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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계를 말해주면…"
2. 자아는 연속이 아니라 대립이다 3. 한국인들은 왜 늘 '우리'라고 말하면서 '나'로 행동할까? 4. 악은 무관함이다 5. 한국인들은 악을 믿어야 할까? 6. 세계화는 악이다 7. 세계화는 계몽인가? |
남상일(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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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국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매우 나쁜 짓을 한다면 내 친구들과 가족이 알게 되고 나를 더 이상 존중해주지 않을 거예요. 내 자리를 내주려 하지 않겠죠." 또 어떤 한국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 행동은 단지 나의 것만이 아니라 내 가족의 것이기도 해요. 내가 나쁜 짓을 한다면 내 가족도 나쁜 인상을 받게 되죠." 이게 바로 수치심일까? 자신의 행위에서 가족이라는 특수한 타자들을 염두해 두고 있으므로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심리는 단지 체면을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공동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했다는 개인적 좌절감이기도 하다. 이것은 과연 사랑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보다 덜 '성숙'한 것일까?
한국인들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더 이상 수치심과 죄의식을 구분하기 어렵다고 느꼈다. 그것은 한국인들의 마음에서 그 개념들이 혼동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구분이 애초부터 즉 2500년 전부터 (공자 이래로 - 옮긴이) 불분명했기 떄문이다. 플라톤은 체면을 지키려는 피상적인 관심을 보편 원칙을 추구하는 심오한 관심으로 대체하지 않았따. 프로이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타자에게 향할 수 있는 공격성을 자아에게로 되돌림으로써 자아가 마치 외부적인 힘인 것 처럼 만들었다. 그 결과 외부의 감시자가 없는 데서도 이타적으로(즉 자아의 욕망과는 반대로) 행동하는 능력이 배양되었지만, 우리는 그런 전략에서 실제보다 많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그것을 적절한 수치심 이상의 심오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p.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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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는 악이 없다?!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인과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해왔다. 17세기 제주도에 표류한 네넬란드인 하멜에서부터 구한말의 비숍 여사를 거쳐 2000년 연예계 활동에 여념이 없는 이탈리아인 브루노에 이르기까지. 남들은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타인의 시선을 특히 많이 의식하며 그만큼 남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해하는 우리는 사실 우리도 모르는 바 아닌 우리의 습성들을 보며 낯뜨거워 하거나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나간다.
바야흐로 우리나라에 밀어닥친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외국인이 바라보는 한국에 대한 책들이 쏟아지는 이즈음 우리는 한 미국인 교수의 아주 특별한 시선을 공개한다. 그는 한국인들의 심리를 '악'이라는 다분히 서구적인 개념을 가지고 접근하여 오늘의 우리가 세계화를 받아들이는 심리를 분석한다. 그리고 그는 이 논의 전개 과정에서 철학, 심리학, 문화인류학 등 서구 인문학의 자산들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이 책은 원래 'Think No Evil'이라는 한국인이 소화하기에는 조금 난해한 제목을 달고 있었다. 우리가 이 책의 제목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악'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악'의 개념이 없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어쩌면 우리가 그런 의문을 갖는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악의 개념이 없다는 것의 반증이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한국인들에게도 '나쁘다' '악하다' '사악하다'와 같은 말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나쁜 날씨' '나쁜 개' '나쁜 친구' '나쁜 물건' 등에는 그것을 묶을만한 공통점이 없다. 즉 추상화된 개념으로서의 '악'이 존재하지 않는것이다. 이에 비해 서구인인 앨퍼드 교수는 인터뷰한 어떤 한국인 여대생으로부터 선생님은 악이 뭐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답변한다. "남에게 상처를 주는데서 쾌락을 느끼고 그것을 뉘우치지 않는거죠."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와 같이 악을 추상적으로 정의하고 이해하는것이 무척 낯설고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한국인의 심리에 관한 보고서』로 바뀌게 되었다. 한국어판 제목을 이렇게 잡은 이유는 이 책의 논의가 한국인의 심리에는 악의 개념이 없다는데서 출발하여 한국인의 자아와 세계화를 맞는 한국인의 심리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악'이란 사실 서구의 이원론적 사고의 산물이다. 서구는 그리스도교라는 유일 신앙의 역사를 전개해오면서 '악'을 탄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전지전능하며 지선(至善)한 신이 인간에게 일상사에서 겪는 고통들을 준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기에 결국 신으로부터 파생된 사탄이라는 존재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이에 비해 동양 사상에서는 일찍부터 조화와 하나됨을 강조하였다. 모든것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는 세계에서는 악이 생겨날 어떤 틈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도 동양인들은 '악'이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조화로운 삶을 살고 있을까? 그 답이 'No'라는 것은 우리의 생활을 보아도 너무 자명하다. 기업가들은 막대한 자금을 로비에 쏟아붓고 정치인들은 정치자금의 명목으로 그 돈을 받고 있다. 불합리한 징세 구조에서 살아남기 위해 큰 기업부터 작은 기업에 이르기까지 너나 할 것 없이 이중 장부를 만들고, 실력보다는 학연, 지연, 인맥이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된다. 그러나 '죄가 밉지, 사람은 밉지 않은' 선하기 이를데 없는 한국인들은 악의 정체를 스스로 은폐하면서 죄에 대한 징계(형평성에서 늘 의심을 받는)만을 하고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런 사고방식은 악을 은폐하며 악의 당사자에 대한 책임을 모호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비리 자금을 받은 정치인이 개인적으로 딱한 사정에 빠져 그 돈이 필요해 어쩔수 없이 받았다면 그에 대한 따뜻한(?) 동정의 시선이 퍼지고 마는것이다. 직시하기 힘든것은 대충 없는것으로 얼버무려 결국 그 두려움의 실체가 더욱 커다란 힘을 갖게 하고 마는 우리의 사고방식 한가운데에 세계화는 자리잡고 있다. 앨퍼드 교수는 한국인들을 인터뷰하는 가운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비록 세계화를 악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앞에서도 보았듯 한국인들은 그 어떤것도 악이라고 하지 않는다) 세계화를 악으로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한국인들이 세계화를 자본주의 시장과 도구적 이성인 관료제가 일상생활의 구석구석에 침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세계화는 한국인들에게 가난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과 인간적 유대가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동시에 안겨준다. 파우스트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세계화는 한국인들에게 영혼을 팔아넘기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