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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물에서 바다로
2. 열쇠 하나면 족하리 3. 마당 한가운데 감나무 4.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성전 5.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6. 물을 주러 온 불 7. 참된 예배, 참된 삶 8. 낫고 싶은가? 9. 아버지와 아들 10. 나는 생명의 밥 11. 생수가 강물처럼 12.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 13.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다 14. 나는 문이다 1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16.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17. 내가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이때에 왔다 18. 마지막 저녁식사 19. 길과 진리와 생명 20. 보혜사(保惠師) 21. 근심이 기쁨으로 변하다 22. 예수님의 기도 23. 배반 24. 다 이루었다 25. 부활 26. 또 다른 시작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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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일까? 이 세상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 때문이다. 사람 없는 지구, 사람 없는 자연, 사람 없는 하늘, 나 없는 너, 너 없는 나, 나 없는 나라, 나라 없는 나…… 무슨 의미가 있고 아름다움이 있을까? 얼마나 삭막할까? 아기 없는 가정이라고나 할까, 아이들 없는 학교라고나 할까, 신자가 없는 예배당이라고나 할까, 짠맛을 잃은 소금이라고나 할까.
그렇다. 나를 지구에 보낸 것은 하나님이고, 목적은 세상을 사랑하셔서다. 나는 사랑으로 왔고 사랑하기 위해 왔다. 사랑만이 나를 나 되게 한다. 왜? 하나님은 사랑이고, 나는 하나님의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나의 본성도 사랑이다. 사랑하게 되어 있는 존재가 나요, 너와 우리다. 그런 사랑의 본성을 회복하자는 것이 선생님과 우리가 펼치는 운동이요 바람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을 제대로 다 못해 상처받고 아파한다. 사람은 결국 사랑을 먹을 때 비로소 허기가 채워진다. 부모의 사랑을 먹고, 친구의 사랑을 마시고, 이성의 사랑을 구하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영생을 발견하는 것이 우리 사람이 가는 길이다. 요한 선생님이 물이라면 예수 선생님은 불이다. 그 사이에서 나오는 우리 제자들. 정말 멋진 조화 중의 조화가 아닐까? 이것을 깨달은 순간 내 가슴은 정말 터질 것 같았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고, 나라도 함께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내가 나 될 수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는 뭐니 뭐니 해도 나에게 이 물과 불을 만나게 해준 것이다. 예수님도 엊그제 니고데모 위원이 찾아오셨을 때 그러셨다. 물과 불로 거듭나라고. 즉 상극을 만나고 그 조화 속에 거듭남의 비밀이 있다는 말로 들리니 오늘은 참 신기하기만 하다. 사람도 그렇지만 나무나 풀과 같은 모든 생명체가 다 그렇다. 물과 불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나무에 물만 주면 죽고 만다. 나무는 오직 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태양만 쬐면 또 말라죽고 만다. 나무는 햇빛이라는 불로만 살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물과 불의 조화 속에서만 나무는 나무가 될 수 있다. 예수는 인생의 문제를 풀어준 그리스도다. 인생의 문제란 누구에게 나 다 같다. 먹는 문제, 입는 문제, 사는 문제가 다 인생의 문제 아닌가. 예수는 그것을 초월하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다. 먹는 것을 먹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경제학이다. 입는 것을 입는 것으로 풀어보겠다는 것이 정치다. 먹는 것을 먹는 것으로만 해결하려는 한 필히 싸울 수밖에 없다. 입는 것을 입는 것만으로 풀려고 대드는 한 필히 다툴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경제문제든 정치문제든 사회 혹은 문화문제든 뭐라도 좋다. 문제는 문제로 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넘어서야 한다. 넘어서는 길을 예수께서는 보신 것이다. 넘어서는 길을 예수는 들으신 것이다. 넘어서는 힘을 예수는 가지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절대로 심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괜찮다 괜찮지 않다는 판단의 잣대가 없다. 그분 보시기에는 다 좋다. 좋아도 아주 좋다. 심판하시는 일은 우리 아들에게 맡겼다. 어떻게 심판하고 판단하고 살 것인가? 그것을 보고 좋다라고 할 것인가 나쁘다라고 할 것인가. 저것을 보고 아름답다 할 것인가, 추하다고 할 것인가는 우리 스스로 결정하라고 모든 권한을 주신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결정하는 것에 따라 사는 것이 자기가 사는 삶이다. 이것을 모르고 다른 사람이 결정했다고 원망하고 탓하고 있으니 이 또한 죄다. 인생에 최고의 행복은 서렌더를 할 때다. 한 남자가 여자에게 서렌더 할 때, 또 한 여성이 남자에게 서렌더 할 때 결혼의 신비는 열리고 가정의 행복의 문은 열리는 것이다. 회사에 들어가 그 회사에 서렌더하고 나라를 알고 나라에 서렌더 하고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께 서렌더할 때, 바로 내가 회사가 되고 나라가 되고 신이 되는 것이다. 선생님은 바로 진리와 사랑, 하늘 아버지에 절대 서렌더 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가르쳐주셨다. 선생님이 가시는 곳은 언제나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는 폭발적이었고 순간적이었고 즉각적이었다. 예측 불가능한 변화가 언제든 어디서든 일어난다. 그러니 그 변화를 좋아하는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 선생님을 희망으로 보았지만, 유대지방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변화가 없는 종교는 죽은 종교다. 성장이 없는 삶은 죽은 삶이다. 삶은 변화이고 종교는 그 변화를 고양시키는 힘이요 빛이다. 변화를 일으키는 힘과 빛을 잃을 때 종교는 율법으로 타락하고 한낱 도덕 내지는 윤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 있다면 이것이지 무엇이 또 필요한가? 양은 내 음성을 알고, 또 나는 아버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는 아들인 나를 알고……이렇게 알아주는 것,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을까. 눈뜬 이가 예수를 알아보고 있다. 소외되고 버림받은 양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있다. 우리 선생님도 이때처럼 기쁜 때는 없었으리라. 이토록 알아주니 말이다. 하지만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 상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알아주는 세상을 만난다는 것은 은총 중의 은총이다. 그것도 세상이 알아주고, 하늘이 알아주고, 자식이 알아주고, 부모님이 알아주고, 제자가 알아주고, 선생님이 알아주고, 한 여자가 나를 남자로 알아주고, 한 남자가 나를 여자로 알아주는 것. 내가 나라를 알고 나라가 나를 알고, 회사가 나를 알고 내가 회사를 알고…… 그 알아주는 삶, 영원한 생명이다. “그날이 오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할 것이다. 잘 들어두어라. 이것은 나, 예수가 너희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이제 너희들은 아이가 아니다. 어른이다. 그러니 내가 말한다.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고 계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된다. 나는 아버지를 떠나 이 세상으로 왔다. 즉 나 ‘여기 있음’에서 나 ‘이곳 되어감’의 세계로 온 것이다. 때가 되어 왔다. 그런데 이제 또 다른 때가 왔다. 떠날 때다. 이제 이곳 나 되어감의 세계,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문제가 되는 상대세계를 내가 떠날 때가 왔다. 그때를 나는 거역할 수 없다. 그때를 사는 것이 지혜요, 아버지를 믿는 삶이다.” 영생은 별것이 아니다. 육체를 갖고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고, 은하수 건너 어느 공간으로 이동하여 사는 것도 아니다. 내가 이 복음서를 기록하여 여러 교회에 보내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모두가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럼 영생, 생명은 뭐란 말인가? 영생은 바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그럼 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무엇을 하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바로 나를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생은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나를 아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을 알고 성자 예수님을 알고 성령으로 나타난 나를 아는 것이다. 하늘을 알고 땅을 알고 사람을 아는 것이다. 삼위가 일체인 것을 아는 것이다. 사람은 깨끗해져야 한다. 깨끗해야 제대로 보고 깨끗해야 잘 볼 수 있다. 지저분하고 더러우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짐승이다. 그런데 짐승보다 더 더럽고 지저분하게 사는 사람이 그 얼마이던가. 복잡하고 산만하고 더럽고 지저분한 인생들……. ‘하나님께서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은 언제나 깨끗하시니 너희도 언제나 깨끗하라’는 말이다. 깨끗. ‘깨’는 깨어 있으라는 것이고, ‘끝’은 끝까지라는 말이다. 끝까지 깨어 사는 삶이 깨끗이다. 우리는 깨끗에서 왔으니 깨끗하게 살자. 그리고 깨끗하게 죽자. 하나도 남김없이 말이다. 덜 것이 있는 더러운 인생이 아닌, 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깨끗한 인생으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미련 없이, 아쉬움 없이, 다 이루었다 하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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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인간, 삶과 죽음, 법과 자유……
놀라운 깨달음으로 가득한 요한복음을 소설로 읽는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생각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믿고 있음을 기억하라 신약성서 네 권의 복음서 중 하나인 『요한복음』은 여러 가지로 타 복음서와 구별되는 점이 있다. 다른 복음서들은 내용 속 사건들이 많이들 중복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전체 내용의 90퍼센트가 다른 복음서에는 나와 있지 않은 증거들이며, 특히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이나 십자가 죽음 및 부활에 대한 기나긴 상황 설명 등은 『요한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를 무엇으로 유추할 수 있을까? 바로 스스로를 ‘예수가 사랑한 제자’라고 자신 있게 일컫는 제자 요한이 이 복음서의 기록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한의 시선과 마음속 정리를 거쳐 토해져 나온 것이 『요한복음』이요, 또한 『소설 요한복음』이 된 것이다. 이 소설 전반에서 보이듯 요한은 그 어떤 제자보다도 예수로부터 가장 가까이, 거의 항상 곁에 서 있던 인물이다. 바로 그 사도 요한의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철저히 서술되는 이 작품은, 실제 사실의 기록물인 『요한복음』을 소설화 할 수 있었던 최적의 조건이 될 수밖에 없다. 요한의 시선에 잡힌 모든 물리적 영적 현상들과, 이 책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과 표정과 사소한 사소한 몸짓까지…… 이 모두가 요한의 시선과 마음속 정리를 거쳐 토해져 나온 것이 『요한복음』이요, 또한 『소설 요한복음』이 된 것이다. 독자가 직접 요한과 같은 최측근의 제자 입장이 되어 가르침을 받는 경험, 더불어 평소 헤매던 삶과 존재의 문제까지 깨닫게 되는 놀라운 체험으로 이어질 것이다. 내용의 강약과 완급도 철저히 요한의 주관적 시선에 의해 움직인다. 고기 잡는 어부인 그가 예수를 만나 그물을 던져놓고 무작정 따르게 되는 사건은 흔히 생각할 때 예수를 처음 만나는 계기로서 무척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지 않을까 여겨지지만, 그는 짧은 한두 줄의 묘사로 끝내버린다. 그에게 있어 예수를 만난 계기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공식적인 모임에서의 가르침이든, 사소한 상황에서의 한마디 내뱉는 말씀이든 예수의 표현은 무섭도록 기억하여, 혹은 기록하여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 속에서는 예수가 언급했던 모든 말들을 일반적으로 등장인물들의 대사에 붙이는 겹따옴표(“ ” ) 안에 모두 넣어 표현하지 않았다. 오히려 겹따옴표 속 예수의 말보다는, 관찰자이자 묘사자이자 서술자인 요한이 예수의 말을 자신의 서사에 녹여 대신 전달해주는 방식을 쓰고 있다. 주인공은 예수요, 관찰자이자 서술자는 요한이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어느새 주인공보다 관찰자인 요한의 입장이 되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예수의 발자취를 뒤쫓기보다는, 독자가 직접 요한과 같은 최측근의 제자 입장이 되어 가르침을 받는 경험, 더불어 평소 헤매던 삶과 존재의 문제까지 깨닫게 되는 놀라운 체험으로 이어질 것이다 『요한복음』이 보여주고자 하는 삶과 신앙의 속뜻을 오롯이 펼쳐 보여준다. 기독교와 성서를 이야기할 때 ‘깨달음’이라는 단어는 그리 자주 쓰이지 않는 표현이었다. 성서가 보여주는 증거의 기록들, 그리고 성서 속 수많은 가르침들은 그저 배우고 받아들이고 뉘우치고 구원의 확신을 갖는 믿음의 단계를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요한복음』을 탐독할수록 이 복음서야말로 전 구절 모두 깨달음의 코드로 중무장한 책이 아닐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저자 장길섭 목사는 이 책에서처럼 성서를 픽션화하여 재탄생시키게 된 계기가 바로 이 깨달음의 코드를 독자들에게 집중하여 전하고자 함이다. 이는 착하게 살고, 하나님을 믿고, 남을 사랑하라는 당연시되는 깨달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 ‘존재한다’는 것의 진짜 의미, 신과 인간의 관계, 율법과 자유함의 상충을 수시로 다루면서 우리 삶 전반에 문제를 던진다. 이 책의 저자는 메신저가 된 요한을 다시 체화하는 제2의 메신저가 되었다. 그리하여 독자들에게 『요한복음』이 보여주고자 하는 삶과 신앙의 속뜻을 오롯이 펼쳐 보여준다. 깨달음으로 읽는 성서, 삶의 철학으로 읽는 『요한복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욕심에 빠져 자기 뜻을 실현하자는 것이 아니다. 자기 뜻이 실현되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은혜 중의 은혜다. ……나를 배우는 것이 지혜다. 나를 알면 너를 알 수 있다. 왜? 나와 너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기록이 아니다. 인류의 족보도 아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로 읽는 한 아직도 『성경』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다. 그 안에 영생이 있음을 보고, 그 영생이 바로 ‘지금 여기 있는 나다’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는 배웠지만 왜 사랑해야 하는지 쉽게 대답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신을 사랑하는 것과 인간인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사이의 놀라운 비밀을 풀어준다. 하나님을 믿으라고만 가르쳐주었던 『성경』이었지만, 이 책에서는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태어나고 온갖 고초를 겪고 살다 결국 죽고야 마는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지구에 오기 위해 입은 옷 즉, 육체라는 껍데기를 잠시 입고 왔을 뿐이지 ‘원래부터 존재했던,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나’에 대해 요한복음 초반부터 후반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에 걸쳐 설파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 곧 공식적인 집회에서의 설교는 물론이고 사적인 자리에서의 간단한 조언과 지나가는 한마디조차도 모두 자기 체화의 과정을 거쳐 후대들에게 그대로 전해주는 메신저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생생하게 살아나는 예수의 육성, 요한의 놀라운 깨달음들! 책의 제목에 ‘소설’이라는 말을 붙인 것은 이 책이 『요한복음』 배경에 허구의 스토리를 집어넣었기 때문은 절대 아니다. 기록된 사건의 순서와 내용, 설교와 가르침으로 표현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주변 인물들의 반응과 시대적 상황 등은 『성경』 속 『요한복음』 원문과 완전히 동일하다. 다만 앞서 이야기했듯 예수의 최측근에 자리했던 제자 요한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적 경향이 다분히 짙으며, 요한의 가슴 속으로 체화된 고백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소설적 요소는 등장인물들의 사소한 감정변화와, 『성경』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사건 전후로 충분히 도입설명을 하기 위해 저자가 설정한 장면들이다. 가령 요한과 아내인 나라 사이에 태어난 세 자녀에게 ‘자유, 독립, 통일’이란 이름을 지어주거나,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훨씬 큰 듯하여 은근히 시샘하는 요한의 인간적인 면모, 그리고 훗날 예수를 바리새인들에게 팔아넘긴 제자 가롯 유다의 심리 변화를 소설 전반에 수시로 드러내주는 것 등등이 그러하다. 유다는 우리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이미 그 각본을 실행 중에 있었다. 유다는 분명 화가 나 있었다. 며칠 전부터 말이 없었고 얼굴도 잔뜩 굳어진 데다, 좀 전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식사하는 모습도 보였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도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심각해진 얼굴, 무거워진 어깨…… 예수 선생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유다는 선생님이 주시는 빵조각을 받고서 휙 나가버렸다. 그때의 서늘함, 섬뜩함. 때는 밤이었다. -본문 중에서 신앙이라는 것이 우리 삶이나 자신의 문제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완벽히 통합된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요한이 아내 나라를 만나 첫눈에 반하고 결혼까지 하게 되는 과정, 다혈질적 성격이 다분했던 베드로, 점점 변해가는 유다를 탐탁지 않게 보던 요한의 감정, 예수를 완전한 스승으로 받아들이기 직전까지는 ‘예수 형’이라 표현하는 등, 책의 부분부분마다 비록 큰 줄기를 차지하진 않아도 등장인물들의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는 내용은 이 책의 소설적 재미를 느끼게끔 해준다. 저자가 재구성해낸 이러한 가상의 설정은 이 책이 단순히 예수의 발자취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그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는 간접체험을 하도록 만든다. 또한 신앙이라는 것이 우리 삶이나 자신의 문제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완벽히 통합된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