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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1. 이름과 기억 2. 기억의 기술 II. 상상동물 - 그로테스크와 하이브리드 3. 그로테스크와 하이브리드 4. 중세의 동물지와 괴물지 III. 드라코, 유혹, 사이코마키아 5. 왕자와 용, 그리고 시간의 아포리아 6. 영혼의 전투, 체스와 주사위놀이 IV. 브리콜라주, 전유의 놀이, 엠블럼 7. 아멜리에와 아멜리오레 8. 잊혀진 문헌 양식, 엠블럼 V. 끝없는 갈림길의 정원 9. 거울로서의 텍스트 10. 역설적 찬사, 모순어법적 양가성 참고문헌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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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간의 상흔으로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다 이 책의 개요
2005년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세 인식’은 고대와 르네상스에 낀 어두운 중간기라는 개념이다. 전근대(前近代)로서의 ‘낡은’ 중세의 이미지만이 떠오를 뿐이다. 이런 인식틀은 전적으로 19세기 역사학의 소산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중세의 개념은 서구에서는 20세기에 들면서 전면적으로 다시 성찰된다. 움베르토 에코는 포스트모던의 정체를 ‘새로운 중세'라고 정의했고, 자크 르 고프는 『연옥의 탄생』에서 중세란 ‘여러 장기적 지속 현상들의 들쭉날쭉한 전체라고 정의했다. 『호모 루덴스』의 저자 요한 호이징가는 『중세의 가을』에서 “중세의 삶은 두 극단을 왔다갔다 한다. 현대인에 비해 감성이 유난히 발달했던 그들은 쉽게 감동하고, 쉽게 절망했다. 잔혹 아니면 무한한 애정 둘뿐이었다.”고 말할 정도다. 최정은의 『동물·괴물지·엠블럼―중세의 지식과 상징』은 이들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근대를 지나가는 가운데 까마득히 잊혀진 것들을 복원하려 기획된 작품이다. 이 책은 중세의 기억의 기술, 중세의 동물·괴물지, 그리고 잊혀진 문헌 양식인 엠블럼 등의 주제를 애니메이션과 영화, 문학 등의 해석을 통해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중세의 천착한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으며, 중세, 인문주의가 어떤 모습있는지를 세밀하게 관찰하는 『동물·괴물지·엠블럼―중세의 지식과 상징』을 통해 우리는 현재의 당면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생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나는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이고자 했다. 잊혀진 과거가 현재의 문화적 경험 혹은 서사들과 어떻게 연결되어지는지 그 접점을 보여주는 일에 초점을 맞추었다. 과거역사에 대해서도, 현재의 문화적 경험에 대해서도, 우리들은 흔히 ‘통념’ 혹은 ‘억견’을 지니게 된다. 해석은 언제나 현재 자기 자신이 지닌 앎에 의해 제한된다. 그 통념 혹은 견해들은 과연 객관적인 사실인가· 지극히 자명해 보이는 사실들도 층위에서의 어떤 믿음에 의존해서만 존재 가능하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고 누락된 사실들을 복원하여 역사는 끊임없이 새로 씌어질 필요가 있다. 어떤 문화를 경험하건 우리들은 자신의 고유한 프리즘을 경유해서 그것을 본다. 가정된 서술이나 전제에 의존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파악할 수 없다. …… 과거란 현재 속에 축적되고 새로이 현현되는 기억이며 또 하나의 타자성의 지대이기도 하다. 과거의 사람들, 그들이 사물을 세계를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진정으로 다가서려면 일시적이나마 현재의 ‘나’는 버려야만 한다. 그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눈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과거를 기억하고자 했다. 행복하기도 하고 힘겹기도 했던 읽고 썼던 시간들, 그 시간이 누군가와 공유될 수 있다면 좋겠다. ― 『동물·괴물지·엠블럼―중세의 지식과 상징』 12~13쪽, 〈지은이의 말〉 중에서 2. 국내 연구자의 중세 연구 성과를 담아내다 출간의 의의 현재 우리의 삶 전체가 근대라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우리에게 중세는 ‘새로운’ 중세도 아니고 포스트모던도 아니며 전근대(前近代)로서의 ‘낡은’ 중세일 뿐이다. 서구의 중세를 테마로 한 작품들은 『중세의 가을』, 『연옥의 탄생』 등이다. 이들 작품은 서구의 중세 관련 석학들의 연구서이다. 이 저작들은 문학이나 예술사 관련 연구자들의 책읽기에 맞춰져 있다. 특히 각주나 관련 도판이 상세하지 않아 맥락을 쉽게 찾지 못하게 되어 있고, 읽어도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현대 사회를 결정짓는 제도나 가치 체계 등, 의미 있는 모든 것의 시원은 중세에 있다고 한다. 그 시원들을 우리의 눈으로 조명하는 것은 인문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 분야에서 현재의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생성할 수 있는 의미를 제공하게 된다. 『동물·괴물지·엠블럼―중세의 지식과 상징』는 이런한 점에서 의미가 상당하다. 국내 연구자의 중세 연구 성과를 담아낸 작품 『동물·괴물지·엠블럼―중세의 지식과 상징』은 서양문명사 속의 중세, 그리고 자본주의 발생의 초기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한 새로운 다리[Bridge]가 될 것이다. 이 책은 한때 너무도 중요했으나 근대를 지나는 가운데 까마득히 잊혀진 것들의 복원을 목표로 하였다. 아마도 이 책의 전체적인 몸체는 근대가 아닌 것, 일견 중세적인 것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중세에 천착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으며, 중세라든지 인문주의란 실제로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기호학자이자 고전문헌학자인 움베르토 에코는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에서 현대사회의 속성과 위상에 대해 중세와 대비하여 천착한 바 있다. 이 책은 에코의 그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근대화 과정이라든지 모더니티의 외부를 생각해보고자 했다. ― 『동물·괴물지·엠블럼―중세의 지식과 상징』 7쪽, 〈지은이의 말〉 중에서 3. 상상동물 이야기, 그로테스크와 하이브리드 이 책의 특징 1 『동물·괴물지·엠블럼―중세의 지식과 상징』에서 다루고 있는『괴물지(monstorum)』나 『동물지(bestiary)』는 학문적인 텍스트는 아니지만 중세의 지식인들과 일반인들이 언제나 즐겨 읽었다. 백과사전적인 동물지의 기술 방식은 분류학 발생 이전의 망탈리테, 즉 과학과 환상, 물리적 사실과 이성의 담화가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의 분화되지 않은 심성을 보여준다. 근대 이전 에피스테메의 인지방식에서 경험적인 관찰과 상상적인 의미들은 혼재되어 기능한다. 동물·괴물지는 넓게 보면 기억의 기술(Art of Memory)이라 할 수 있다. 기억의 기술은 근대의 합리성에 의해 지워진 사유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은 ‘선물’이라는 형태로 주어지는 시간 속의 현존의 경험, 상호성(주고받음, 되갚음)을 전제로 한 교환형식과 타자성과의 만남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동물·괴물지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언어가 아니라 사물을 통해 모호하게 말한다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고삐 풀린 상상력이 풀어놓는 판타지. 중세의 괴물들은 동물들의 이종교배적인 하이브리드이다. 실제동물과 상상동물의 혼합, 날짐승과 어류의 혼합. 요컨대 괴물이란 장소의 혼합이다. 괴물이 그로테스크하다는 것은 이질적인 요소들의 병립을 의미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유니콘, 하피, 사이렌, 앰피스배나, 이벡스, 켄타로우스 등이 괴물인 것은 상반된 것들을 그대로 공존시키고 어느 한 영역으로 다른 것을 흡수해 넣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스스로의 꼬리를 무는 뱀인 우로보로스는 시간을 나타낸다. 우로보로스는 이집트 신화에서 태양이 지나는 밤의 황도대 길(두아트)의 상징이다. 자신의 꼬리를 문 뱀은 고리 혹은 원이 된다. 우로보로스는 시간이며, 태양이 지나는 행로인, 별이 빛나는 밤의 길이다. 이집트인들은 지평선을 가로지르는 태양의 길을 라신(태양신)이 시간의 배에 타고 누트(Nut하늘)의 몸을 항해하는 모습에 비유하였다. 이 시간의 배는 매일 저녁 지하세계로 내려갔다가 이튿날 아침 솟아오르는 라에 의해 운행되는 태양의 배다. 죽은 자들은 라처럼 빛나는 태양이 되거나 부활하기 위해 그 시간의 배에 타기를 원한다. …… 우로보로스 표상들에는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포탄 혹은 날개를 단 두상이 덧붙여지는데, 이것은 운명 또는 포르투나의 변덕을 지식과 판단으로 극복한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의미의 추가였다. 예컨대 17세기 내과의였던 카메라리우스는 우로보로스의 도상으로 다음과 같은 모토를 만들었다. “끝은 시작에 있다” “행운보다는 판단을 믿는 편이 낫다.” 보르헤스의 『상상동물 이야기』의 장을 여는 앰피스배나는 양방향 두개의 머리를 지닌 뱀이다. 앰피스배나는 시간의 뱀인 우주적인 우로보로스의 변형태로, 근세에는 알레고리적인 양가성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앰피스배나는 전방향적이고 가역적인 공시적 시간(synchronic time)이다. 구조는 통시적이고 사건은 공시적이다. …… 괴물이란 문을 지키는 존재, 경계부와 교차로의 존재이다.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여 사고했던 중세와 근세의 대표적인 유혹과 근심은 무엇보다 성역할이었다. 남성 여성의 적절한 성역할에 대한 근심은 성의 위반자를 괴물로 보는 사고방식을 만들어냈다. 여성화된 남자나 남성화된 여성이란 근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형상언어의 특징상 이것은 양가적인데, 정해진 성역할을 뛰어넘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와 함께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 상징이 되었다. 여성전사인 아마존이나 숲의 여인(Wild Women)이 그러하듯 남녀의 자질을 한 몸에 지닌 자웅동체는 금지된 것이며 부정한 동시에 대단히 에로틱한 것이었고 표상적으로는 어떤 결합불가능한 극성의 완성태를 지시했다. 연금술적 사고에서 이러한 완성태는 쌍둥이 왕으로 표상되는 레비스(Rebis) 혹은 남자와 여자 2개의 머리를 가진 자웅동체인 헤르마프로디테(Hermaprodite)로 나타난다. ― 『동물·괴물지·엠블럼―중세의 지식과 상징』 123~128쪽. 4. 엠블럼,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지식의 모음 이 책의 특징 2 『동물·괴물지·엠블럼―중세의 지식과 상징』에서는 잊혀진 문헌 양식 엠블럼을 왜 고안했고, 무엇을 위해 사용했는지를 추적한다. 엠블럼은 글과 책을 사랑하는 근세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양식이었고, 모토, 알레고리적인 그림, 주해 세 가지의 요소로 이루어졌다. 당연히 그림과 글이 공존하고 필수불가결하게 상호보완하는 일종의 책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지식의 모음이다. 엠블럼집들이 16~17세기 유럽의 베스트셀러였다는 사실은 근대를 비판할 때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무엇인가를 말해준다. 엠블럼집은 엠블럼들의 모음이며, 씌어진 글들은 고전의 인용들이고, 그림들은 지금은 잊혀진 대단히 복잡한 상징을 내포한다. 때문에 옛날 화가들에게 도상적인 고안의 근거로 사용되었기에, 현재에는 근세 미술을 해석하는 중요한 문헌 근거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별한 형식의 고안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엠블럼이 발생되던 시기의 역사적인 흔적들을 살펴보면, 엠블럼이 기억과 선물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윤을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었다. 『동물·괴물지·엠블럼―중세의 지식과 상징』은 동물지, 괴물지, 엠블럼과 같은 잊혀진 문예 양식들은 기호와 상징이 서사와 담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지, 그리고 명료하게 말하는 것뿐만 나이라 애매하게 말하기가 지배담론의 재상산 혹은 반대급부로 그에 대한 저항에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지를 다양한 소재들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물·괴물지·엠블럼이 발생되던 시기의 역사적인 흔적들 속에서 ‘기억’과 ‘선물’이라는 잃어버린 의미를 다시 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엠블럼(emblem)은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때문에 번역할 말이 없고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엠블럼에 가까운 말은 가문의 문장(herald)이다. 현대사회에서는 기업이나 집단을 상징하는 디자이너들이 말하는 상표의 의장(意匠; logotype)이라는 것이 그나마 엠블럼에 가깝다. 소위 ‘명품’을 나타내는 기호들인 샤넬, 디올, 베르사체, 에르메스 시계의 장식적인 이니셜의 로고타입들은 각각 1550년대의 옛 프랑스 성(구체적으로 Chateau de Oiron)에서 차용해 온 기호들이다. 그러나 현대의 의장은 본래의 엠블럼과는 거리가 있다. 우리들은 내용을 모르고 막연히 끌리는데, 그것은 그러한 기호들이 어떤 내밀한 원형적 기억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사멸한 기호의 껍질은 마치 조개껍질에 아로새겨진 알 수 없는 무늬가 바닷물의 온도변화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옛 봉건사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 그것은 시간이라는 파도에 해안으로 떠밀려온 빈 조개껍질이다. 바다에 대한 기억은 닫혀 있고 읽을 수 없다. 우리들은 기호나 이름을 보아도 그들을 볼 수 없으며, 폐쇄된 세계였던 여왕과 귀부인들의 꿈은 서술된 역사에서 한 줌의 기억조차 남기지 못한다. 그러나 언젠가 분명히 그 마음은 존재하였다. 맥락에서 떨어져버린 파편일 뿐인 기호에서 그것은 어렴풋이 느껴진다.…… 엠블럼의 재미있는 점은, 그것이 애초에 연회에 허락받은 자와 허락받지 않은 자를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상징(symbola)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만, 단지 나와 너를 구분하는 계층의 편가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박해받는 자들이나 제한된 집단의 친밀한 소통을 매개하는데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양가성(Ambivalence)라는 특성을 지닌 형상언어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검열을 피할 수 있었다. 신교측도 구교측도, 마법사라고 불리던 사람들도, 정치적인 선전 혹은 반대로 위정자를 비방하고 풍자하고자 했던 사람들도 각각 자신들이 속한 특정 커뮤니티의 의사소통을 위해 엠블럼을 사용했기 때문에 때로는 동일한 그림이 전혀 상반된 의미를 말하게 되는 모순도 생겨났다. ― 『동물·괴물지·엠블럼―중세의 지식과 상징』 284~288쪽. 5. 현대의 문화적 경험을 도상해석학으로 읽다 이 책의 특징 3 이 책에는 100여 컷의 판화와 그림 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흔희 볼수 없는 독특한 판화들이다. 이 그림자료들을 통해 그것이 담고 있는 기호와 상징은 일상적으로 보던 것과는 다를 것이다. 미술사에서 사용하는 주요한 이론적 도구가 도상해석학이다. 도상해석학은 문헌사적이고 계보학적이며 콘텍스트를 중시한다. 영화든 애니메이션이든 하나의 작품을 대하는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철학자들에게는 철학이 보이고, 비평이론에 관심있는 사람에게는 구조가 드러난다. 도상해석학적인 읽기를 통해 밝혀지는 것은 일차적으로 형상 언어인 상징과 은유의 다양한 해석들이다. 이 책의 주요 테마인 동물지, 괴물지, 엠블럼은 거의 대부분 형상언어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상징의 내용은 표면적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으며 잠재적이다. 그리고 상징과 은유들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옛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당연히 오늘날과 같지 않다. 우리는 이것을 자주 잊어버린다. 의미는 당시 유행하던 텍스트에 따라, 관련된 역사적 사건에 따라, 당대인들이 지니던 심성에 따라 변해간다. 즉 의미는 콘텍스트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저자 최정은은 미술사학 연구자로서, 미술사의 대표적인 방법인 요컨대 도상해석학(iconography)적인 읽기가 현대의 문화적 경험에 적용된다면 어떤 모습일지, 무엇이 반복되고 있는지를 해석의 실제적 결과물의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분석과 해석을 통해 우리는 “누가 무엇을 어떤 의도로 말하는가”, 또한 표면적 서사에서는 지워졌다 해도 의식의 검열을 피해서 실제로 말해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귀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 인터뷰 2년여 동안 진행된 이 책의 발간 작업은 ‘인내의 연속’이었다. 저자는 이 시간을 ‘잃어버린 시간’이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생산의 시간이기도 했다. 『트릭스터―영원한 방랑자』『동물·괴물지·엠블럼』의 저자와 이야기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두 책은 서로 연관되었으면서도 독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 정리 휴머니스트 인문편집장 선완규 ▶ 휴! 『트릭스터―영원한 방랑자』『동물·괴물지·엠블럼―중세의 지식과 상징』이 발간되었습니다. 기분이 어떠신지요. 더불어 이 책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신다면· 글솜씨가 부족해서 나름 고생했는데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생각한 것들을 심화하는 일도 필요하겠지만 새로운 작업 새로운 연구를 하고 싶어요. 무엇을 간략히 설명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아니랍니다. 비록 간략화 해보려고 항상 노력은 하지만요. 무엇이든 직접 경험해 보는 것이 좋지요. ▶ 『트릭스터―영원한 방랑자』, 『동물·괴물지·엠블럼―중세의 지식과 상징』 두 권의 연결되는 것 같고, 또 그렇지 않을 것 같기도 하구요. 양가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는 듯하네요. 『트릭스터―영원한 방랑자』는 최정은 선생님 사유의 전체 얼개인 듯하고, 『동물·괴물지·엠블럼―중세의 지식과 상징』은 그 사유를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아직 사유라는 말을 쓸 정도로 제 사고가 성숙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냥 관심 가는 주제가 생기면 나름대로 자료를 찾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일 뿐이에요. 다른 학문도 그렇지만 미술사에서는 기본적인 개념들을 역사적으로 정리해두는 일이 필수입니다. 의미는 맥락에 따라 다르고(계열화에 따라 다르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죠) 고정되지 않습니다. 히스토리아와 데코룸은 몇 년 동안 씨름했던 아주 중요한 개념이랍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제 분야를 설명해야만 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체계는 그 체계에서의 예외를 전제로 하고서만 성립된다는 말이 있죠. 비슷한 예로 소통은 의미생산의 잉여라는 말도 있구요, 전체생산을 추동하는 것은 잉여라고도 하지요. 정신분석학에서도 원초적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구요. 온통 검기만 하면 검다는 것을 인식할 수 없듯이 전체 프레임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뭔가 하나의 예외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 예외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고 또한 서로 다른 학문분야에서 사용되는 유사하거나 같은 개념들을 횡단해보고 싶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대학원에 처음 들어온 후배들이 기본적 지식을 갖기 위해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몰라서 헤매는 경우를 종종 보았거든요. 읽을 책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받아도, 한두 권으로 추천하기도 힘들었구요. 개설서가 아닌 형태로, 제 나름대로 인문학에 접근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되는 내용들을 담았습니다. ▶ 선생님께서는 르네상스 바로크 문예의 대표적 특징인 양가성을 주목하고 있죠(지은이의 말 11쪽). 현대의 인문학 경향과 어떤 지점에서 연결되고 있는 것입니까· ▶ 포스트모던과 현대인의 삶에서 양가성이 발견된다고 하셨는데요. 이를 구체적으로 예시한다면 어떤 것일까요· 화폐 자체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모두들 화폐가 추동하는 현실에 목매고 있듯이 현실이 허구라든지 환상에 의존한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하기까지 합니다. 지젝은 그것을 명료하게 분석해 두고 있는데, 사람들은 무엇을 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죠. 신자유주의와 사회의 전반적인 보수화 이후 지배적인 태도의 하나가 냉소주의인 것 같습니다. 다중은 냉소적입니다. 예기되는 상처를 회피하는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냉소를 이겨낼 수 있는 활력을 제시할 수 있는 힘을 보여주고 싶었고 또한 다른 역사적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초기단계에 이미 양가적이고 냉소적이며 모순적이었다는 사실, 그러나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한 이들이 있었으며 그들에 의해 역사의 다른 국면들이 시작되어 왔다는 것을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굳이 니클라스 루만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체계를 추동시키는 자체가 모순의 존재이므로 “자본주의에 모순이 있다”라든지 “계급간 갈등이 있다”라든지 “그런 것은 이데올로기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저항의 힘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파스칼적 명상』에서 부르디외는 말하지요. 사회적 게임들은 그것들이 지닌 이중의 진실을 살려 묘사하기 매우 어렵다고 말입니다. 게임에 가담하고 있는 사람들은 게임의 객관화에서 얻는 이익이 없고, 게임에 가담하지 않는 사람들은 참여하는 조건으로만 배울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하고 느끼는데 열악한 상황에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저 개인적인 견지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진정한 저항의 힘은 마치 트릭스터처럼 끝까지 가보는 것, 규범 내부에서 규범을 전환시키는 것, 문제를 설정하는 좌표를 전적으로 바꾸는 것 한마디로 트릭스터처럼 열심히 해서 장의 속성을 바꾸어 내는 것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들뢰즈는 중도는 과잉이라는 명제를 말하죠. 데코룸이 무엇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 힘든 것은 그것이 적용되는 반경의 경계가 항시 유동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병을 고칠 수 없으면 병과 친해지라는 말이 있죠. 그런 의미에서 양가성과 역설 모두가 오히려 하나의 기법처럼 이용될 수도 있겠다 싶었고 그 좋은 범례를 르네상스의 인간긍정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독자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하려는 출판사의 입지를 고려해서 중세를 화두로 내세우기는 했지만 두 권의 책들은 고대 중세 그리고 모더니티가 시작되기 이전 자본주의 태동시기로서의 근세 모두가 녹아있습니다. 양가성은 근본적으로 모순이라는 측면에서, 책에서 말하고 있듯 체계이론 그리고 비르노의 정치철학과 연결됩니다.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에서 말하는 역설이죠.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의 종교는 역설이라고 했듯이, 어디에도 없는(no-where) 시간을 지금 여기서(now-here)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한한 긍정이라는 역설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독특한 그림들이 많이 보입니다. 이 책에 있는 판화나 그림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판화라든지 삽화가 쓰인 것은 오늘날 쓰이는 용도보다는 좀 더 강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즉 바라보며 몰두해서 명상하기 위한, 일종의 동방교회 이콘화처럼 〈경배화(andachtsbild)〉의 성격이 있었다든지, 혹은 언어의 한계를 절감하여 말의 불완전성을 보완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보완물로서의 그림이라든지 하는 식입니다. 이 판화들은 현대에 범람하는 이미지들과는 달리 대단히 순수합니다. 백화점에서 생일축하카드가 날아오거나 당첨되었다고 해서 아무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갑을 털어가기 위한 것이니까요. 광고이미지는 근본적으로 속이기 위한 것입니다. 반면 여기서 보여드리는 판화들은 반드시 기억해야만 할 것을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거기엔 그 시대의 “진리”가 있습니다. TV에서 쏟아져 나오는 우리시대의 광고 이미지에도 물론 나름의 “진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중근세 때 기억해야만 했던 진리와 그 표현방식이 더 마음에 들고, 그것을 소개해드리고 싶었습니다. ▶ 이 책에는 수많은 상상동물이 등장합니다. 저는 시간을 상징하는 앰피스배나가 인상적이었는데요. 여기 등장하는 상상동물 중 선생님에게 상처를 주거나, 긍정적인 영향인 미친 동물은 어떤 동물이었습니까· 유니콘은 어렸을 때부터 대단히 좋아했답니다. 예쁘니까요. 왠지 나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그런 동물 같았지 요. 그리고 다음으로는 멜뤼진이라든지 인어가 될 것 같습니다. 책 쓰고 나서 인어공주 목걸이를 하나 샀을 정도거든요. 물과 공기의 속성을 병립하는 것이 인어지요. 전통적으로 뱀이라든지 파충류는 악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질서잡힌 하나의 계에서 다른 쪽을 바라보면 자신의 편이 아닌 쪽이 언제든지 악으로 표상되는 것입니다. 혹은 나는 문명 쟤는 야만 이런 식으로요. 중세의 고딕성당에서도 불교의 사찰에서도 언제나 덕이 악을 밟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역사적 현실은 그와 반대로 물질이 정신을 압도해왔던 것이 아닐지요. 이분법은 지양해야겠지만, 어쨌든 다수성을 인정하는 사회란 기존의 지배적 통념들이 나쁜 것이라거나 모자라는 것으로 규정해왔던 것을 동등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일 테고, 타자의 차이와 개체성을 있는 인정하려고 하는 그런 사회이겠지요.. 말이 삼천포로 간 것 같은데, 그러므로 반인반수들에 부착되었던 부정적인 꼬리표는 이제는 다르게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카프카 소설에도 나오듯이 오딧세우스는 세이렌의 노래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던 것이구요. ▶ 원고를 고치시면서 정말 곤욕스럽다고 했잖아요. 또는 잃어버린 시간이라고도 하셨구요. 글을 쓰시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공부라든지 작업이 다 그렇지만 지향점은 있되 자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잘 모른다는 점입니다. 미로를 헤매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목적지란 도착한 후에야 알게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답니다. 이미 예정된 목표만을 밟아 나간다면 사실 새로운 것이란 있을 수 없겠지요. ▶ 현재 공부하고 있는 것들은 어떤 것들인가요· 아직 까마득합니다. 그러나 관심은 언제나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 즉 근세 특히 17세기 네덜란드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를 제대로 하려면 결국은 고대 중세를 전부 검토해야만 해요. 끝이 안나는 작업이죠. ▶ 매우 독특한 책을 발간하셨는데요,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세르가 다 해놓았더군요.. Troubadour of Knowledge에서요. 부지런히 공부하고, 마음껏 살고, 감각하고, 그리고 어느 순간 도서관을 떠나고, 책을 덮으라고 말합니다. 결국 책보다는 삶과 직접 맞부딪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