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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ymond Chand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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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왜 안 되죠?”
“당신이 나를 버리게 될 것 같아서. 이곳에서 난 한때 꿈이 있었지. 1년 반 전까지만 해도. 아직도 조금은 남아 있소. 난 내 꿈이 계속 이곳에 머물길 바라거든.” 그녀는 서둘러 일어나서 코트를 집어 들었다. 나는 그녀가 코트 입는 것을 거들어주었다. “미안하오.” 내가 말했다. “미리 얘기했어야 하는데.” 그녀는 고개를 휙 돌려서 내 얼굴 가까이에 들이댔다. 그래도 난 손 하나 대지 않았다. “당신에게 꿈이 있고 그걸 계속 살려두고 싶다는 게 미안한가요? 나도 꿈이 있었어요. 하지만 내 꿈은 죽었죠. 꿈을 살려두겠다는 마음도 사라진 거죠.” “꼭 그런 꿈만은 아니오. 여자가 있었소. 부자였지. 그녀는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했소. 잘 되지는 않았소. 다시는 그녀를 못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겐 기억이 있소.”---p.131 LA를 출발한 나는 오션사이드를 우회하는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 LA에서 오션사이드까지는 6차선 고속도로로 3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고속도로 곳곳에는 부서지고 찢기고 버려진 자동차 잔해들이 높은 둑 근처에 널브러진 채 실려 나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내가 에스메랄다로 돌아가는 이유부터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원점부터 다시 시작이었고 내가 맡은 사건도 아니었다. 탐정을 하다보면 쥐꼬리만 한 돈을 주면서 너무 많은 정보를 요구하는 의뢰인이 있다. 상황에 따라 일을 받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한다. 돈에 따라 결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은 필요한 정보 외에도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기껏 찾아갔는데 사라져버린 발코니의 시체와 같은 이야기 말이다. 내 안의 상식은 집에 돌아가서 다 잊어버리라고, 들어오는 돈도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상식은 늘 한 발 늦다. 상식은 이번 주 범퍼를 들이받기 전 지난주에 브레이크를 새로 갈았어야 했다고 말하는 자다. 상식은 주말 풋볼 시합에서 자기가 뛰었다면 이겼을 거라며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월요일 아침 쿼터백이다. 하지만 그가 뛰는 일은 결코 없다. 그는 허리춤에 술통을 차고 관람석 저 높은 곳에 앉아 있을 뿐이다. 상식은 덧셈에 절대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회색 양복 차림의 좀팽이다. 하지만 그가 더하고 있는 돈은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p.138 “......자네는 신을 믿는가, 젊은이?” 아주 길게 돌아간 길이었지만, 난 빠르게 지나가야 할 것 같았다. “만약 전지전능한 신을 말씀하신 거라면, 그래서 현재가 그 신이 의도한 것이라고 한다면 저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될 걸세, 말로. 그건 굉장한 안정감이야. 우리 모두는 그런 상태가 될 걸세. 결국 우린 죽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니까. 아마 개인으로선 그것이 끝이겠지. 물론 아닐 수도 있네. 사후의 삶은 무척이나 어려운 문제야. 난 아무래도 천국에서 그다지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 거기선 콩고 피그미 족이나 중국의 막노동자나 레반트의 카펫 행상인이나 심지어 할리우드 영화감독과 같이 살아야 할 것 아닌가. 나는 속물이네. 그런 것 같아. 물론 누가 그렇게 얘기하면 기분이 나쁘겠지만. 나는 신이라고 불리는 흰 수염을 늘어뜨린 자애로운 존재가 천국을 다스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네. 이런 건 비성숙한 사람들이 생각해낸 어리석은 개념들이야. 물론 인간의 종교적 신념이 아무리 어리석더라도 그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도 있겠지. 당연한 얘기지만 내겐 천국행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할 만한 권리는 없네. 따분한 얘기지. 인정하네. 그런데 아이가 세례 받기 전에 죽은 아이가 청부 살인업자나 유대인 학살을 지시한 나치나 소련 공산당원들과 똑같이 타락한 자의 위치를 갖는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지 않는가? 아무리 인간이 작고 보잘 것 없는 동물에 불과하더라도, 인간의 순수한 열망, 숭고한 행동, 위대하고 이타적인 영웅심, 험난한 세상 속의 일상적 용기가 그래도 숙명이란 걸 조금은 개선시킬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든 여기엔 합리적 설명이 필요하다네. 정의감이 단지 화학적 반응이라거나 남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 단순히 행동 양식을 따르는 것이라는 말은 하지 말게. 신은 독을 먹고 광고판 뒤에서 경련을 일으키며 홀로 죽어가는 고양이를 보며 행복할까? 신은 적자생존의 법칙에 만족할까? 무엇에 적응하라는 거지? 아니, 전혀 아닐세. 신이 진정 말 그대로 전지전능하다면 굳이 우주 자체를 만드느라 애쓸 필요가 없었을 걸세. 실패의 가능성이 없으면 성공도 없고, 매개물의 저항 없이는 예술도 없다네. 어느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아 신이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고 신의 하루하루가 지겹도록 길다고 말한다면 그건 신성모독일까?” ---p.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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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된 기사 필립 말로
챈들러 소설의 매력을 얘기하자면 어쩔 수 없이 그의 소설 속 페르소나인 ‘필립 말로’란 캐릭터를 얘기할 수밖에 없다. 미국적 기사도의 전형을 보여준 필립 말로의 ‘댄디즘’과 ‘나르시시즘’은 이 소설에서도 여전하다. 얼핏 거부감도 느끼게 하는 이런 성향에도 불구하고 이 캐릭터가 많은 공감을 얻은 것은 그가 끝까지 견지하는 권력이나 강자에 대한 냉소적이고 반항적인 태도 때문일 것이다. 정확한 나이가 나오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 소설 속의 필립 말로는 4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더 이상 젊지 않고 예전처럼 활력이 넘칠 수 없다는 자각은 소설 초반부터 등장한다. 고압적인 태도로 사건을 의뢰하는 변호사의 말을 끊으며 말로는 말한다. “말씀 도중에 죄송합니다만, 전 나이도 많은데다 지금은 피곤하고......” 후반부, 소설 속 팜므파탈에게도 이런 얘길한다. “좀 피곤해서. 나도 이삼 일에 한 번 씩은 앉아야 한다오. 극복하고 싶은 내 약점이기도 한데 지금은 예전처럼 젊지 않거든.” 이런 자각은 그의 행동에도 변화를 준다. 필립 말로 시리즈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말로는 몽상적이면서 금욕적 느낌까지 준다. 이런 말로도 시리즈가 진행됨에 따라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그 날카로움에도 조금의 변화를 보여 준다. 그리고 급기야(?) 이 소설에서는 두 번이나 여자와 잠자리를 가진다. 그것도 상당히 노골적인 유혹의 과정을 통해.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있다. 젊은 시절의 그는 술수나 편법이라는 것에는 아예 관심도 보이지 않는 오만함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 소설 속의 말로 역시 냉소적이고 반항적인 모습은 여전하지만 일을 풀어가는 방식에서는 변화를 보여준다. 청진기를 이용해 도청을 하기도 하고 정보를 캐내기 위해 거짓 연기를 하기도 한다. 전작들에 나오는 말로의 모습을 기억하고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말로의 이런 변모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 속에 존재하기 힘든 이상적 기사의 외피를 벗고 현실 속에서 부유하며 힘겹게 버텨나가는 모습은 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더군다나 그의 내면 고갱이에는 아무런 변화나 훼손이 없다. 여자가 주는 회유성 거액을 돌려주고, 사건이 전모를 드러낸 뒤 다시 주어진 회유성 사례비도 단호하게 거절한다. 한 도시를 좌지우지 하는 권력자들에 대한 냉소와 사건의 진실에 대한 집요함도 변함없다. 비록 조금 힘겨워 하고 가끔 길을 잃은 듯 보이기도 하지만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점을 결코 놓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짙은 니힐리즘과 사랑이라는 한 줌의 희망 이 소설의 전반을 지배하는 정서는 짙은 니힐리즘이다. 이는 나이듦에 대한 자각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건의 전모를 밝힌 말로는 지치고 피곤한 상태에서 ‘텅 빈 벽과 무의미한 방과 무의미한 집’으로 돌아온다. 술을 한 잔 마실까 하지만 그것도 그만 둔다. ‘그 누구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강철 같은 내면이 아니고선 그 어떤 것도 약이 되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깊은 니힐리즘에 근거한 이런 자발적 고립은 소설의 말미 앞의 소설에서 만난 후 1년 반 동안 헤어져 있던 린다 로링에게서 전화가 오고 청혼을 받고 그를 수락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암시하면서 해소된다. 이제 그의 방은 ‘더 이상 텅 빈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키가 크고 늘씬한 사랑스러운 여인의 목소리가 있었다. 침대 위 베개에는 짙은 머리의 여인이 있었다. 부드럽고 몰캉몰캉한 입술에 눈은 다 뜨지도 못한 채 나를 꼭 끌어안은 여자의 부드럽고 잔잔한 향기가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그리며 미래에 대한 기대로 살짝 흥분하는 말로의 이런 모습은 그가 더 이상 고고한 기사로 남아 있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다행스럽기도 하다. 말로가 처음 등장하는 ‘빅 슬립’부터 이 소설까지 그가 보여준 행보는 사실 무언가를 찾아 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진실’일 수도 있고 ‘정의’일 수도 있고 ‘도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을 읽고 나면 그 모든 것을 넘어 그가 찾고자 했던 것은 ‘사랑’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듯한 말로의 냉정함과 오만함은 사실 ‘니힐리즘’이 심리적 저변을 관통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던 것이다. 하루키는 말로의 행보를 두고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그는 무언가를 열심히 찾아 헤매지만 그가 그것을 찾아냈을 때 이미 그것은 변질된 상태이다.’ 아마 사랑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내 헛된 기대였음을 알게 될지라도 긴 여정 끝에 그가 찾은 한줄기 희망은 독자에게도 작은 위안이 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