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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수
2. 귀신 숲 3. 오두막 4. 재회 5. HOSU 프로젝트 6. 시도 7. 의문 8. 진덕시 9. 재욱 10. 실종 11. 기억 12. 환각 13. 사라지다 14. 벗어난 세계 15. 허상 16. 이별 17. 진실 18. 이제는 19. 귀환 20. 우리의 세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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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하지 않은, 이래도 저래도 그만인, 가지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어 보채지도 원하지도 않는. 그래서 키우기 수월하고 결과적으로 데려와서 다행이라고 생각될 무결점의 ‘착한 아이’가 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내 무의식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려 때로는 현실을, 때로는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
--- p.12 은수의 사고 이후 나에게 목적이 생겼다. 나는 깊은 잠에 빠진 은수를 깨우고 싶었다. 무의식세계에 빠져 있는 은수를 깨워 의식세계로, 내가 있는 이 세계로 다시 데려오고 싶었다. --- p.94 “은수 같은 의식불명 상태가 바로 바이러스에 감염된 컴퓨터와 비슷한 거야. 사고로 인해, 은수의 뇌가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어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채 주인조차도 시스템에 접속이 안 되는 완전한 블랙아웃 상태인 거지. 로그인 시스템 자체가 망가졌으니 정상적으로 접속하는 방법 대신 우회해서 접속해야 하는 거야.” “어떻게?” “세밀하고 균등한 주기의 전기자극을 이용해서!” --- p.97 재욱은 그런 나를 보며 또다시 다행이라고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뭐가 그렇게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재욱이 다행이라고 하니, 내 현재가 불행이 아닌 다행이라서 다행이다 싶었다. --- p.185 그제야 나는 무의식세계에서 먹은 음식의 맛이나 포만감과 같은 감각은 허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깨달았다. 그렇다면 내가 무의식세계에서 만난 은수는 진짜일까? 허상일까? 문득 이 모든 상황이 막연하게 느껴졌다. --- p.196 공허가 지나고 나면 모자람 없이 완벽한 나의 현실에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했다. 그것은 바로 ‘빈틈’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빈틈’이 없었다.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고, 모든 것이 짜맞춘 듯 완벽했다. 새삼스럽게 나는 내가 사는 세계의 ‘완벽함’이 낯설다 못해 어색하게 느껴졌다. 마치 화목한 4인 가족을 연기하는 광고 속 배우들을 볼 때 느껴지는 어색함과도 같은. 그렇다면 내가 살고 있는 이 빈틈없이 완벽한 세계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p.282 한때 엄마는 죽을 거면 이왕이면 나까지 말끔하게 데려가지 왜 나를 남겨두었을까, 아니 나를 죽이는 데 왜 실패했을까, 성공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왜 살아남았나.”란 물음은 나는 “왜 살아야 하는 걸까.”란 질문으로 이어졌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데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뭘까. 장맛비처럼 쏟아지는 의문들이 내 삶을 눅눅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마음속 끝나지 않던 장마가 이어지던 나날, 은수를 만났다. 은수는 늘 하고 싶은 게 많고, 되고 싶은 게 많고, 살아 있는 이유가 분명해 보였다. 은수를 보고 있으면 태양을 바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태양 빛을 쬐고 있으면 내 삶의 눅눅함이 바짝 소독되는 기분이었다. 이후 은수를 만나 나는 은수와 하고 싶은 게 생겼고, 은수처럼 이루고 싶은 게 생겼다. --- p.343 내가 시간의 주름 사이에 끼어 잠들어 있는 사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된 시간을 지나왔던 것일까. 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15년간의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나를 위해 인생을 흘려보낸 이들의 시간을 되갚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p.352 그 무엇도 마음속에 생긴 허무를 물리칠 수 있는 대안이 되지는 못했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공허를 터뜨릴 수 있는 건 오로지 날카롭게 벼린 죽음뿐이었다. --- p.374 나 또한 맹목적인 믿음을 품어오지는 않았을까? 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일을 해온 것은 아닐까? 마치 내가 나와 겨루는 탁구 시합 같았던 자문자답 과정에서 나는 하나의 답에 이르렀다. 그것은 은수를 구하기 위해 무의식에 접속하는 HOSU ver.0를 발명했지만, 만에 하나 그것이 악용될 여지가 있다면 그 기술은 무의식의 비밀을 여는 열쇠가 아닌 악몽을 여는 열쇠가 될 뿐이라고. --- p.3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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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녀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갑니다.”
재욱은 15년 전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첫사랑, 은수를 구하기 위해 뇌공학자가 되었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인간의 무의식에 침투하는 기술 ‘HOSU ver.0’를 개발한다. 이 기술을 이용해, 재욱은 15년 동안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은수를 만나게 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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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안다고 믿었던 나의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내 기억은, 내 삶은, 나는 진짜일까?” 인간보다 지능이 뛰어난 AI의 등장, 인간의 신체능력을 넘어선 로봇의 개발 등.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로 우리는 상상하던 일이 현실이 되는, 아니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들이 실현되는 삶을 살고 있다. 그에 따라 도덕과 윤리 또한 새로운 기준으로 논의될 필요에 직면한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혼란스럽다. 마치 잘못된 정보를 확신에 찬 어조로 제시하는 AI의 ‘환각’처럼 무엇이 허술한 ‘진짜’이고 무엇이 그럴듯한 ‘허상’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의 뇌에 접속한다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주인공 재욱은 사랑하는 이를 구하기 위해 타인의 무의식에 침투하는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한다. 그러나 초기의 의도와는 달리, 이 기술이 누군가를 해치는 데 악용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지자 그는 깊은 번민에 빠진다. 그로 인해 재욱은 무의식 접속 기술의 효용성을 의심하게 되고, 나아가 스스로의 존재가치에 의문을 품는다. “한참을 헤매다가… 드디어 너를 만났어.” 하지만 역설적으로, 재욱은 실재하지 않는 허구의 무의식세계에서 비로소 그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얻게 된다. 소중한 이에게 닿고자 하는 ‘마음’-그것이 바로 무의식 접속 기술의 본질이자,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임을 깨닫는다. 그렇게 재욱은 ‘가짜’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짜’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무의식세계에 잠들어 있던 서로를 구원했다.” 과학과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 많은 것이 무용해지더라도, 인간이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하는 시도만큼은 결코 무의미해지지 않기를. 이 소설은 그것이 인간다움을 지켜내는 마지막 등불임을 이야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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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지키고 싶다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으면 될 텐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면 되는데. 어렸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꼭 말실수를 하거나 일기를 쓰거나 고해성사를 하는 등 비밀을 밖으로 흘렸다. 마음에 깊이 간직한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외치는 듯했다.
정미진의 소설 『한참을 헤매다가』는 먼지 쌓인 남의 일기장을 펼쳐보는, 혹은 다른 사람이 묻어둔 타임캡슐을 대신 열어보는 이야기를 포함한다. 재욱은 미세 전류로 뇌파를 동기화해 타인의 무의식에 침투하는 기술을 개발한다. 그곳에는 각자의 취약한 내면, 간절한 소망, 오래된 죄의 증거가 있다. 다만 이 소설은 악의보다는 순수를 진하게 우려낸다. 쉽게 원한을 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타인에게서 일생의 보물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다. 재욱과 은수의 보물은 비록 휘황찬란하진 않을지라도 오래도록 광택을 잃지 않는다. 먼 길을 헤매는, 그러면서도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이 건네는 고백에는 그만한 힘이 있다. - 심완선 (SF 칼럼니스트, SF 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