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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_과거라는 세계를 유영하는
1. 이름 없는 가족 1. 우연한 발견 2. 양씨 집안의 여자들 3. 평범해야 해, 평범 4. 이름도 얼굴도 몰랐지만 5. 첫 번째 인터뷰 2. 흔적 없는 흔적 찾기 1. 주인공을 촬영할 수 없는 영화 2. 자살이라는 물음표 너머 3. 두 번째 인터뷰 4. 사라진 과거 5. 이름의 시간 6. 공부해야 하는 삶 7. 사소하다는 말에 가려진 3. 누군가의 빈자리를 응시하는 두 눈 1. 고모는 친구들의 기억을 통해 2. 고모의 마지막 사진 3. 공과대학 여학생 4. 공개 연애 5. 기록되지 못한 그날 6. 드러나지 않은 죽음을 드러내는 일 7. 고모의 마지막을 누가 말하도록 할까? 4. 가족의 시간을 다시 쓰다 1. 애도할 수 있는 죽음 2. 호명되는 불편한 시간들 3.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 4. 프로덕션 베이비 용용 5. 고모의 이야기가 시작이 되길 바라며 에필로그_터져 버린 세상에 남아 주 추천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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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하고 온전한 가족의 모습이 아니라 그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잊힐 수밖에 없었던 고모를 떠올리고, 기억하고 싶었다. 고모를 떠올린다는 것은 결국 고모가 그동안 왜 기억될 수 없었는지를 묻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 p.9 “아빠한테…… 사실은 누나가 있었어.” 그 순간 아빠의 고백이 내 귀를 때렸다. 누나라고? “너에게는 고모지, 고모.” 단 한 번도 예상한 적 없는 전개였다. 고모도 이모도 없이 작은아빠들과 외삼촌들만 있는 나에게 아빠는 지금 고모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니, 그런데 그걸 왜 지금 말하지? --- p.18 아빠에게 ‘고모처럼 되지 말라’는 말을 처음 들은 그날 밤, 나는 외할머니의 ‘평범해야 한다’는 말을 함께 떠올렸다. 그 말에서 외할머니의 두려움을 느꼈던 것처럼, 아빠의 말에서도 아빠가 쉽게 드러내지 못했던 두려움과 슬픔을 느꼈다. 내가 그 두려움과 슬픔의 정체를 계속 바라볼 수 있을까? 그게 무엇일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고모의 시간들을 찾고 싶었다. 가족 안에서 기억되지 않는 존재가 된 고모는 어떤 삶의 과정을 거쳐 갔을까? 두려움과 슬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모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 p.33 드디어 가장 아래쪽에 놓여 있던 사진첩을 펼쳤다. 한눈에 보기에도 오래되어 보이는 앨범이었다. 삼등분으로 양쪽 날개가 펴지는 형식의 사진첩이었다. 주황색 표지와 오른쪽 하단에 붙은 미키마우스 스티커가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사진첩을 넘겼다. 첫 번째 장에서 어른의 글씨는 아닌 것 같은 누군가의 글씨로 한 자 한 자 적어 나간 가족들의 이름이 보였다. “양지영” --- p.40 낯선 누군가와 카메라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떨리는 일이지만, 잘 아는 친숙한 대상과 카메라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번 일정에 앞서 나는 아빠에게 미리 촬영 협조를 구하며 아주 조심스럽게 ‘고모’라는 단어를 전화로 꺼내 놓았다. 몇 년 전 아빠가 처음으로 알려 준 고모에 대해 카메라 앞에서 더 이야기 듣고 싶다고. 아빠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거절도 회피도 아닌 “알겠다”라는 답변이었다. --- p.45 결혼을 결심했던 엄마의 마음처럼, “양씨 집안의 여자들은 모두 불행했다”라는 말이 만들어 내는 고모의 삶에 대한 거칠고 일방적인 평가와 낙인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었다. 엄마가 먼저 끊어 냈던 고모를 둘러싼 낙인의 시선을 나도 끊어 내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는 여전히 그녀가 궁금했다. --- pp.47-48 아들과 딸이 마주하는 차별은 이름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와 딸의 이름을 지을 때 사용하는 한자도 의미도 확연히 다르다. 아빠의 이름에는 ‘근원 원’이라는 한자가 들어갔지만, 고모의 이름에는 ‘지초 지’라는 풀 이름의 한자가 들어가 있다. 할아버지의 이름에는 ‘이을 승’이라는 한자가 있고, 할머니의 이름에는 ‘예절 례’라는 한자가 있다.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이름에는 이미 다른 질서와 기대가 반영되어 있다. 이름은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았다. --- p.90 비석 뒤편의 이름들을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그중에는 내 이름도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고모 이름은 없었다. 아빠 이름, 작은아빠들 이름, 엄마 이름, 작은엄마들 이름도 모두 있는데 고모 이름은 없었다. 고모는 가족이라는 집합 속에 들어오지 못한 걸까? 자살했다는 이유로? 아니면 일찍 죽었다는 이유로? 가족 모임에서조차 고모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 다시금 상기되었다. --- p.91 언젠가 아빠는 고모가 서울로 대학을 가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서울로 충분히 갈 수 있는 성적이었다고. 하지만 할아버지는 고모가 딸이라는 이유로 서울에 가지 못하게 했다. 큰딸은 집에 남아 엄마를 도와 집안 살림을 하고 동생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 말을 들은 고모는 며칠간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시험공부에도 소홀해졌다고 했다. 자신의 방 외에는 갈 곳이 없었을 고모를 떠올렸다. --- p.101 언제나 착한 딸이 되어야만 했던 시간 속에서 터져 나올 수 없었던 서운함과 답답함이 고모라는 렌즈와 함께 드디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 시간을 온 마음으로 느끼며 나는 나의 시간을, 가족의 시간을 다시 써 내려가고 있었다. --- p.107 “그럼, 고모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타살일 수도 있겠네요?” 타살이라는 단어가 내 입에서 나오자, 고모의 친구들이 잠시 멈칫했다. 나 역시도 그 단어를 내뱉고 긴장되는 마음을 애써 누르고 있었다. --- p.142 고모의 무덤은 어디일지 생각해 봤다. 정씨 성의 할머니는 양씨 성의 할아버지 옆에 묻히고, 김씨 성의 외할머니는 최씨 성의 외할아버지 옆에 묻혔다. 1975년 여름, 결혼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 고모는 양씨 가족 묘지에 묻히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아빠는 화장한 고모의 시신을 광주 근교 어느 강가에 뿌렸다고만 아주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후 가족들이 고모의 남은 물건을 불에 태워 버렸다고도 말해 주었다. 왜 그랬냐는 질문에 아빠는 고모의 물건을 보고서 고모가 생각나면 슬프기 때문이었다고 답했지만, 자살한 이의 물건에는 불운이 깃들어 있다는 옛 속설 때문이기도 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윤심덕은 노래로라도 기억될 수 있지만, 고모는 남긴 것이 없었다. 문득 〈양양〉이 고모를 애도할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일었다. --- pp.164-165 “처음부터 용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어떤 일을 했을 때 우연히 이게 용기 있는 일이라고 받아들여지면 그렇게 용기의 내공이 조금씩 쌓여 간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거든요.” --- p.170 “누군가는 누군가의 말에 의해 또 누군가는 누군가의 말이 되고 누군가는 누군가의 말이고 누군가는 누군가가 되어가고 누군가는 누군가이고” --- pp.171-172 아빠가 고모 이야기를 하면 여전히 가슴이 아리다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이 나요. 아빠를 슬프게 하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가족의 비밀이 되어 버린 고모의 삶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마음이에요. 고모의 입장에서, 고모의 목소리로. 언젠가 고모를 만난다고 했을 때 그때 고모의 편이 되어 줄 수 있을지, 고모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을지, 저는 요즘 저 자신에게 묻고 또 묻고 있어요. --- p.179 고모를 찾아 떠나는 여정 속에서 나는 때론 탐험가가 되고, 탐정이 되고, 그리고 조카, 가족이 된다. 아니 어쩌면 아직 나는 이 여정의 끝에 도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고모의 이야기가 담긴 상자 옆으로는 여전히 수북하게 쌓인 다른 상자들이, 이름 없이 죽은 여성들이, 비운이라는 고리를 끊어 내지 못한 금기들이 흘러넘치기 때문이다. 도처를 떠도는 그 존재들을 발견하고 이야기를 찾아 헤매는 시간 속에서 여정은 다시 시작되고 이어진다. 드러나지 않았던 존재가 드러나고, 낙인이 찍힌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되찾을 때 〈양양〉을 통해 내가 꿈꾸었던 세상은 하루하루 넓어질 것이다. --- p.192 1932년에 태어난 할머니 정삼례는 첫째로 딸인 고모를 낳았다는 이유로 아들인 아빠를 낳을 때까지 죄인처럼 숨죽여 지냈다. 1959년에 태어난 엄마 최혜선은 공부를 잘해 수학 선생님이 되었다. 엄마와 아빠는 부부 교사였지만, 퇴근 후에 홀로 저녁 준비를 해야 하는 사람은 엄마였다. 1975년에 세상을 떠난 고모 양지영은 남자친구 집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가족 안에서 지워져야 했다. 1988년생인 나는 결혼을 할 때, 아이를 가질까 고민할 때 행복만큼이나 잃게 될 것들을 떠올렸다. 아내와 엄마라는 역할이 내 이름을 뺏어가지 않을지 두려운 마음이었다. --- p.200 나는 언제나 집회에서 큰 목소리로 ‘성평등’을 외칠 수 있었지만, 정작 집으로 돌아오면 나를 둘러싼 관계 안에서 그 구호를 일상의 언어로 바꿔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고모의 존재를 발견하고 알아가는 여정은 외면하고 있던 가족의 시간을 돌아보고 새로운 일상을 꿈꾸는 일이기도 했다. 이제 나는 잊힐 수밖에 없었던 고모가 아니라,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갔던 양지영을 떠올린다. 어떤 존재가 당연한 듯 잊히지 않고, 기억되며 함께 흘러갈 수 있는 가족의 시간을 살고 싶다. --- p.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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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한 노력이야말로 산 자들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책.” _손희정, 문화평론가
“그녀의 집요한 질문에 누군가는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진실이 자유를 준다는 것을. 양주연은 《양양》을 통해 자유로워지는 데 성공했다.” _강화길, 소설가 10월 22일 영화 개봉과 동시 출간! 화제와 감동의 ‘호명’ 다큐멘터리 「양양」에서 못다 한 이야기 아빠에게서 어느 날 “네게 고모가 있었다”는 말, “너는 고모처럼 되지 말라”는 말을 들은 그날부터 ‘주연’은 줄곧 고모의 이야기가 궁금했지만, ‘나만 가만히 있으면 그냥 지나갈 일인지’ 검열하며, ‘화목한 분위기에 괜한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며 몇 해를 보낸다. 그러다 돌아가신 조부모의 옷장 깊숙한 곳에 있던 앨범에서 고모의 사진을 발견하며 이름도, 얼굴도 몰랐던 고모 이야기에 다가갈 마음을 먹게 된다. 고모보다 4살 어린 동생인 ‘아빠’를 인터뷰하며 ‘가족의 비밀’에 관한 수십 년간의 침묵을 깬다. 고모가 머물던 장소에 방문하고, 고모가 청년기를 보낸 1970년대의 사회, 문화상에 관해 공부하고, 고모의 동창, 선생님,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 책에 그어진 밑줄과 필사 내용을 살피며 고모가 품었던 생각, 고민에 다가간다. 그 과정에서 ‘맏딸’에 부여된 역할기대에 진학의 꿈이 좌절된 여고생이자, 개명을 하고 세례를 받고 동아리에 가입해 ‘좋은 남자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며 스스로 거듭날 계기를 적극 모색한 여성,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말하는 과정에서 죽음을 맞은 연인, 사망 후 8년이 지난 뒤에서야 사망 신고가 이뤄진 가족 구성원인 고모 ‘양지영’을 알게 된다. 이어 고모를 둘러싼 여러 종류의 억압과 차별, 규범의 폭력을 돌이키며 고모의 삶과 죽음을 재구성한다. 사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한 서사는 고모를 닮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비추며 더 멀리 나아간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고모를 이르는 말이던 ‘양 양’은 이윽고 “양씨 집안의 여성들”을 통칭하는 말이 되고, “더 많은 익명의 여성들을 소환”(58쪽)하는 호명으로 뻗어 나간다. 양동 쪽방촌을 다룬 「양동의 그림자」(2013)를 시작으로 비정규직 학내 청소노동자를 조명한 「내일의 노래」(2014), 광주항쟁에 대한 외할머니의 기억을 다룬 「옥상자국」(2015) 등 사적인 서사와 사회적인 서사를 탁월하게 연결하는 다큐멘터리로 평단의 찬사를 받아 온 양주연 감독의 첫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인 「양양」은 제11회 부산여성영화제 대상을 수상하고,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 제21회 EBS국제다큐멘터리 페스티벌초이스 부문에 초청되었으며, 제26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32회 캐나다 핫독스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등에서 상영되었다. 이 책은 영화의 감동을 고스란히 글로 옮기고, 촬영기와 소감, 제작 이후 에피소드 등을 추가해 영화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가족이란 무엇일까” 목소리 없이, 사라진 사람은 말할 수 있는가? 고모의 유년, 청소년, 청년기를 따라가던 ‘주연’은 고모 삶의 마지막 조각들에서 가부장적 억압과 교제 폭력의 흔적을 발견한다. 이후 ‘주연’은 당시 고모의 남자친구였던 이를 수소문하여 고모 죽음의 원인을 밝히려 노력하는 한편, 공개 연애 자체가 여성을 향한 낙인이 되던 1970년대의 여성 자살 사건을 들여다보고, 여성 인권 단체 활동가들과 만나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교제살인 판결문을 살피며 고모 ‘양지영’의 이야기를 시대를 초월한 여성의 이야기로 확장한다. 교제살인 사건은 진실을 증명할 당사자가 부재하기에 재판에서 가해자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152쪽) 없으며, 여성 인권 운동 내에서도 ‘각성’과 ‘생존’으로 요약되는 임파워링 서사를 따를 수 없기에 “일치와 강화의 토대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 토대를 약화하고 사람들을 침묵시킬”(153쪽)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에 주목한 ‘주연’은 “고모는 그냥 조용히 잊히고 싶을 것 같은데…”(140쪽) 하는 우려의 시선에도 고모의 뜻에 다가가는 방법은 고모의 이야기를 남김없이 듣는 일임을 되새기면서 “고모의 마지막을 고모를 통해 말하”(152쪽)게 하려는 뜻을 이어 간다. ‘사건의 진실’을 쫓던 이야기의 축이 사라진 이의 삶을 복원하는 일의 윤리에 관한 이야기와 교차한다. 끈기 있고 치열한 시선으로 《양양》은 ‘젊은 처녀가 남자친구 집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는 서사에 달라붙은 오랜 낙인과 수치심, 금기를 걷어 내고, 자신을 둘러싼 모순과 갈등하며 ‘나’로 살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한 이야기로 고모의 삶을 재해석하여 드러낸다. 이후 주연의 제안으로 가족 묘비에 고모의 이름이 새겨지게 되고, 처음에는 고모 이야기를 나누기 불편해했던 ‘아빠’가 주연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며 “가족의 시간”(183쪽)이 새로 쓰인다. 왜 가족의 비밀 이야기 속 주인공은 늘 고모나 이모일까? “고모처럼 되지 말라”는 경고를 “여자들의 생을 기억하라”는 초대로 바꾸어 내는 책 “사망 원인을 규명하기보다는 그에 앞서서 우리 가족의 분위기가 좋았더라면 일이 이렇게 됐을까, 이런 쪽으로 생각하곤 했지. 가정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핵심 인물이 할아버지였으니, 할아버지가 일을 이렇게 만든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그 당시에 상당히 컸지, 아빠도. 근데 그런 마음을 할아버지한테 말하지는 못했어.”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주연’의 의지로 시작된 《양양》은 ‘아빠’의 변화와 수용이 있었기에 가능해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딸에게 특히 억압적이었던 가정 환경이 누나를 고통스럽게 했음을 알고 있었으나, 자신 역시 아버지가 되었을 때 그 질서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아빠가 고모의 죽음을 돌이켜 재해석하는 대목이 그 변화를 잘 드러낸다. ‘아빠’가 ‘고모’의 심정에 다가가 가정 내 여성의 지위를 돌아보는 이러한 계기는 ‘주연’과 ‘아빠’의 관계 또한 환기하며 이야기의 새 국면을 열기도 한다. 주연은 “고모라는 렌즈”(107쪽)를 통해 자신에게 떠오른 질문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양양》이 고모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아버지와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나는 언제나 집회에서 큰 목소리로 ‘성평등’을 외칠 수 있었지만, 정작 집으로 돌아오면 나를 둘러싼 관계 안에서 그 구호를 일상의 언어로 바꿔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고모의 존재를 발견하고 알아 가는 여정은 외면하고 있던 가족의 시간을 돌아보고 새로운 일상을 꿈꾸는 일이기도 했다.” 「에필로그_터져 버린 세상에 남아」 중에서 고모 양지영의 서사와 조카 양주연의 서사가 만나는 곳에서 《양양》은 여성의 자기 발화와 그것의 유통에 작동하는 가부장적 억압의 구조를 슬며시 비춘다. 여성이 겪는 일을 줄곧 사적인 경험으로 번역하는 가부장적 구조하에서는 젠더 위계에 따라 중요한 일과 사적인 일의 스펙트럼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경험의 위계가 구성된다. 이때 ‘수치스러운 일’ ‘사소한 일’로 배치된 이야기는 내면화된 낙인, 금기, 수치심 등의 작용으로 발화되지 못하거나, 같은 이유에서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지조차 못한다. 더군다나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는 인식 아래에서는 억압과 검열의 작용이 더욱 미시화될 가능성이 있다. 여성이 자신이 겪고 생각한 바를 표면화하기 어렵게 만드는 겹겹의 기제를 돌아보며, 《양양》은 가족의 비밀이 드러난 자리에 화자인 ‘주연’을 포함한 여성들의 억압과 차별 경험을 겹쳐 보이고, 모든 이들이 그 자리에 자신의 이야기를 덧대어 말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각자의 비밀이 “터져 버린” 이후의 시간까지도 꼼꼼히 담아내어 보는 이에게 용기를 건넨다. 이 이야기가 “진실이 자유를 준다는 것을 드러내는 이야기”(추천의 말, 강화길)이자 기억과 발화가 “사랑의 조건”이 된다는 사실에 다가가는 “초대”(추천의 말, 손희정)인 까닭이다. “1932년 태어난 할머니 정삼례는 첫째로 딸인 고모를 낳았다는 이유로 아들인 아빠를 낳을 때까지 죄인처럼 숨죽여 지냈다. 1959년 태어난 엄마 최혜선은 공부를 잘해 수학 선생님이 되었다. 엄마와 아빠는 부부 교사였지만, 퇴근 후에 홀로 저녁 준비를 해야 하는 사람은 엄마였다. 1975년 세상을 떠난 고모 양지영은 남자친구 집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가족 안에서 지워져야 했다. 1988년생인 나는 결혼을 할 때, 아이를 가질까 고민할 때 행복만큼이나 잃게 될 것들을 떠올렸다. 아내와 엄마라는 역할이 내 이름을 뺏어가지 않을지 두려운 마음이었다. 각기 다른 네 사람의 삶이지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고모, 그리고 사라졌던 여성들의 자리를 찾기 위해서, 나는 가족 안에서부터 기꺼이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로부터 ‘터져 버린’ 미래를 상상하고 싶었다.” 「에필로그_터져 버린 세상에 남아」 중에서 2015년 겨울부터 2025년 여름까지 10년의 여정 속 영화에는 담기지 않은 이야기 2015년 겨울 ‘주연’이 처음 ‘고모’의 이야기를 알게 된 뒤로 영화가 정식 개봉하기까지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주연’은 결혼과 출산을 하고 「양양」은 국내외 다수의 영화관에서 상영되며 전 세계 관객과 만났다. 책 《양양》에는 영화 「양양」의 제작기를 비롯해 고모의 이야기에 다가가며 아이와 함께하는 삶을 결심하게 된 계기, 「양양」에 공명한 어느 관객과의 에피소드, ‘주연’과 마찬가지로 가족의 비밀에 다가간 동료 작가와의 만남 등 영화에서는 다뤄지지 않은 이야기로 감동을 증폭한다. 가족에 관해서라면 체념과 포기에 익숙했던 독자들에게 침묵 속의 무탈함 대신 시끄러운 진실로 용기를 내는 《양양》의 이야기가 새로운 가능성과 영감을 전할 것이라 생각된다. “고모에게, 저는 가끔 고향에 와서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아빠와 고모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우리 가족에게 작지만 아주 큰 변화예요. 아빠는 여전히 그 자체를 불편해하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저에게 불쑥 고마움을 표현할 때도 있어요. 그리고 저는 아이를 가졌어요. 엄마가 되는 건 여전히 두려운 일이지만 저는 이 아이와 함께 불편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시끄러운 가족을 만들어 가고 싶어요.” 「프로덕션 베이비 용용」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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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처럼 되지 말라.” 아버지의 한마디와 함께, 존재도 몰랐던 고모가 양주연의 삶 속으로 들어온다.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다.
어느 집에나 구전되는 ‘이름 없는 여자’의 이야기가 하나쯤 있다. “고모처럼 되지 말라” “너만 알고 있어라” “몸가짐을 조심하라” 등의 말을 타고 은밀하게 전해지는 이야기들. 그 주인공들은 대체로 여자에게 기대되는 덕목을 위반하고 가족에게 수치를 안겼다는 이유로 가계도에서 지워진 자들이다. 여자의 정체성, 섹슈얼리티, 죽음에 낙인을 찍음으로써 가족은 사회가 그어 놓은 ‘정상성’의 경계 안에 머물고자 한다. “고모처럼 되지 말라.” 우리가 이 말을 조용히 수용하는 순간, 그것은 우리 몸에 달라붙어 여자의 삶을 단속하고 이를 그림자 속으로 밀어 넣는 강력한 명령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양주연은 침묵하지 않는다. 운명처럼 찾아온 존재의 의미를 되묻기 위해, 그는 앙상하면서도 거대한 문장 속으로 파고들어 간다. 그리고 마침내 ‘이름 없는 여자’의 이름을 찾아낸다. 양지영. 고모의 이름이다. 《양양》은 양지영과 양주연, 두 이름을 겹쳐 부르는 말이자 ‘익명 속에 머물러 있는 여자들을 부르는 말’이다. 작가는 고모의 삶에 숨을 불어넣음으로써 지워졌던 양씨 집안의 가계도를 다시 그리고, “고모처럼 되지 말라”는 경고를 “고모를 기억하라” “이름 없는 여자들을 기억하라” “여자들의 죽음을 기억하라” 그리하여 “여자들의 생을 기억하라”는 초대로 바꾸어 낸다. 양주연의 용감한 초대에 응해 보시기를 권한다. 망각의 형벌이 생동했던 존재를 축하하는 제의로 바뀌는 순간, 무언가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한 노력이야말로 산 자들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것이다. - 손희정 (문화평론가,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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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가족에게는 비밀이 있다. 누구도 묻지 않고, 물어서도 안 되는 이야기가 있다. 양주연은 이 불문율을 깨뜨린다. 사라진 고모의 이름과 이야기를 되찾으려 한다. 그녀의 이름을 자신의 성씨 앞에 나란히 놓아둔다. 양양. 왜? 그냥 지나칠 수 없었으니까. 계속 묻어두기에는 너무 마음이 아팠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함부로 잊혀야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양주연의 애틋한 문장을 읽으며 여러 번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가족이란 무엇일까. 나를 정의하는 이 많은 단어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그녀의 집요한 질문에, 누군가는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진실이 자유를 준다는 것. 양주연은 영화를 통해,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자유로워지는 데 성공했다. 이어 내 마음에 불을 지폈다. 나는 많은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다른 이들의 마음에도 환한 불꽃이 피어나기를 - 강화길 (소설가, 《다른 사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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