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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 존재에 대하여 2. 칸트, 퍼스 그리고 오리너구리 3. 인지 유형과 핵 내용 4. 오리너구리 : 사전과 백과사전 사이의 괴리 5. 합의로서이 지시 행위에 대한 메모 6. 도상성과 하위 도상 옮긴이의 말 참고 문헌 찾아보기 |
Umberto Eco,움베르트 에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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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너구리는 기이한 동물이다. 그것은 마치 과학적이든 비과학적이든 모든 분류법을 좌절시키기 위해 창조된 것처럼 보인다. 평균적으로 길이가 50센티미터 정도이고 2킬로그램 정도의 무게가 나가는 이 동물은 암갈색 모피로 뒤덮인 평평한 몸통을 가진다. 그리고 목이 없고 비버와 비슷한 꼬리가 달려 있다. 위로는 푸른빛이 감돌고 아래로는 붉은 반점이 박힌 오리의 것과 비슷한 부리가 있다. 귀를 움직이는 근육은 없고 네발의 끝에는 갈라진 다섯 개의 발가락을 연결하는 물갈퀴가 붙어 있다. 오리너구리는 물고기나 양서류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물속에 충분히 오랫동안 잠수할 수 있다(사실 물속에서 먹이를 찾는다). 암컷은 알을 낳고 젖꼭지는 없는 것 같은데도 새끼에게는 젖을 먹여서 키운다(한편 수컷에게도 고환은 볼 수가 없다. 몸속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2. 칸트, 퍼스 그리고 오리너구리, pp. 93~94)
결국 오리너구리의 이야기는 이론보다는 사실이 승리한다는(그리고 퍼스가 원했듯이, 진리의 횃불은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계승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 자연 과학자들은 80년 이상이나 모든 사안에서 합의하지 못했으며, 점점 더 많은 사례들이 발견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저러한> 동물로 묘사하지도 못했다. 이 동물은 <포유류>, <조류>, <파충류>이거나 또는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39년 레손이 말했듯이, 그 생물 분류학적 방법론의 오류를 증명하기 위하여 그 방법론의 길 위에 가로놓였던 이 골치 아픈 짐승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리너구리의 이야기는 지루한 <협상>에 대한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4. 오리너구리: 사전과 백과사전 사이의 괴리, pp.361~362) 〔……〕해석의 한계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이 한계가 문화나 텍스트에만 관련된 것인지, 아니면 더욱 심층적인 층위에 원인이 있는지를 더욱 고민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에서 이 책의 제1장에서 존재라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그것은 전지전능의 과시가 아니라 직업윤리의 표출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언어의 자유에 한계를 부과한다고 느끼는 한에서만, 나는 존재에 대해서 언급할 것이다. (서문, p. 8) 〔……〕존재Being는 오로지 구체적인 개념들로 표현된 모든 대상들에 속하는 추상적인 측면이다. 존재는 무한한 외연을 가지지만 그것의 내포(또는 내용)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존재라는 낱말이 모든 것에 관련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1. 존재에 대하여, p. 25) 『진리론』의 서두에서 아퀴나스는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오성이 가장 명명백백하게 포착하는 첫 번째 것이요 다른 모든 것은 그 존재의 뒤를 따른다>고 말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무엇>을 생각한다는 (함축된) 원리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존재는 그 안에서 우리의 사고가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공간으로서의 수평선이자 양수(養水)이다. 아니면 존재는 아퀴나스에게는 오성이 사물의 첫 포착을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최초의 지각 시도가 움직이는 공간이다. (1. 존재에 대하여, pp.35~36) 존재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말하기 전부터 이미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억압할 수 없는 명증성으로부터, 그것에 관해서 말하는 한에서만 일종의 문제(대답을 기대하는)로 변환시킬 수 있다. 이처럼 존재를 향한 최초의 개시는, 그 낱말을 철저하게 유물론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일종의 무아지경의 체험이다. 우리가 이런 초기의 암묵적인 명증성을 고집하는 한, 물고기에게 자신을 담아 두는 물이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듯이 존재는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가장 자연적이고 가장 직접적인 경험인)는 상식선에서는 결코 제기되지 않았을 그야말로 부자연스러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존재 속에서 우리 자신을 감지하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때 우리는 존재자를 존재자로부터 분리해서 세계를 차곡차곡 구축한다. (1. 존재에 대하여, p. 40) 존재란 바로 우리가 <말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이 다른 모든 명증성의 지평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말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철학적인 문제가 된다. 심지어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말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중의적으로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 중의성이 축소될 수 있다고 해도, <말하기>를 통해서만 그 중의성이 의식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존재란 그것이 생각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우리에게 처음부터 <언어의 작용>으로서 나타난다. 우리 눈앞에 나타나자마자, 존재는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즉 그것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순간, 그것은 이미 해석된 것이다. (1. 존재에 대하여 p. 42) 우리에게는 개별 사물의 무한성에 대한 명칭이나 정의가 거의 없다. 따라서 일반 개념으로의 환원은 사고의 강점이 아니라 <말하기의 약점>이다. 이때 극적인 요소는 사물은 제각기 개별적인 반면, 인간은 늘 일반적인 차원에서 발화한다는 점이다. 언어는 존재하는 개체들의 억압할 수 없는 본질을 은폐하면서 명명한다. 〔……〕 그러나 존재의 문제는 존재가 언어의 효과라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언어조차 존재를 정의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존재는 유가 아니며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유는 더욱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의하기 위하여 유와 종차를 사용해야 할 때, 존재는 모든 정의를 벗어나는 것이다. 존재는 이후의 모든 정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정의는 논리적이며, 따라서 기호적인 세계의 조직을 전제한다. 우리가 이 조직을 존재라는 더 안전한 변수로 소급하여 확보하려고 할 때면 언제나, 우리는 말하기의 함정, 즉 안전책으로서 갈구하던 바로 그 언어 속으로 빠져 들 것이다. (1. 존재에 대하여, pp. 44~47) 존재가 그 지평 속에 우리의 위치를 할당하는 담론에 한계를 부과한다고 해서 해석학적 활동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해석학적 활동의 전제 조건이다. 우리가 존재에 대해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면, 그 부단한 질문의 모험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되어 가는 대로 그것에 대해 말하면 족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경계가 존재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줄기차게 나오는 질문은 합리적이고 또한 인간적으로 보인다. (1. 존재에 대하여, p. 82) 〔……〕직업적인 거짓말쟁이인 그들은 존재가 무엇인지 말하는 자들이 아니라 종종 자신들에게(그리고 우리에게) 존재의 저지선을 부인하는 것을 만드는 자들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작가들의 눈에는 거북도 날 수 있고 심지어 죽음으로부터도 벗어난 존재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따금 <불가능한 것>조차 가능하다고 묘사하는 작가들의 말은 우리 욕망의 무절제함을 드러낸다. 작가들은 한계 너머에 있는 것을 우리가 엿보게 함으로써, 그들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유한성을 위로하며,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얼마나 <허망한 열정>이 되어 버리는지를 상기시킨다. 존재의 저지선을 수용하기를 거부할 때조차, 작가들은 그 저지선을 부인하는 가운데 바로 그것을 상기시킨다. 그것을 발견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때조차 그들은 우리가 그것을 곧 확인할 거라고(그것을 법칙으로 실체화할 거라고), 그리고 그 저지선이 곧 극복될 거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작가들이 실제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존재를 기쁘게(그리고 과학과 더불어 희망차게) 맞이하고, 그것에 질문을 던지고, 그 저지선을 시험해 보고, 그다지 명확하지 않은 존재의 개시와 암시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1. 존재에 대하여, pp. 90~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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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수에서 파르테논 신전까지
존재에 대한 논의를 통해 기호 생산 과정의 출발점을 명백히 한 후, 에코는 2장에서 6장까지 무수한 사례와 가공의 이야기들을 통해 자신의 인지 의미론을 전개한다. 2장 <칸트, 퍼스 그리고 오리너구리>에서 에코는 마르코 폴로가 코뿔소를 일각수로, 아스테크 원주민이 스페인 정복자의 말을 사슴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분석하면서 언어 철학을 오랫동안 괴롭혀 온 범주화라는 문제를 끌어들인다. 마르코 폴로가 자바 섬에서 코뿔소를 목격하고 일각수로 해석한 이유는 그가 살던 문화에서는 네발짐승에다 이마에 뿔이 달린 짐승을 <일각수>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생명체의 우주에 새로운 동물을 추가하기보다는 기존의 범주를 이용하고, 그 범주의 구성 내용을 바꾸는 방식을 택했다. 말하자면 마르코 폴로는 외연은 그대로 놔두고 내포만 바꾼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에코는 보편적이고 선험적인 범주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표명한다. 여기서 존재 자체의 기초 성향에는 선험적 범주들로 규정될 수 없는 어떤 요소들이 들어 있음이 드러난다. 범주적 질서의 강요 속에서 낙타는 네발 달린 타조가 되고, 오리너구리는 창조주의 보편 질서에 어긋나는 기괴한 동물로 왜곡된다. 그리고 이어서 3장 <인지 유형과 핵 내용>에서는 스페인 병사들이 타고 온 말을 처음으로 본 아스테크족과 몬테주마 추장이 그것을 <사슴>을 의미하는 <마사틀>이라는 낱말로 부른 사례를 들어 인지 유형의 창발 과정을 다룬다. 이를 통해 에코는 선험 철학에서 인지주의로서의 선회를 권유한다. 4장 <오리너구리: 사전과 백과사전 사이의 괴리>에서는 오리너구리의 출현으로 촉발된 사전과 백과사전적 접근 사이의, 그리고 사적인 지각과 공공재로서의 기호 생산 과정 사이의 괴리를 다룬다. 전자가 범주적 접근이라면 후자는 현상학적 접근이다. 이 전대미문의 동물을 물두더지라고 부르든 오리부리너구리라고 부르든, 계통 수형도는 변별 특징과 위계적 차원에 따라 만물을 파일과 디렉터리 속으로 하위 분류하는 부단한 구조 변경의 과정을 담고 있음이 드러난다. 5장 <합의로서의 지시 행위에 대한 메모>에서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비트겐슈타인과 불가능 세계를 도시한 도형, 에이허브 선장, 빨간 모자, 스웨덴 전함 바사 호와 파르테논 신전, 포르 루아얄 궁전 등 다양한 사례를 통해 지시 행위가 어떤 합의와 협상 과정을 거치면서 탄생하게 되는지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6장 <도상성과 하위 도상>에서 일차적 도상성을 경유하여 도상으로 발돋움하려는 하위 도상은 결국 약정과 문화의 산물임을 역설하면서 문화 기호학의 당위성을 역설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