이 유럽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근대화를 시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지식인들이 먼 대륙에서 몰려온 세력이 일으킨 그 전쟁의 뜻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던 자취는 없다. 청과 빈번하고 정기적인 사신 교류를 가졌지만, 『헌종실록』 9년 3월 임신일조엔 “돌아온 동지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를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으로 불러서 보았다”는 기록만 달랑 나온다. 남경조약이 체결된 해에 북경에 다녀온 사신들이 중국 대륙을 흔든 사건에 대해 전혀 보고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런 지적 폐쇄성은 정책적 폐쇄성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서양 세력과의 교류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쇄국이 조선의 기본 정책이 되었다. --- p.303-304 제물포의 개항은 미추홀의 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비운의 고구려 왕자 비류가 정착한 뒤 2,000년 동안, 미추홀은 실질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황해에서 가장 복잡한 지형인 경기만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았지만, 미추홀이 중심적 역할을 한 적은 없었다. 남만주에서 내려온 고구려 이민들이 정착한 시기엔 한강 유역의 위례성에 밀렸고, 고구려 시대와 통일신라 시대엔 바로 남쪽 당항성이 군사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요지였다. 고려 시대엔 도읍 개경의 외항인 예성항이 중심이었다.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나 군사적 요지는 섬인 강화도였다. 이제 문득 제물포가 경기만의 중심이 되었다.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아주 큰 서해에서도 수심이 얕아 큰 배들이 드나드는 항구로선 적합하지 않은 포구가 외국에 열린 항구가 되면서, 국제적 중요성을 지닌 곳으로 바뀌었다. 미추홀의 제물포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 pp.341-3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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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셕과 월례 일가의 제물포와 인천을 배경으로 한 가족사!
역사의 흐름에 휩쓸린 인간들의 분투가 아름답고 가슴 시리게 그려진 소설! 그 도도한 역사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붕괴의 과정을 차례로 거치고 일제강점기의 가혹한 시절을 겪은 후, 전쟁의 폐허 속에서 순식간에 경제 강국으로 다시 우뚝 서는 근대화의 역사에까지 가 닿는다. 그사이 만석과 월례의 후손들은 역사의 격랑 속에 흩어지고 재회하고 때로 얄궂은 운명의 장난조차도 담담히 받아들이며 인천에서 삶을 이어간다. 개항과 일제강점기, 해방정국과 한국전쟁을 모두 겪은 후 다시 발전해 나가는 대한민국의 운명을 몸소 겪고 지켜보는 이 일가의 가족사는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근원을 새삼 탐색하게 만든다. 황해의 탄생이라는 빅 히스토리에서부터 대한민국의 기틀이 마련된 근현대까지, 잠시 쉴 틈 없을 정도로 몰아치는 한반도의 역사를 일람하다 보면, 저절로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 흐름에 온전히 몸을 내맡기는 독서를 하다 보면, 오늘 여기의 우리가 역사 앞에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겸허해지면서, 동시에 그런 거대한 운명적 흐름에 때론 함께 따라 흐르면서, 때론 강인한 의지로 맞서면서, 때론 불굴의 각오와 결단으로 운명을 새로 쓰면서 이어져 온 인간의 위대함에 새삼스러운 경의도 느끼게 된다. 역사와 인간, 거시사와 미시사, 운명과 의지의 얽히고 충돌하는 감각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 이 소설이 지닌 특유의 매력이다. 문제적 역사소설과 과학소설을 꾸준히 발표해 온 복거일 작가는 우리 역사의 통사적 흐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남다른 통찰을 선보일 뿐 아니라, 개별 등장인물이 등장할 때는 의식의 흐름의 방식을 차용하고 당대의 실제 발음까지 확인하여 삶의 구체성까지 생생하게 드러내는 솜씨를 보여준다. 오랜 작품 활동의 구력이 온전히 담긴 장편소설이다. 스승 고 김현 선생에게 이 작품을 헌정한 복거일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스승이 해준 이야기를 언급한다. “복 형, 소설은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소. 작가에겐 버릴 것이 없소.” 이 작품이 그러한 결실이다. 소설가로서 복거일 작가가 버릴 것 없이 모든 것을 담아낸 기념비적 저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