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ㅣ들어가며ㅣ _ 9
첫 번째 우물 말이 통하는 것은 힘들다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 _ 13 두 번째 우물 새로 읽어 새로 쓰기, 그런 다음 또 새로 읽어 새로 쓰기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_ 29 세 번째 우물 책을 읽듯 세계를 읽으려고 했으나 『바벨의 도서관』 _ 47 네 번째 우물 번역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아베로에스의 모색』 _ 65 다섯 번째 우물 가능성이 우글대는 미로 속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이 있는 정원』 _ 83 여섯 번째 우물 불확실성을 떠안기 『바빌로니아의 복권』 _ 101 일곱 번째 우물 기억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 『기억의 천재 푸네스』 _ 119 여덟 번째 우물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엠마 순스』 _ 137 아홉 번째 우물 타자 안에 있는 나, 내 안에 있는 타자 『알모타심에게 다가가기』 _ 155 열 번째 우물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그리고 희망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_ 171 열한 번째 우물 불에 타지 않는 꿈 『원형의 폐허들』 _ 195 ㅣ나가며ㅣ _ 211 |
신우승의 다른 상품
|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작품을 읽는다는 것이 작품을 구성하는 기호만을 소리 내어 읽음을 뜻하지 않음은 자명하다. 이제 막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어린아이가 보르헤스의 소설을 큰 소리로 읽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진정한 ‘작품 읽기’가 아니라는 점을 안다.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작품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는 것을 뜻하며, 그 ‘무언가’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 독자가 작품에서 읽어내고자 하는 무언가를 작가의 의도라고 이해한다. 독자는 작품을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독자는 작가가 작품을 통해 의도하는 바를 임의적 개입이나 주관적 판단 없이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포착해야 하는 의무를 진다. 예컨대 현진건은 「운수 좋은 날」을 통해 일제 치하에서 조선 민중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사는지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자 했다. 이것이 현진건의 의도라고 할 때, 「운수 좋은 날」을 읽고 나서 ‘김 첨지는 가정 폭력범인데? 죽은 아내의 따귀를 때려?’라는 반응을 보인다면 이 반응은 작가의 의도를 포착하지 못한, 따라서 작품을 잘못 읽는 행위에 해당한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작가의 의도 파악을 작품 읽기의 핵심으로 간주하는 일은 독서의 능동성을 약화하고, 작품에 대한 건전한 평가를 차단하며, 새로운 가치관을 통한 작품의 다각적 확장을 막지 않는가? 작가의 의도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 자신의 입장에서 작품을 새로이 읽는 일은 작가의 의도를 포착하는 일 이상으로 중요하며, 이렇게 새로이 읽을 때 원래의 작품은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나게 된다.” --- 「두 번째 우물, ‘새로 읽어 새로 쓰기, 그런 다음 또 새로 읽어 새로 쓰기’의 ‘독법 1’」 중에서 “삼인칭이었던 소설의 화자는 소설의 말미에서 갑자기 보르헤스로 바뀐다. 보르헤스는 자신도 아베로에스와 다를 바 없다고 고백한다. 아베로에스라는 이슬람 철학자는 그리스를 모르면서도 그리스 철학 문헌을 번역하고자 했고, 보르헤스라는 아르헨티나 소설가는 이슬람도 모르고 다른 시대에 속하면서도 아베로에스를 이해하고자 한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속한 세계에 머무르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속하지 않은 세계를 탐색한다. 설령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하나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자 하는 이러한 모색이 바로 ‘아베로에스의 모색’이고, 이 이 모색이야말로 시의 본질, 은유의 본질, 번역의 본질이다. 이 모색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다. 보르헤스는 아베로에스의 오역을 보고 아베로에스가 처한 상황을 떠올려 이 소설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보르헤스 자신이 말하듯, 보르헤스가 아베로에스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이 작품이 나를 비웃고 있다는 느낌”(130쪽)을 받으면서도, “짧은 글 몇 개 이외의 다른 자료”(130쪽)만으로 어떻게든 아베로에스를 그리려 했던 보르헤스의 시도에는 분명히 가치가 있으며, 이 시도 자체가 오늘날 아베로에스를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게 한다. 다른 세계에 있는 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고 시도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듯, 은유와 번역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그 세계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 반복하여 말하지만, 오역은 비웃음거리가 아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소설이야말로 아베로에스의 오역이 있었기에 쓰일 수 있었다.” --- 「네 번째 우물, ‘번역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의 ‘독법 2’」 중에서 “나에게 해를 가한 사람에게 사적으로 복수할 수도 있고, 공적 처벌이 이루어지도록 요청할 수도 있다. 「엠마 순스」의 엠마 순스와 [존 윅](2014)의 존 윅은 전자를 택하며, [장화홍련전]의 장화와 홍련은 후자를 택한다. 무엇이 더 나은 선택지인가? 예) - 내가 보기에는 장화와 홍련의 선택지가 더 낫다. 왜냐하면 사적 복수에는 공적 처벌에 수반되는 객관적 진상 규명의 과정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 내가 보기에는 (엠마와 존/장화와 홍련)의 선택지가 더 낫다. 왜냐하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때문이다.” --- 「여덟 번째 우물,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의 ‘확장’」 중에서 “소설가의 존재는 소설의 존재에 의존하고, 소설의 존재는 소설가의 존재에 의존한다. 앨리스의 존재는 붉은 왕의 존재에 의존하고, 붉은 왕의 존재는 앨리스의 존재에 의존한다. 「원형의 폐허들」은 존재자의 존재가 가능한 것은 존재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상호 관입’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렇듯 상호 관입하는 항에 부정적인 것을 넣어보자. 예컨대 사기 행위의 존재는 사기꾼의 존재에 의존하고, 사기꾼의 존재는 사기 행위의 존재에 의존한다. 이렇게 부정적인 순환 내지 상호 관입은 어떻게 깨뜨릴 수 있는가? 긍정적인 것들 간의 상호 관입은 허용하면서 부정적인 것들 간의 상호 관입은 허용하지 않을 방책이 있는가?” --- 「열한 번째 우물, ‘불에 타지 않는 꿈’의 ‘심화 질문’」 중에서 |
|
도서출판 b의 새로운 시리즈: b-SIDE
이 책을 첫 책으로 하여, 도서출판 b는 새로운 문고판 시리즈를 내놓게 되었다. 이 시리즈는 (나이가 아니라) 생각이 젊은 작가(비평가, 연구자, 에세이스트, 번역가 등 누구나)가 자신이 천착하고 관심을 가진 주제를 많이 길지 않은 호흡으로 펼쳐놓는 저서 시리즈다. 그동안 한국의 인문학 저서 시장은 대학교수들이 중심이 된 ‘학술’ 분야가 한 편, 대중적 지식 커뮤니케이션이 중심이 된 ‘대중 교양’ 분야가 한 편을 이뤄왔다. 하지만 이 새로운 시리즈는 ‘학술’이면서도 난해하지 않고, 논문 형식을 피한, ‘대중 교양’이면서도 학문적 바탕이 탄탄하고, 도발적이면서 혁신적인 저서를 지향한다. 누구나에게 쉽게 말을 걸고 있지만, 그 내용은 소화 잘되는 ‘쉬운 인문학’이 아닌, 지금껏 흔히 본 적 없는 주장을 담은, 작가의 인장이 박힌, 주류 학계에서 출판되기 쉽지 않을 수 있는, 하지만 글의 깊이는 수준급인, 그런 글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시리즈의 저자들은 대학과 텔레비전과 유튜브에서 ‘잘 나가는’ 명사들은 아닐 수 있지만, 자기 분야에서 자기만의 목소리를 갖고 있는,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작가들이다. 이 책에 이어서 김홍식의 「초월신경증」, 나익주의 「세상은 은유다」가 발간 예정이다. 고심해서 지은 이 시리즈의 이름은 ‘b-SIDE’이다. ‘b-SIDE’는 레코드나 테이프의 뒷면이다. 주력하는 히트곡은 주로 A-SIDE에 들어간다. 하지만 우리는 b-SIDE에 담긴, 알려지지 않은 명곡, 모두가 흥얼거리지는 않지만 누구에게는 주옥같은 노래에 주목하고 싶다. b-SIDE는 영어 단어 ‘beside’의 발음과도 같다. ‘beside’는 ‘옆으로 비켜나 있는 상태’를 뜻한다. 이는 중심보다는 주변, 주류보다는 비주류, 메인스트림보다는 언더독의 목소리와 시선과 사유를 담고 싶은 이 시리즈와도 통한다. 그래서 다시, 이 ‘b-SIDE’ 시리즈는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 형식, 자신의 내용을 맘껏 발산하고 싶은 모든 작가들에게 열려 있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저자의 말 “보르헤스의 작품을 해설하면서 내가 원칙으로 삼은 것이 세 가지 있다. 하나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겠다는 원칙이다. 해설자가 보르헤스를 아무리 잘 이해하더라도 그 이해를 독자에게 전달하지 못하면 나는 그 이해에 어떤 쓸모가 있는지 모르겠다. 다른 하나는 작품 안에 갇히지 않겠다는 원칙이다. 어떤 작품을 그 작품 내적으로 읽어내는 데에도 가치가 있겠으나 그보다 나는 그 작품을 통해 세계를 새로이 읽는 데 더 큰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마지막 하나는 정합성과 체계성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원칙이다. 난해한 작품에 대한 많은 글들이 특정한 논제를 작품에서 추출하여 과감하게 제시하는 것을 꺼리는 편인 듯하다. 나는 각 작품에서 논제를 하나 뽑아 작품 내 다른 요소가 그 논제 아래 수렴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각 장은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도 해설을 읽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작품 요약’에 줄거리를 간략히 서술해 두었다. 본격적인 해설 내지 ‘독법’은 둘로 나뉜다.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는 없으며, 흐름상 적절한 곳에서 분량을 나누었다. 그다음에는 ‘확장’ 항목이 있다. 보르헤스 작품을 내가 제시한 논제로 읽었을 때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다시 읽을 수 있는지를 보이는 예제에 해당한다. 각 장의 맨 끝에는 ‘심화 질문’이 있다. 거기까지 읽었을 때 떠오를 만한 질문을 하나 제시하여 독자의 생각의 흐름이 계속 이어지기를 의도했다. 위에서 말했듯 나는 무엇보다도 이 책이 재미있게 읽히기를 바란다. 엄숙주의는 내가 딱 싫어하는 것이다.” (‘들어가며’ 중) - “철학 텍스트 번역자에게도 말할 것이 있다. 학위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번역에 바로 진입하는 것은 대단히 무책임한 태도이다. 자신의 원고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여 날카로운 피드백을 받는 과정을, 자신의 나쁜 습관을 바로잡고 한국어 실력을 정교화하는 과정을 적어도 몇 년은 거쳐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 철학 전공자만 있어서는 안 된다. 많은 수의 철학 전공자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 자체를 상상하지 못하지만 그들은 출판 편집자에게 배워야 한다. 한국 철학계에서는 번역의 중요성이 간과되고 있다고 걱정하는 이들조차 막상 번역을 배우려고는 하지 않는다. 번역은 기술이며, 기술에는 습득이 필요하다. 이 기술을 서로 공유하면서 갈고닦는 모임이 생기기를 바란다. 재단 단위의 지원이 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나가며’ 중) “단 하나의 방식으로만 해석할 수 있는 작품보다는 다양한 방식의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 더 예술적으로 가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해석이 여럿 성립하는 데는 조건이 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러 개의 해석이 있으려면 하나하나의 해석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명료한 해석 하나를 획득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보르헤스의 소설을 읽고 뿌연 느낌을 받거나 몇몇 문장에 꽂히는 것은 해석이 아니다. 하나의 관점에서 선명하게 쓰인 해석이 있어야 이후 해석의 복수성이 가능할 것이다. 나는 내가 읽은 방식이 최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명료함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늘 말하듯 모호함은 풍성함이 아니다. 이 얇은 책이 보르헤스의 작품이 만들어낼 풍성함에 - 더 중요하게는 명료함에 - 기여하기를 희망한다.” (‘나가며’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