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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본기 漢書 本紀
평사리 2025.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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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석하 고전 번역 총서를 내며
한서서례
『한서』에 관한 짧은 글

1. 고제기
2. 혜제기
3. 고후기
4. 문제기
5. 경제기
6. 무제기
7. 소제기
8. 선제기
9. 원제기
10. 성제기
11. 애제기
12. 평제기

저자 소개7

자는 맹견(孟堅)이며 32년(광무제 8년) 부풍군(扶風郡) 안릉현(安陵縣)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반표(班彪)의 유지를 이어받아 『사기 후전』을 집필하던 중 사사로이 국사를 찬술한다는 중상모략으로 투옥되었다가, 동생 반초(班超)의 상소로 풀려나 후한 명제(明帝) 휘하에서 국사를 편찬하게 되었다. 전한의 왕조사를 편찬하라는 명에 따라 가업 『사기 후전』을 국사로 개편하여 본기 12편과 열전 70편을 완성했고, 이어서 지(志) 10편과 표(表) 8편을 더하여 『사기』의 기전체를 보완함으로써 이후 동아시아 정사의 모범이 된 체제를 세웠다. 이 과정에서 조서와 상소문, 문학 작품 등 일
자는 맹견(孟堅)이며 32년(광무제 8년) 부풍군(扶風郡) 안릉현(安陵縣)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반표(班彪)의 유지를 이어받아 『사기 후전』을 집필하던 중 사사로이 국사를 찬술한다는 중상모략으로 투옥되었다가, 동생 반초(班超)의 상소로 풀려나 후한 명제(明帝) 휘하에서 국사를 편찬하게 되었다.
전한의 왕조사를 편찬하라는 명에 따라 가업 『사기 후전』을 국사로 개편하여 본기 12편과 열전 70편을 완성했고, 이어서 지(志) 10편과 표(表) 8편을 더하여 『사기』의 기전체를 보완함으로써 이후 동아시아 정사의 모범이 된 체제를 세웠다. 이 과정에서 조서와 상소문, 문학 작품 등 일차 사료를 대거 보전했고, 「지리지(地理志)」로 인문 지리적 기틀을 세웠으며, 「예문지(藝文志)」를 통해 도서 분류 체계를 마련했다. 「예문지」 춘추(春秋)류에 『태사공(太史公)』 130편이 수록됨으로써 사마천 개인의 저작물이었던 『사기』가 사서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반고는 부흥한 제국의 질서 수립을 위해 새로운 유학 이념을 가다듬은 유학자이자, 『문선(文選)』 첫머리에 실려 있는 『양도부(兩都賦)』 2수와 『답빈희(答賓戱)』 등을 남긴 한부사대가(漢賦四大家)의 한 사람이다. 『한서』 편찬 중에 낙양 황궁인 백호관에서 열린 토론 내용을 선제(宣帝)의 명으로 기록한 내용이 『백호통의(白虎通義)』로 남아 있다. 흉노 전쟁에 참전했다가 반역에 연좌되어 옥사할 무렵 지은 『영사(詠史)』는 현존하는 오언시 중 가장 이른 작품으로 꼽힌다. 92년, 『한서』를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면서 반고가 남긴 유업은 누이동생 반소(班昭)에 의해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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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芝山

퇴락한 고가에서 먹 가는 소리와 댓바람을 들으며 성장했다. 선조의 유묵을 통해 중국학을 시작했고, 태동고전연구소에서 깊이를 더했다. 한양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인민대학교 등지에서 공부했다. 『고사성어 인문학 강의』, 『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바꾼 역사』, 『한비자, 스파이가 되다』 등을 썼고, 『순자 교양 강의』, 『법가 절대 권력의 기술』, 『어린 왕자』 등을 번역했다. 또 『논어』, 『도덕경』, 『중용』을 한글로 옮겼다. 바둑에 관심이 많아 〈영남일보〉에 기보 칼럼을 연재했다. 대안교육공동체, 꽃피는 학교 등 주로 대안 교육과 관련한 곳에서 강의했다. 현재 베이징에서 칩
퇴락한 고가에서 먹 가는 소리와 댓바람을 들으며 성장했다. 선조의 유묵을 통해 중국학을 시작했고, 태동고전연구소에서 깊이를 더했다. 한양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인민대학교 등지에서 공부했다. 『고사성어 인문학 강의』, 『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바꾼 역사』, 『한비자, 스파이가 되다』 등을 썼고, 『순자 교양 강의』, 『법가 절대 권력의 기술』, 『어린 왕자』 등을 번역했다. 또 『논어』, 『도덕경』, 『중용』을 한글로 옮겼다. 바둑에 관심이 많아 〈영남일보〉에 기보 칼럼을 연재했다. 대안교육공동체, 꽃피는 학교 등 주로 대안 교육과 관련한 곳에서 강의했다. 현재 베이징에서 칩거하며 장자와 들뢰즈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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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조선 후기 학자들의 경전해석을 주제로 연구하여 「16세기 중반~17세기 후반 율곡학파의 경전해석과 분화과정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문을 공부했고, 다양한 전공의 학자들과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임원경제지 상택지』, 『당시 사계 봄을 노래하다』 등의 번역에 참여했고, 정약용의 『상례사전』 번역에 참여하고 있다. 현재 유교경전과 사상사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동중서의 미학사상」으로 석사 학위를, 「중당 문학의 사상적 배경과 그 미의식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문정신으로 동양 예술을 탐하다』 등의 역서가 있고, 논문으로 「유가의 예술정신과 중국문화」, 「송대 이학의 예술미학 사상」, 「한대 경학과 시학: 당송 고문운동 연구를 위한 예비적 고찰」 들이 있으며, 옮긴 논문으로 「중국 예술에 있어서의 의경」(엽랑葉朗)이 있다. 태동고전연구소 한학 연수 과정을 수료했으며,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초빙교수로 있으며 여러 곳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졸업 후 「소식의 황주시기 문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리링의 주역강의』, 『만학지』 등의 번역서가 있고, 소식蘇軾 연구와 관련하여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송나라 소식의 문학과 사상의 관계를 중심으로 연구를 하고 있으며, 향후 북송대 고문가의 문학과 사상의 관계로 범위를 넓히려고 한다.
동아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 후,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현 공주대학교 사학과 조교수로 있으며, 고대 중국의 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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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하碩下는 『주역·산지박』의 ‘석과불식碩果不食’에서 가져왔다. ‘큰 과일은 먹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최후의 보루에서 신념을 지키며 미래를 개척’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았다. 중국 고전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옮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양한 전공자가 토하는 각양각색의 소리가 그대로 세계 속으로 스며들어 밀알이 되기를 희망한다. 함께 ‘소요逍遙’하고자 하는, 뜻 있는 이를 위해 항상 문을 열어 두고 있다. 이 땅에서 번역이라는 과업을 시작한 지 채 100년도 지나지 않았다. 이제 걸음마 단계. 천천히 가겠다. 우보천리牛步千里.

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10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360쪽 | 136*200*30mm
ISBN13
9791160233575

책 속으로

고조高祖는 패현沛縣 풍읍邑 출신이며 성은 유劉씨이다. 어머니가 큰 호숫가에서 쉬다가 꿈에 귀신을 만났다. 그때 어둑해지며 번개와 우레가 쳤는데 아버지 태공이 가서 보니 교룡이 배 위에 있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임신해 고조를 낳았다.
--- p.36 「한서 본기 첫 구절」 중에서

고제가 말했다.
“공들은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는군. 막사에서 작전을 세워 천 리 밖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일로 말하자면 짐은 장자방張子房보다 못하오.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다독이며 군량을 보급하고 병참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으로 보자면 짐은 소하보다 못하오. 백만의 병사를 이끌고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을 세우는 것은 한신이 짐보다 더 낫소. 이 세 사람은 모두 뛰어난 인재인데 짐이 이들을 잘 활용했기 때문에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오. 항우에게는 범증 하나밖에 없었는데도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아서 나에게 잡혔던 것이오.”
--- p.84

“큰바람이 일어나니 구름이 날리는구나. 천하에 위엄을 떨치고 고향에 돌아왔도다. 어떻게 용맹한 병사를 얻어 천하를 지킬까?”
이 노래를 모든 아이가 따라 부르며 익히게 했다. 고제는 바로 일어나 춤을 췄는데 감회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 고제가 패현 장로들에게 말했다.
“나그네는 늘 고향을 생각합니다. 비록 관중에 도읍을 정했지만 죽은 뒤에도 혼백은 패현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그리고 짐은 패공 신분으로 포학한 무리를 토벌하고 천하를 차지했으니 이제 패현을 짐의 탕목읍湯沐邑으로 삼고 이곳 백성의 부역을 대대로 면제해 줄 것입니다.”
--- p.101

이상으로부터 보자면 한나라는 요堯의 운세를 이어서 기운이 왕성했고 흰 뱀을 죽여 상서로운 조짐을 드러냈다. 적색을 숭상하는 기치를 들고 화덕火德에 부합하고자 했으니 자연이 한나라에 감응해 하늘의 정통을 이어받게 된 것이다.
--- p.109

“농업은 천하의 근본으로 이보다 큰일이 없다. 지금 농사를 부지런히 짓는 백성에게 세금을 부과한다면, 농업은 상업과 다를 게 없고, 농사를 권장하는 도道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전조를 없애노라. 고아와 과부에게 베, 비단, 솜을 각각 규정대로 하사하겠노라.”
--- p.150

[찬贊」 중에서: 효문황제는 23년간 재위했지만 궁실宮室, 원유園, 거기車騎, 복식服飾을 늘리지 않았다. 백성이 불편해하면 즉시 금령을 풀어서 백성을 이롭게 해 줬다. 이전에 노대露臺를 지으려고 장인을 불러 비용을 따져 본 일이 있는데, 1백 금이 들었다. 그러자 문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백 금이면 보통 사람 열 집 재산이다. 내가 선제先帝의 궁실에 살면서도 늘 두렵고 부끄러웠는데, 왜 노대를 짓겠는가!”
--- p.158

5월, 지진이 발생했다.
가을 7월 을사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조후 주아부가 하옥됐다가 죽었다.
--- p.172

가을, 태산 아래에 명당을 지었다. 누선장군 양복楊僕, 좌장군 순체荀를 보내 모집에 응한 죄수를 거느리고 조선을 공격하게 했다. 또 장군 곽창郭昌, 중랑장 위광衛廣을 보내 파촉巴蜀에서 군대를 징발하게 해 서남이 가운데 아직 복종하지 않은 자를 평정하게 했다. 그곳에 익주군을 설치했다.
--- p.211

원봉 3년(B.C. 108년) ... 여름, 조선이 우거왕右渠王을 죽이고 항복했다. 조선에 낙랑樂浪, 임둔臨屯 , 현토玄, 진번군眞番郡을 설치했다. 조선과의 전쟁 중에 누선장군 양복이 너무 많은 군대를 잃어서 면직되어 서인으로 강등됐다. 좌장군 순체는 전공을 다투다가 죄를 범해 기시형에 처해졌다.
--- p.212

[찬贊」 중에서: 한漢은 지나간 왕조王朝의 폐단을 이어받았다. 고조高祖는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회복시켰고, 문제文帝, 경제景帝는 백성을 잘살게 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옛 경전經傳과 예법禮法을 상고하는 일에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았다. 효무제는 즉위 후, 결연히 백가百家를 물리치고 유가儒家의 육경六經만을 인정해, 두루 천하에 자문을 구하고 인재를 등용해 이들과 공을 세웠다.
--- p.227

담이耳, 진번眞番군을 폐지했다.
--- p.235

본시 4년(B.C. 70년) 봄 정월, 조칙을 내렸다.
“농사는 덕을 베푸는 근본인데, 올해는 수확이 좋지 않아 사신을 보내 빈곤한 백성을 구제했다. 또 태관은 반찬 가지 수를 줄이도록 하라. 희생 가축도 줄이며, 악부 악사를 감원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짓도록 하라. 승상 이하 도관都官의 령令과 승丞까지 들어온 곡식의 양을 보고하고 장안의 창倉으로 보내 빈민 구제를 돕도록 하라. 수레나 선박으로 곡식을 싣고 오는 백성은 전부(傳符, 통행증) 없이 함곡관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라.”
--- p.253

[찬贊」 중에서: 효평의 치세 동안에는 정치가 왕망에게서 나와 선함과 공적을 드러내어 스스로 높였다. 그 문사를 보니 외방의 온갖 오랑캐가 모두 복종하려 했고, 길한 조짐에 좋은 응답이 있었으며, 칭송하는 소리가 아울러 일어났다. 위로는 기이한 조짐이 나타나고 아래로는 백성이 원망하게 되어서는 왕망도 숨길 수 없었다.

--- p.359 「한서 본기 마지막 구절」 중에서

출판사 리뷰

- 『한서』 「본기」를 어떻게 읽을까?

귀족 문벌 반씨 가문의 ‘중앙 집권적 전제 정치’ 역사서, 『한서』 비판적 읽기
‘타자가 나를 좌지우지하는 폭력’에서 벗어난 역사 읽기를 권한다!

『한서』는 후한 시대 집필된 중국 역사서로, 기원전 206년 한 고조 즉위부터 기원호 23년 왕망의 몰락까지 시기를 다룬다. 『한서』는 「본기」 12권, 「표」 5권, 「서」 10권, 「열전」 70권 총 100권 약 80만자이다. 이 중 「본기」는 한 고조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한을 세우는 「고제기」로부터 「평제기」까지 황제들의 역사를 기전체로 기록하고 있다.

『한서』는 반표, 반고, 반소, 마속이 쓴 단대사斷代史이다. 반씨 가문에서 2대에 걸쳐 썼고, 반소의 제자 마속이 당시 황제인 화제和帝의 명으로 「천문지天文志」를 보충함으로써 완성한다. 반씨 집안과 마씨 집안은 동향으로 황제를 중심으로 외척 관계로 얽혀 있다. 한서를 혈연과 지연을 배경으로 읽으면 “중앙 집권적 전제 정치”를 향한 무의식을 읽을 수 있다고 옮긴이 윤지산은 「한서에 관한 짧은 글」(20쪽)에서 밝힌다.

한서가 사마천 사기를 따라 기전체 형식을 갖췄지만, 사기가 사마천이 자신의 생애 이전 모든 역사를 기록하려는 통사通史라면, 한서는 전한 시기 한 왕조만을 다룬 단대사斷代史이다. 더욱 두드러진 차이는, 『사기』가 엄연한 황제인 혜제 시기를 「본기」 목록에 넣지 않았지만, 『한서』에는 명분뿐인 황제라도 「혜제기」로 싣고 있다. 사기가 「항우본기」를 비중있게 다루는데, 반면 한서는 항우(項羽, 자) 대신 이름인 항적(項籍, 이름)을 써서 「항적전」으로 등급을 낮춘다. 당시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경멸의 의미까지 담고 있다. 사마천이 ‘실實’을, 반고가 ‘명名’을 중시한 것이다.

윤지산은 이를 ‘황제 일인 독재’에 대한 시각 차이로 읽는다. 반표, 반고 부자가 ‘유학/육경/공자’를 절대적 기준으로 설정하지 않고 도덕경의 황로 사상에 물들었다고 사마천을 비판한다. 이는 『한서』 집필에도 드러난다. 「세가」를 짓지 않았는데, 이는 황제 아래 백성은 모두 한갓 신민일 뿐이며 제후 역시 일개 신하일 뿐이라고 본다. 황제 중심의 중앙 권력을 강화하려는 계략이 숨어 있다. 황제로 수렴하는 표준화, 규격화, 절대화 장치들은 백성의 복지가 아니라 백성을 통제하고 수탈하는 데 악용되었다. 사마천은 이런 황제 중심을 의심하고 반고는 강화했다고 봤다.

이는 문체에서도 나타난다. 반표와 반고는 사마천의 문장을 ‘좋다’고 비꼬고, ‘자유분방하다’, ‘지저분하다’고 비판하며, 생동감 넘치는 사마천의 고문古文을 형식적 틀을 강조하는 변려문騈儷文으로 원저자의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고쳐 썼다고 윤지산은 말한다. 변려문은 글자 수를 제한하다 보니 생략과 축약이 많다. 한두 글자로 의미를 담으니 당연히 번역도 어렵다. 이런 ‘변려문’으로 규격화는 황제가 모든 것을 규준 아래 두려는 통제, ‘황권 강화’와 무관하지 않다. “고문과 변려문의 대립은 역사 내내 심지어 현재까지 이어진다”고 윤지산은 일갈한다.

그럼, 왜 반씨 부자는 ‘황제’라는 명분이 필요했을까? 반씨 집안은 황실과 외척 관계를 맺을 만큼 귀족 문벌이었다. 반황의 아들 반유는 유방의 이복동생의 후손인 유향과 친했다. 유향은 중국 최초 도서 목록인 『별록』의 저자였다. 또 전한(서한)을 무너뜨린 왕망은 반유를 형으로, 반치를 동생으로 대했다. 왕망이 제압당했을 때 반표가 「서전敍傳」에서 구구하게 반치를 위해 변명한다. 반치는 사형을 면한다. 반씨 일가는 황권을 능가할 만큼 막강했다. 귀족 문벌은 ‘황제’라는 허울뿐인 명분이 필요했고, 황제의 얼굴 아래 수렴하는 기준, 법률, 표준을 이용해 권력을 농단한다.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된 사마씨 일가와 달리, 반씨 일가는 심한 죄를 지어도 늘 사면되었다. 이처럼 『한서』에는 문벌 귀족의 야망이란 무의식이 작동한다. 중국 역사서가 우리 무의식에 스며든 것들이 궁금해지는 이유다.

문자는 현상과 본질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사건과 인물을 선택, 분류, 범주화할 때 편집자의 시각과 편견이 스며든다. 『사기』와 『한서』 모두 왕과 그 주변 인물, 위인들의 역사다. 역사는 이런 점에서 선택과 분류라는 ‘폭력’이다. 윤지산은 이를 ‘범주화의 폭력’이라 표현하며, ‘타자가 나를 좌지우지하는 폭력’에서 벗어난 역사 읽기, 『한서』 읽기를 권한다.

- 석하 고전 연구소의 『한서』 완역 대장정, 그 첫 책

2010년대 초반에는 우리에게는 『한서』 완역이 없었다. 중국 한나라 시기의 학문과 문화를 공부하던 학자 셋, 서진희(동중서 연구, 홍익대 초빙교수), 권민균(한나라 박사博士 제도 연구, 공주대 사학과 교수), 윤지산(장자와 들뢰즈 연구, 인민대학교 박사 과정)이 의기투합해 번역 모임을 시작했다. “원문을 철저히 독해할 것, 한글 어법을 충분히 고려할 것, 재독과 교정, 수정을 주저하지 말 것”이라는 원칙 세웠다. 실전에 들어서니 갈등과 난관이 기다렸다. 글쓰기 습관이 서로 너무 달랐고 변화를 완고하게 거부했다. “복수 접미사 ‘들’, ‘한 잔의 커피’와 ‘커피 한 잔’의 차이, 명사와 명사 사이에 오용하는 ‘~의’, ‘적的’의 남용, ‘~기/~음’ 같은 동명사형, ‘자동사와 타동사’ 구분 등등 어쩌면 지극히 사소한 문제가 자주 떠올랐고, 그때마다 신체가 거부하는 듯 좀체 변화가 따라오지 않았다.”(4쪽) 인고의 세월에 언뜻, ‘화이化而’가 찾아왔다. 서로 자연스레 보조를 맞추고 리듬을 탔다. 『한서』 「본기」의 초벌은 그렇게 세 연구자가 이루었다. 후에 차영익(고려대 박사), 강민우(성균관대 박사)가 승선해 다시 묻고 토론하며 원고를 재차 다듬었다.

번역에 참여한 다섯 연구자는 태동고전연구소에서 수학한 선후배 사이로 청명 임창순 선생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거나 그 맥을 이어받은 제자이다. ‘석하碩下’란 이름은 『주역』 「산지박」의 ‘석과불식碩果不食’에서 왔다. ‘큰 과일은 먹지 않는다’라는 뜻인데, ‘최후의 보루에서 신념을 지키며 미래를 개척’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석하 고전 연구소는 ‘중국 고전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옮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서』 「열전」를 번역 중이다.

* 당나라 시기 『한서』 편찬을 이끈 안사고(顔師古, 581~645)의 「한서서례漢書敍例」를 번역하여, 『한서』를 추리고 갖추는 과정에서 있었던 편집 의도를 엿볼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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