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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생명은 싸다. 나도 생명답게 싼 편이다.
--- p.1 ‘왜’와 ‘어떻게’. 부모님이 신종플루와 코로나19로 한 분씩 돌아가실 때마다 사람들은 두 단어를 징검다리처럼 이어 내게 던졌다. 넌 왜 안 우니. 네 언니는 어떻게 할 거야? 내게 왜와 어떻게의 징검다리는 선뜻 건너지 못할 아득한 거리였다. 왜를 설명하려면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의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했다. 어떻게를 이해시키려면 도리 없이 언니 자연의 이야기를 늘어놓아야 했다. 말한다고 과연 믿어주기나 할까. 징검다리 대신 차갑고 어두운 강물로 뛰어드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 p.8 나는 사계절 중 겨울의 나부해변을 좋아했다. 겨울 해변에 가면 봄, 여름, 가을에 다녀간 사람들의 흔적이 모래밭 곳곳에 보물처럼 묻혀 있었다. 손바닥에 올릴 만큼 작은 크록스 한 짝, 끊어진 팔찌와 짝 잃은 귀고리, 서해안고속도로 통행료 영수증, 파라솔 아래 깊숙이 묻힌 자동차 키 같은 걸 주워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러면 그 물건을 입고 신고 걸쳤을 사람들의 모습이 아련하게 그려지곤 했다. --- p.11 내 뒤엔 내가 서 있었다. 쥐색 코트에 하나로 내려 묶은 머리, 쌍꺼풀 없이 큰 눈에 흐릿한 코와 입을 가진, 얼핏 보면 서른두 살의 유양 같은 여자였다. 그녀의 오른손엔 갈치처럼 번뜩거리는 회칼이 들려 있었다 --- p.14 이미 혈액이 빠져나간 몸뚱이는 식어가고 있었다. 턱이 덜덜 떨릴 만큼 추위가 밀려들었다. 추위? 죽은 사람이 어떻게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건가. 나는 두 눈을 끔뻑여 봤다. 녹슨 셔터처럼 뻑뻑하긴 했지만 눈꺼풀이 움직였다. 손에 닿은 모래, 질퍽하게 젖은 울 스웨터의 촉감, 피비린내와 무릎바위에서 밀려오는 악취까지, 둔하지만 모든 감각이 되살아났다. --- p.17 양과 흡사해지기 위해 연갈색 머리로 염색을 하고 손톱을 지나치게 바짝 깎았다. 하루 한끼 사과와 달걀만 먹으며 경사 높은 셋방을 얻어 출퇴근했다. 학원에 다니며 웹디자인을 배우고 걸음걸이를 바꾸려 오른쪽 구두 한 짝은 반 사이즈를 작게 샀다. “나로 살고 싶었다고요?” 양은 원치 않는 임신을 확인한 사람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럴 만도 했다. 어디 가서 내세울 만한 학벌도 아니고, 큰 재물이나 부동산을 가진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내게 간절했다. --- p.22 “유양으로 살게 도와줄게요. 대신 나처럼 시시하게 살진 마요. 근데 이름이 뭐예요? 당신은 내 이름도 알고 취향도 꿰고 동선도 파악했는데 난 아는 게 없잖아요.” --- p.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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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플러스 인기 드라마 『킬러들의 쇼핑몰』의 원작자이자,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활발한 러브콜을 받으며 한국 장르문학의 대표주자로 우뚝 선 강지영 작가가 이번에는 한층 더 대담한 방식으로 돌아왔다.
『양의 실수』는 “죽었는데도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기이한 설정을 통해, 현실의 어두운 단면과 인간 존재의 아이러니를 동시에 보여준다. 이 작품의 힘은 무엇보다 인간의 추악한 욕망에 대한 섬세한 묘사에서 비롯된다. “모두가 유죄"라는 책 말미의 표현처럼 등장인물들은 어떤 명분을 갖다 붙이더라도 생존을 위해 이기적인 선택을 하고야 만다. “양의 실수가 아니라 실수로 태어난 음수”들이 처절하게 뒤엉키는 여정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답게 사는 것’의 가치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강지영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도 특유의 필치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삶과 인간에 대한 통찰과 장르적 재미를 동시에 추구하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새로운 서사적 긴장을 만들어낸다. 독자는 유양과 단화의 뒤를 따라가며 끊임없이 긴장하고,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서늘한 전개에 속절없이 빨려들어갈 것이다. 강지영의 세계는 늘 그렇듯 낯설지만, 그 낯섦이 곧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또 다른 얼굴임을 깨닫게 만든다.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유양 웹디자이너. 부모를 병으로 잃고, 뇌성마비를 앓는 언니를 부양하며 살아왔다. 자신을 ‘싼 생명’ 취급하는 직장에 사직서를 던진 날, 정체불명의 킬러에게 습격을 당한다. 분명 죽음을 맞이했지만, 다시 눈을 뜨고 살아 움직이는 기묘한 상태로 깨어난다. 이후 자신을 죽이라고 사주한 배후를 찾아 나선다. □ 목단화 유양의 신분을 빼앗기 위해 유양을 습격한 여성 킬러. 환족 태생으로 한국에 온 지 10년이 넘은 불법체류자다. 결혼을 위해 신분이 필요해지자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 유양을 표적으로 삼고 체격과 인상까지 유양과 닮게 만들었다. 유양의 여정을 함께 하면서 희생자인 줄만 알았던 유양에게 다른 면모가 있음을 알게 된다. □ 서익호 러시아계 불법 이민자였으나 신분 위조용 초박형 실리콘 지문 제작자인 이반이 자살하면서 신분을 증여받아 그의 일을 뒤이어 하고 있다. 목숨보다 돈을 귀하게 여기며 인정사정없는 사이코다. 유양 살인을 처음 의뢰받았고, 이를 수행하는 단화에게 남다른 감정을 갖고 있다. □ 유자연 유양의 언니. 경직형 뇌성마비로 거동이 불편하고, 시설에 머물고 있다. 유양의 삶을 지탱하게 만든 동시에, 그녀의 선택을 무겁게 얽매는 존재다. □ 성기범 단화와 연인 관계인 인물. ‘유양'이라는 이름으로 단화를 알고 있으며 단화의 과거를 전혀 모른다. 단화와의 행복한 결혼을 꿈꾸고 있다. 작가의 말 할머니는 와병 후 거의 한 달만에야 숨을 거두셨다. 그녀가 죽음과 사투를 벌일 때 나는 응원할 수 없었다. 고통과 두려움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쓰다듬으며, 할머니 어서 편하게 떠나세요, 등을 떠미는 게 자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 한 달의 시간은 매일 울고 매일 술을 마셨으며, 세상 모든 신들에게 할머니의 안락한 죽음을 기원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자연사라는 게 인간이 서서히 메말라 미라가 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삶의 모든 과정들이 우주의 순리대로 흘러왔듯, 죽음 또한 일정한 과정을 통과해야 성취되는 과제라는 것을. 그러고 나서야 나는 울음을 그쳤고, 무엇에게도 빌지 않게 되었다. 이따금 사랑한다 말해주며 손을 잡아주다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을 받아들였다. 이 작품엔 할머니의 죽음이 일부 섞여 있다. 그녀는 별이 되었지만 육신과 영혼은 나의 일부로 남았다. 또 나의 작은 일부가 작품 속 양과 단화로 스며들었다. 할머니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래 목격하고 글로 옮긴 이야기인만큼 내게도 특별한 책이 되었다. 독자들에게도 이 마음을 공유하고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