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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6·25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공포감과 순응주의의 내면화 · 5 ‘6·25 심성’의 지배를 받는 사회 · 7 1950년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 8 1950년대의 두 얼굴 · 10 진정한 화해를 위하여 · 12 ‘증오·혐오의 대량생산 체제’를 넘어서 · 14 제1부 1950년: 골육상쟁의 근본주의 제1장 ‘공갈 때리기’의 비극 이승만 정권의 미신이 된 북진통일론 · 31 북한의 음흉하고도 실질적인 남침 준비· 33 6·25 이전의 학살극 · 34 브레이크가 없는 이승만의 허풍 · 36 농민에게 농지를 돌려준 농지개혁 · 38 ‘공갈 정책’의 비극적 말로 · 40 반공의 ‘정치 상품화’, 매카시즘 · 42 역사 산책 1 “음력설을 쇠는 악덕배들의 광태” · 45 제2장 이승만의 참패로 끝난 총선거 미국의 ‘선거 연기’ 반대 · 47 중간파의 승리로 끝난 총선 · 49 중간파에 가해진 탄압 · 51 ‘내가 승리한 것이요’ · 53 민중은 민국당도 거부했다 · 54 이승만과 김일성의 ‘책임 윤리’의 부재 · 56 제3장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40분 ‘남침 유도설’을 낳을 정도의 무방비 · 58 오판과 오보의 연속 · 59 “미국인 2,500명을 우리가 다 죽이겠소” · 62 이승만의 거짓 녹음 방송 · 64 제4장 이승만과 정부의 갈팡질팡 서두른 한강 다리 폭파 · 67 인민군의 서울 점령 후 3일간의 수수께끼 · 70 그들이 대한민국을 망치고 있었다 · 72 도망 다니기에 바빴던 이승만 · 74 스미스 부대의 참패 · 76 한국군의 작전지휘권 이양 · 78 낙동강 방어선 구축, 다부동 전투의 승리 · 80 역사 산책 2 채병덕과 신성모 · 83 제5장 서울에서 벌어진 ‘서바이벌 게임’ 처단인가, 포섭인가? · 86 선전전에 동원된 남한 정치인들 · 87 이병철과 박헌영과 시보레 자동차 · 89 인민재판과 기회주의 · 91 서울 시민들의 일상적 삶 · 93 아귀다툼을 낳은 굶주림 · 96 제6장 학살: 뿌리 뽑고 씨 말리기 골육상쟁의 근본주의 · 98 20만 명을 죽인 국민보도연맹 학살 · 100 ‘혈서 충성 맹세’로 살아남기 · 102 ‘나주 부대’의 ‘함정 학살’ · 104 임철우의 ‘곡두 운동회’ · 105 제7장 노근리: “모든 피난민을 향해 사격하라” 미군의 3박 4일 인간 사냥 · 107 피난민은 작전에 귀찮은 존재 · 109 미군의 인종차별주의 · 111 44년간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 · 114 제8장 두 얼굴: 학도병과 상류층 ‘돼지몰이’로 불린 상류층의 일본 밀항 · 117 쌍권총으로 무장한 김두한의 활약 · 118 학도의용군의 참전 · 120 남한 소년병들끼리의 전투 · 123 제9장 적반하장: 도강파와 잔류파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 125 “내가 국민 앞에 왜 사과를 해” · 128 엉망진창 부역자 재판 · 130 서울에 잔류했던 사학자 김성칠의 증언 · 132 ‘빨갱이년’으로 몰린 박완서의 증언 · 134 역사 산책 3 얼굴 없는 ‘켈로부대’ · 136 역사 산책 4 제주 4·3 사건과 ‘귀신 잡는 해병’ · 139 역사 산책 5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 142 역사 산책 6 ‘시민증이 없으면 죽은 목숨’ · 145 제10장 악순환: 피를 보면 피에 굶주린다 ‘한 많은 미아리 고개’ · 147 고양 금정굴 민간인 학살 사건 · 149 오두리 마을의 비극 · 151 병균의 논리로 정당화한 학살 · 152 제11장 “평양 점령은 수치였다” 국군과 유엔군의 38선 돌파 · 154 트루먼과 맥아더의 회담 · 157 이승만과 미군의 갈등 · 158 ‘반성의 시기에 날뛰는 한국인들’ · 160 약탈에서부터 무너진 전선 · 162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 · 164 제12장 신천 학살, 중국 참전, 미국 원자탄 남북 합작의 ‘인간지옥’ · 167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라는 ‘손님들’ · 169 ‘‘전 한반도는 끔찍한 잿더미’ · 171 미국의 도취, 중국의 참전 · 172 중국군의 ‘인해전술’ 또는 ‘유격전술’ · 175 트루먼의 ‘원자탄 사용 검토’ · 177 역사 산책 7 소련과 일본의 비밀 참전 · 178 제13장 함평과 흥남: 두 개의 다른 지옥도 함평 주민 524명 학살 · 181 견벽청야는 제11사단 작전명령 · 184 흥남 철수 작전 · 185 배를 타지 못한 사람들의 저주 · 187 제14장 “전쟁의 최초 희생자는 진실이다” 신문들의 활동과 ‘PRESS 완장 특권’ · 190 종군기자들의 어려움 · 192 TV 없는 라디오 방송기자의 활동 · 194 만화·문학·영화의 참전 · 195 제2부 1951년: ‘톱질 전쟁’의 와중에서 제1장 1·4 후퇴: 서울에서 부산까지 ‘무인지경’으로 변한 서울 · 201 유엔군의 견벽청야 · 203 피난민으로 뒤덮인 부산 · 204 강원용의 지옥 체험과 증언 · 206 리영희의 지옥 체험과 증언 · 208 제2장 맥아더와 리지웨이: 원자폭탄과 몰살 작전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의 부임 · 210 맥아더가 계산해놓은 원자탄 26개 · 212 리지웨이의 ‘몰살 작전’ · 213 공산군의 ‘도덕적 승리’? · 215 추위와 굶주림으로 무너진 중국군 · 216 제3장 국민방위군: 9만 명을 죽인 ‘해골의 행렬’ “동사·아사·병사를 방치한 천인공노할 사건” · 218 육군 통역 장교 리영희의 증언 · 220 김윤근·신성모·이승만의 적반하장 · 222 국민방위군 고위층의 거대한 예산 착복 · 223 규명되지 않은 정치자금 조성 의혹 · 225 “국군 병사는 죽을 때 ‘빽’ 하고 죽는다” · 228 제4장 거창: 무엇을 지키기 위한 전쟁인가? ‘거창 양민 학살: 그 잊혀진 피울음’ · 231 신성모의 사건 은폐 지시 · 233 조병옥과 이시영의 고언 · 236 이승만의 특정인 총애 · 238 역사 산책 8 이승만의 김종원·김창룡 총애 · 241 역사 산책 9 거창, 그 이후 · 243 제5장 해리 트루먼의 더글러스 맥아더 해임 ‘공동묘지’로 변한 서울 · 246 트루먼에게 도전한 맥아더 · 249 원자탄 사용을 원했던 이승만 · 251 지리멸렬 상태에 빠진 한국군 집중 훈련 · 252 더글러스 맥아더는 ‘영웅’인가? · 254 한국에선 영웅이었던 맥아더 · 256 역사 산책 10 6·25로 인한 전 국토의 묘지화 · 259 제6장 휴전회담: 개성에서 판문점까지 소련의 휴전 제의 · 261 7월 10일에 시작된 정전협상 · 263 ‘기 싸움’과 ‘눈 싸움’ · 265 한국을 배제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 267 정전회담장의 ‘슬픈 에피소드’ · 270 제7장 지리산에서 ‘쥐잡기 작전’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 273 빨치산 투쟁의 행태 · 276 고은의 빨치산 시 · 278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의 최후 · 279 제8장 이승만의 자유당 창당 이승만, “이젠 정당이 필요하다” · 282 이범석은 누구인가? · 283 ‘원내 자유당’과 ‘원외 자유당’ · 284 “이승만이 국민의 지지는 받았다”? · 287 제9장 전쟁 중의 뜨거운 교육열 ‘애국복권’ 열풍과 도박 성행 · 289 ‘삼팔따라지’의 교육열 · 290 6·25 전쟁 중의 교육 · 291 대학은 징집 회피의 수단 · 293 이승만 왕조 시대의 관존민비 · 295 제3부 1952년: ‘군사 전쟁’과 ‘정치 전쟁’ 제1장 미국은 세균폭탄을 투하했는가? 북한과 중국의 세균전 항의 · 299 스스로 의혹을 키운 미국 · 301 이승만, “휴전은 소련의 흉계” · 303 제2장 부산: 경계가 없는 전쟁과 정치 ‘쓰레기통’과 ‘장미꽃’ · 306 자유당의 승리로 끝난 지방선거 · 308 조작된 ‘무장공비 사건’과 계엄령 선포 · 310 부통령 김성수의 ‘사임 이유서’ · 312 미국의 이승만 제거 계획 · 314 미국이 개입한 발췌개헌안 타협 · 315 역사 산책 11 이승만의 이종찬에 대한 분노 · 319 역사 산책 12 이승만 암살 미수 사건의 진상 · 321 제3장 거제도: 6·25 전쟁의 축소판 17만 6,000여 명의 포로 · 324 포로수용소는 제3전선 · 326 ‘자동송환’ 대 ‘자유송환’ 공방전 · 327 수용소 사령관 납치 사건 · 329 미군의 수풍댐 폭격 · 332 평양 폭격과 백마고지 전투 · 333 제4장 대통령 선거: 이승만과 아이젠하워 중석불 사건 · 335 77세 대통령, 81세 부통령 후보 · 337 이승만 74.6%, 조봉암 11.4% · 338 미국의 대통령 선거 · 340 아이젠하워의 한국 방문 · 342 “백만학도에게 북진 명령을!” · 345 역사 산책 13 ‘청계천 화장실’과 ‘아이젠하워 양변기’ · 347 제5장 조선방직·삼성물산·기아산업 부산 조선방직 노동쟁의 사건 · 350 자유당의 하부 단체로 편입된 대한노총 · 352 1년 만에 17배로 커진 삼성물산 · 354 ‘삼천리호’ 자전거의 탄생 · 356 제6장 전쟁 속의 언론과 대중문화 피난지 부산에서 신문의 활동 · 358 ‘나는 너를 싫어한다’ 사건 · 360 라디오 방송과 전쟁 공보 영화 · 362 「아내의 노래」와 「전선야곡」 · 364 국군 장병 위문 · 366 상이군인의 분노와 비극 · 368 전쟁 중에도 크리스마스는 찾아온다 · 370 주 · 373 |
康俊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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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중국에서 장제스가 실패한 경험에 비추어볼 때에 한국인들이 장래의 한국 운명을 결정할 것이므로 남한의 내정 개혁 없이는 미국 정부가 부패하고 독재적인 이승만 정권에 아무리 원조해야 소용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 남한에 무기를 줘봐야 중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국이 중국 국민당 정부군에 공급한 무기를 가지고 한 번 싸워보지도 않고 공산군에 투항해 결국은 공산군이 미국 무기를 장제스와의 전쟁에 사용한 것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으로 우려했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 정부는 그런 문제는 아는 바 없다는 듯, 음력설을 쇠는 것을 금지, 아니 탄압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운 것처럼 보였다. 이승만은 여전히 의연하게 1950년 3·1절 기념축사에서도 북진통일론을 역설했다. 이승만의 허풍엔 브레이크가 없었다. 이승만은 4월 6일 북한에 유엔 감시하에 인구비례에 의해 국회의원을 선출해 대한민국 국회에 합류하여 통일 정권을 수립하자고 주장했다. 김일성과 박헌영 등도 죄를 용서하고 포섭하겠다는 쓸데없는 ‘아량’까지 베풀었다.
--- p.38 「제1부 제1장 ‘공갈 때리기’의 비극」 중에서 나주 부대란 인민군이 공격해오자 나주경찰서 경찰관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100여 명 규모의 임시부대였다. 이들은 전남 강진·해남·완도·진도 등지로 후퇴하면서 이상한 짓을 저질렀다. 나주 부대는 7월 하순께 전남 해남군 남창에서 완도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완도중학교 교사가 전화를 받자, “우리는 인민군이다. 완도로 간다”고 밝혔다. 이에 완도에서는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시가지 환영대회까지 준비했다. 나주 부대는 인민군으로 위장해 그 환영대회에 참석한 후 그 자리에서 ‘인민군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을 사살했다. 이 같은 ‘함정 학살’은 해남과 완도 지역의 여러 곳에서 계속 이루어졌다. 이들의 위장술은 탁월했다. 인민군 복장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마을로 들어설 땐 오랏줄로 묶은 우익 인사들을 앞장세우고 왔기 때문에 주민들은 그들을 인민군으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나주 부대의 일부는 마을을 돌며 좌익 색출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 p.104-105 「제1부 제6장 학살: 뿌리 뽑고 씨 말리기」 중에서 한반도 땅덩어리가 좁은 탓이었겠지만, 6·25 전쟁은 전형적인 ‘톱질 전쟁’이었다. 톱질을 하듯이 왔다갔다하면서 점령과 후퇴를 반복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더 비극적이었다. 전선이 왔다갔다하면서 죽어나는 건 민간인들이었다. 누구를 지지하는가? 이들에게는 이런 고문이 강요되었고, 그 와중에서 수많은 사람이 학살당했다. 게다가 톱질 전쟁은 전선이 따로 없는 전 국토의 전선화(戰線化)를 초래했기 때문에 빨치산 투쟁을 낳았고, 이는 민중들 사이에 원한관계를 만들며 그 원한이 민간인들 상호간에 학살을 일으키기도 했다. 1951년 1월 1일 중국군 6개 군단이 38도선을 돌파해 남하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1950년 12월 24일 서울 시민들에게 대피령을 내렸지만, ‘빽’과 줄이 있는 사람들은 얻어들은 게 있어 이미 12월 초부터 피난길에 나섰다. 12월 말 80만 명이 넘는 서울 시민이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했다. --- p.201-202 「제2부 제1장 1?4 후퇴: 서울에서 부산까지」 중에서 미국과 소련·중국·북한이 원하는 일을 이승만이 뒤집을 수는 없었다. 특히 이승만을 돕는 미국으로선 한반도에서 전쟁은 지리적으로 워낙 불리했기 때문에 제한전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는데다 인명 피해가 워낙 막심했기 때문에 휴전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1951년 6월 말 현재 미군 피해만 하더라도 사망 2만 1,300명, 실종·포로 4,400명, 부상 5만 3,100명이었다. 맥아더의 뒤를 이어 유엔군 사령관이 된 리지웨이는 김일성과 중국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에게 6월 30일 휴전회담을 제의했고, 이들은 7월 1일 이 제의를 수락했다. 리지웨이는 6월 30일 성명에서 회담 장소로 원산항 근처에 있던 덴마크 병원선을 제의했지만, 개성을 원한 북한과 중국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개성은 북한의 점령 지역으로 15킬로미터를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유엔군 측이 심리적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는데, 북한은 바로 이걸 노린 것이었다. 게다가 회담 장소는 유엔군 작전 지역에서 제외되는 성역이 될 것이기에 북한 측은 개성 지역을 확실하게 확보할 수 있는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 p.263 「제2부 제6장 휴전회담: 개성에서 판문점까지」 중에서 1951년 한국의 내정(內政)을 취재하고 간 외국 기자들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한다는 것은 쓰레기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격”이라고 혹평을 하면서 적당한 선에서 휴전을 하고 손을 떼는 것이 좋겠다는 말들을 했다. 이 말은 영국의 런던 『타임스』가 1951년 10월 1일자 사설에 인용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외국 기자들은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사건을 보고 그런 결론을 내렸겠지만, 이 말은 1952년 봄에 일어난 이른바 ‘부산 정치 파동’에 대한 평가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1951년 11월 30일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공고 기간을 마치고 1952년 1월 28일 표결에 들어갔는데, 재석의원 163명 가운데 가결이 19표, 부결이 143표, 기권이 1표 나왔다. 이에 이승만은 “국회의원이 잘못하면 국민의 투표로서 소환한다”는 협박 성명을 냈다. 그 성명의 정신을 이어받은 ‘원외 자유당’은 18개 사회단체를 규합해 개헌안 부결 반대 민중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민의를 배반한 국회의원들을 소환하라”는 소위 국회의원 소환운동을 전개했다. --- p.306-307 「제3부 제2장 부산: 경계가 없는 전쟁과 정치」 중에서 기아산업의 창업주 김철호는 1923년 18세의 나이로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철공소 견습공으로 일하면서 자전거와 인연을 맺었다. 1930년 일본에서 기계부속품 제작회사인 삼화제작소를 설립, 꽤 큰돈을 모았던 김철호는 해방 1년 전인 1944년 8월 귀국, 그해 12월 1일 서울 남대문로 5가에 경성정공(주)을 창업했다. 이 회사가 바로 기아산업의 전신이며 삼천리자전거공업(주)의 모체였다. 창업 이후 한동안 중고 자전거의 차체나 부분품을 분해해 재생하거나 조립하는 일에 매달렸던 경성정공은 자전거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자 1946년 1월 영등포공장을 준공하면서 국산 자전거 개발에 착수했지만, ‘자전거 기술의 꽃’이라는 림의 벽은 뛰어넘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림 개발은 김철호가 일본에서 삼화제작소를 운영할 때 알게 된 일본인 기술자 와다 에이이치(和田英一)를 기술고문으로 영입해옴으로써 해결되었다. 그게 1951년 9월이었다. 1952년 1월 회사 이름을 기아산업으로 변경한 경성정공은 그 후에도 숱한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마침내 그해 3월 12대의 자전거 시제품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 p.356-357 「제3부 제5장 조선방직, 삼성물산, 기아산업」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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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 한국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그 모든 것은 어떻게 달려왔는가?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키다” 우리가 살아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현대사는 역사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다. 끊임없는 선택 속에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는 역사학계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민감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면서도 그 나름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참여의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독보적이다. 지금의 ‘나’를 이룬,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보물창고’와 같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부터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7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대중문화·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삶과 역사의 무대를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방대한 주석에 당시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 ‘역사 산책’ 코너 등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恨)과 욕망의 폭발’(1940년대), ‘극단의 시대’(1950년대), ‘기회주의 공화국의 탄생’(1960년대), ‘수출의 국가종교화’(197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1980년대), ‘분열은 우리의 운명, 연대는 나의 운명’(1990년대), ‘노무현 시대의 명암’(2000년대), ‘증오와 혐오의 시대’(2010년대) 등 각 시대를 지배했던 정서와 구조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주제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진보’의 이름으로 새로운 가치를 선점할 수 있듯이 극단과 궁핍의 시대를 살아남아야 했던 과거 세대의 ‘아픔’도 함께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가 ‘인간’을 배제했던 역사라고 간파하며 ‘인간’의 복원,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이념과 세대의 새로운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킨 한국 최초의 단행본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끝나지 않은 전쟁, 민간인 학살 6·25 전쟁은 ‘이원(二元) 전쟁’이었다. 군인들끼리 싸운 전쟁이 그 하나라면 또 하나의 전쟁은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민간인 학살은 군과 경찰에 의해 저질러졌을 뿐만 아니라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저질러졌기 때문에 더욱 비극적이었다. 민간인 학살은 한국의 일그러지고 뒤틀린 근·현대사의 역사적 모순과 질곡의 표현이자 결과이기도 했다. 램지 클라크는 “미국에서 한국전쟁은 ‘잃어버린 전쟁’으로 불린다”며 “당시 3천만 인구 가운데 10%가 넘는 민간인이 몰살당한 전쟁을 국제사회가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극”이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6·25 전쟁은 ‘잊혀진 전쟁’일 뿐만 아니라 ‘끝나지 않은 전쟁’이기도 하다. 1999년 9월 AP통신이 미군에 의한 노근리 학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이후 전쟁 중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있었던 사실을 있었던 그대로 밝히는 것도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그 전쟁은 6·25 전쟁 이후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수행되어왔다. 북진통일 궐기대회가 판치는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오직 빨갱이에 의해 죽었을 때에만 그 진상규명이 허용되고 장려되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의 진상규명은 반역이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은 “신문사를 습격하건, 법원에 난입하건, 공공집회를 무법천지로 만들건, 정치인을 백주에 테러하건, ‘반공용사’들이 했다고 하면 붙잡지 않았”고, “어떤 사람이건, 어떤 행위건 ‘나는 반공을 하는 사람이다’라는 말만 하면 그것에 저항하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4·19 직후, 6·25 전쟁을 전후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 진상규명에 나선 ‘전국 피학살자 유족회’는 유족들의 신고를 바탕으로 114만 명이 국군의 손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보고서를 냈는데, 이들은 빨갱이로 몰려야 했다. 이후 이들은 입을 닫아야 했고, 4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기독교의 반공, 친미, 기복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 신앙이라는 ‘반공의 보증수표’가 부도날 염려가 없을 정도로 반공의 전선에 앞장섰다. 예컨대, 전쟁이 발발한 다음 날인 6월 26일 서울에서는 교파를 초월한 개신교 단체인 ‘대한기독교구제회’가 조직되었고 7월 3일 대전에서 목사 한경직이 앞장서서 ‘대한기독교구국회’를 만들었다. 이들은 남한 지역 30개 도시에 지부를 설치하고 국방부·사회부와 협력해 선무와 구호, 방송, 의용대 모집 등 반공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선무공작대’를 조직해 남한 전역에서 활동했으며 ‘기독교 의용대’라는 단기 군사훈련을 거쳐 전선에 배치되기도 했다. 기독교 지도자와 신자들은 단순한 참전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을 합리화하며 정당성을 부여했다. 물론 그 논리는 종교적인 것이었다. 특히 한경직은 인천상륙작전 당시에 대한기독교구국회 회장으로서 군복을 입고 참여하는 등 맹활약을 했다. 반공은 곧 친미를 의미하고 친미는 곧 친기독교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6·25 전쟁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렇다면 기복은 이에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전쟁 중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도 복이었겠지만, 죽을 염려는 피한 전후의 잿더미에서는 좀더 현실적인, 즉 물질적인 복을 구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수단은 여의치 않았다. 기복 신앙은 전후의 잿더미와 비교되어 엄청난 풍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 미국을 닮고 자본주의 정신에 투철해지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미국에 대한 동경과 숭배, 물질에 대한 한의 종교적 표현이 바로 기복 신앙이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기복 신앙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마저 갖게 되었다.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한 한국의 기복 신앙은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했던 한국의 역사적 상황이 낳은 산물이었다. 『한국일보』 창간과 기독교방송 개국 1954년 6월 9일 공식적으로 상업주의를 표방한 『한국일보』가 창간되었다. 이 신문은 창간호 사설에서 ”‘리얼리즘’에 입각한 상업신문의 길을 개척하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일보』의 사주는 은행가 출신으로서 2년 동안 『조선일보』 사장을 지냈던 장기영이었다. 그는 탁월한 경영 능력을 발휘해 그가 『조선일보』를 맡은 후 1년 동안 발행 부수는 350%가 늘어났고, 지대 수입은 640%, 광고 수입은 518%가 늘어났지만, 그의 개성이 강한 운영 방식과 독자적인 영향력 구축이 방씨 일가와 갈등을 빚어 임기의 반도 지나지 않고 중도 퇴임했다. 장기영은 『조선일보』를 그만둔 지 2개월도 안 된 시점에서 경영난을 겪고 있던 『태양일보』를 인수해 『한국일보』를 창간했다. 장기영은 국내 최초로 1954년 8월 1일 기자 제1기 6명을 공채한 이후 정기적으로 기자를 공개 채용해 다른 신문사에 이러한 관행을 퍼뜨렸다. 1954년 12월 15일에 첫 전파를 발사한 기독교방송은 한국 최초의 민영방송이 되었다. 원래 기독교방송은 1949년에 정식으로 방송국 설립 승인을 받았으나 전쟁으로 설립이 중단되었다가 1954년에 다시 설립 허가를 받아 개국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방송의 국장은 미국인 선교사 감의도였다. 기독교방송의 탄생은 감의도가 미국 선교 본부에서 5킬로와트 송신기와 부속 일체를 발주 받고 방송국의 운영에 소요되었던 모든 자금은 미국 뉴욕에 있는 기독교단체 ‘라디오, 시각 교육 및 대중 커뮤니케이션 위원회’의 원조를 받아 이루어진 것이었다. 정순일은 “기독교방송이 청취자의 환영을 받은 것은 우선 그 깨끗한 음질이었다. 국영 KBS가 쥐꼬리만 한 예산으로는 구할 수 없던 LP판을 미국에서 기증 받아와서 틀어제끼니 당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전쟁 미망인의 타락을 막아라 1957년 10월 말 현재 55만 5,000여 명으로 추산되는 ‘전쟁 미망인’에 대한 세간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의 피해자였지만, ‘미망인’이라는 단어의 부정적인 의미가 시사하듯이 그들의 타락 가능성만을 염려하는 사회적 담론이 무성하게 일었다. ‘과부의 재가 허용’은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제도적으로 보장되었지만 1950년대까지도 이른바 ‘미풍양속’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정충량은 월간 『여성계』 1955년 9월호에 쓴 글에서 “동족 사이의 난륜은 더 큰 사회 범죄의 온상”이며 “정욕을 참지 못하려면 차라리 개가하는 편이 훨씬 떳떳하고 명랑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전쟁 미망인의 위험한 성을 재혼을 통해 안정시키자고 주장했다. 정충량은 성공 사례를 거론하면서 자녀가 있더라도 전쟁 미망인의 재혼이 가능함을 역설했다. 1955년 12월 10일 서울 중앙극장에서 한국 최초의 여자 감독 박남옥의 「미망인」이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미망인이 거센 세파를 헤치고 살아간다는 내용이지만, 역설적으로 미망인이 수절하며 거센 세파를 헤쳐나가는 게 매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소설가 장덕조는 월간 『여원』 1956년 3월호에 쓴 글에서 ‘자녀를 가지지 않은 미망인’은 연애를 하거나 재혼을 할 것을 인정하거나 권장하자고 주장하면서도 ‘자녀가 있는 미망인’은 연애나 재혼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모성의 보호와 모권 확립의 문제, 즉 자녀가 받게 될 심리적 충격과 가정교육 등을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후 사회가 ‘전쟁 미망인의 타락을 막아라’고 외쳐대는 선전·선동으로 얻고자 했던 것은 결국 ‘강한 어머니’의 탄생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