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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위의 가마괴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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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쩌렁거렸다. 여자가 결백하다면 남자는 볼 것도 없이 부정망상 환자였다. 배우자나 애인에게 집착하고 더 나아가 외도를 의심하고, 성향에 따라 폭력으로 감정을 드러낸다. 윤지는 배낭에서 호신용 너클을 꺼내 손에 끼우고,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었다. 폭력엔 폭력이 약이라고 믿는 그녀였다.
--- p.11 “오바 좀 하지 마요. 늘 궁금했는데, 왜 일정 나이를 넘어서면 과도하게 비장해지는 거예요? 꼴랑 친구랑 술 먹다 애새끼들처럼 멱살잡이하면서도 표정은 안중근 의사같이 비장해.” --- p.15 건장한 체구에 온통 검은 옷과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자는 일견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처럼 보였다. 그러나 까마귀는 교묘하게 CCTV를 피하거나 CCTV가 없는 도담 3동 16번 길로 사라졌다. 윤지는 자유로운 검은 새였다. --- p.17 “미안합니다. 제가 내일부턴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민기는 눈썹을 늘어뜨리고 조금 슬픈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가 지금 무엇을 다짐했는지 수겸을 알지 못했다. 그저 빈말은 아닐 것 같다는 기묘한 확신이 들기는 했다. --- p.28 어린 민기는 아빠 대영보다 늘 십오 분 늦게 등교했다. 함께 지하철에 올라 그의 궤변을 들으며 용 대가리 새끼가 나은가 애기 고추가 나은가 저울질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 희연에 따르면 저 모자가 신통방통해서 재앙을 막는 게 아니라고 했다. 사람들 마음의 부정적인 기운이 가장 들끓는 시간인 이른 아침에 일종의 쇼를 제공해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게 목적이라고 했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는 없지만, 대영이 대상포진으로 하루 결근한 날, 이웃 도시의 사파리에서 얼룩말 한 마리가 탈출해 도담 시내를 활보하다 싼타페에 치여 죽는 사고가 있었다. --- pp.39~40 대영의 말을 빌리자면 지치고 피곤해서 웃거나 찡그릴 여력도 없는 그들은 좀비 영혼을 가진 자들이었다. 육체를 통제할 수 있고 대화나 업무도 너끈히 해내지만 어느샌가 취향과 취미를 잃은 가사 상태의 영혼.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패킹이나 볼트처럼 반복된 행위에 서서히 마모되어 본래 자신이 어떤 역할과 태도를 지녔는지 잊었을 뿐이었다. --- p.50 십사 개월 전, 윤지는 그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소름 끼치는 비명과 웃음소리, 어둠을 가르던 시퍼런 칼날, 그리고 진득한 핏물. 하지만 그녀가 목격한바 산호는 가해자가 아니었다. 그걸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윤지 한 사람뿐이었다. --- p.112 “엄마, 이제라도 자수하면 엄마를 찾을 수 있을까?” 윤지는 마음속에 눌러놓은 질문을 입술로 내보냈다. 도담 시민아파트 연속 살해 사건의 밤, 희연은 윤지가 공포에 질린 틈 사이 사라졌다. 범인의 얼굴이 흐릿하게나마 기억났다. 신고하고 자수할 수도 있었지만, 오래전 희연이 했던 말이 떠올라 그만두었다. 윤지야, 우린 작은 결함을 찾아 고쳐놓는 사람이야. 다리가 무너지기 전에, 비행기가 추락하기 전에, 건물이 주저앉기 전에 예방하는 거지. 조용히 세상을 구하는 일이야.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잡혀선 안 돼. --- p.115 윤지는 바동거리는 온유를 어깨에 짊어지고 현관문을 열었다. 틈 사이로 거친 토사가 밀려들었다. 불과 십여 분 만에 103동의 절반 가까이가 토사와 흙탕물로 매몰되었다. 이제 탈출로는 베란다 한 곳 뿐이었다. 윤지는 거실을 가로질러 베란다로 향했다. 2층 절반까지 토사가 차올랐고 건물 외벽에서 엠블럼과 건축자재가 텀벙텀벙 떨어져 가라앉고 있었다. 윤지는 아파트가 균형을 잃고 기우는 것을 느꼈다. 붕괴냐, 매몰이냐. 결국 순서만 다를 뿐 같은 결괏값이었다. 윤지는 토사에 휩쓸리지 않고 탈출할 도구를 찾기로 했다. --- p.198 윤지가 우수관에 한 발을 걸치고 도움닫기를 하느라 체중을 실어 무릎을 굽혔다. 그 순간 몸이 외벽에서 멀어졌다. 우수관을 지지했던 마감재가 폭우에 헐거워져 떨어진 거였다. 재빨리 가스 배관으로 발을 옮겼지만 몸의 중심축이 흔들리며 위태롭게 유지되었던 균형이 깨졌다. 윤지는 죽을힘을 다해 기어올랐던 배관에서 밀려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팔과 손에 힘을 주고 다리를 모아도 살갗이 벗겨지기만 할 뿐 하강을 멈출 수 없었다. --- pp.260~2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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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진 않아. 되갚아줄 뿐이지.”
매일 밤, 도담시에는 까마귀가 날아든다 윤지는 도담시의 밤을 지키는 히어로, 일명 ‘까마귀’다. 흑복을 입고 밤마실을 나가 괴력으로 악당들을 때려눕힌다. 윤지의 타깃은 뉴스에 오르는 강력범죄자가 아니다. 가정이라는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 반복되는 폭력, 신고해도 결국 ‘가족’이라는 말 앞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던 사건들이다. 까마귀는 바로 그 외면된 틈을 향해 날아간다. 공권력이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러나 끝내 등을 돌리지 않는 방식으로. 윤지가 처음부터 까마귀였던 것은 아니다. 선대 까마귀였던 엄마 ‘완희연’은 일 년여 전 사건을 해결하러 나섰다가 실종되었다. 희연이 사라진 이후 윤지는 그의 자리를 이어받아 도담시의 까마귀가 되기로 한다. 큰 체구와 타고난 힘으로 도시의 평화를 지켜내면서도, 윤지는 마음 깊은 곳에 사라진 엄마를 향한 그리움을 품고 살아간다. 정신병원 간호사로 근무했던 희연처럼, 윤지 역시 낮에는 흔히 치료감호소라 부르는 법무병원의 간호사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 주민 세 명을 살해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조현병 환자가 병원에 입소하고, 윤지는 그의 얼굴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마주한다. “소름 끼치는 비명과 웃음소리, 어둠을 가르던 시퍼런 칼날, 그리고 진득한 핏물.” 살해당한 사람들과 사라진 희연. 숨겨진 진실 앞에서 고민하던 윤지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온다.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도담시를, 아니 대한민국을 덮칠 것이다. “까마귀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죽도록 얻어맞았다고 신고한 작자들은 자기도 처자식을 죽도록 두들겨 팬 요주의 인물들이었고. 정말 CCTV에 까마귀가 제대로 찍힌 적이 없다고 믿어? 우린 암묵적인 약속을 한 거야. 이웃의 평화를 위해서. 왜 고담시에만 배트맨이 살 거라 생각하지? 도담시엔 까마귀가 필요해.” 도담시의 균형을 지키는 또 하나의 기둥 “이 모자의 기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까마귀가 도담시의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한다면, 그 전에 큰 어둠이 덮치지 않도록 터를 닦는 것은 ‘모자 대감’의 소관이다. 모자 대감의 역사는 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임금의 사명을 받은 관리가 기린 모자를 머리에 쓰고 지금의 종로인 한양 견평방을 거닐며 일종의 의식을 치른 것을 시작으로, 현재에 이르러 윤지의 아빠인 ‘축대영’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이들이 하는 일은 단순해 보인다. 도시의 안녕을 기원하며 기린 모자에 액을 쓸어 담고 돌아와 몸을 닦아내는 일. 하지만 과거 기린 모자를 무시한 결과는 처참했다. 태평의 시대는 저물었고, “을미사변이 터지고, 황후가 도륙되었으며, 나라는 벌집이 되었다”. “여러분, 이 모자의 기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용이냐, 아니오. 사슴이냐, 아니오. 사자냐, 아니오. 이것은 기린이올습니다. 제가 이 기린 모자를 쓰고 여러분 앞에 선 것은 이 땅에 진정한 성군이 태어나사 대한민국을 세계 1등 국가로 이끌어주시길 앙망하는 이유입니다. 기를 모아주세요. 서로 사랑해주세요. 정의를 실천하세요. 그래야 평화의 시대가 열립니다.” 여러 시간을 건너 기린 모자의 새로운 주인이 된 대영은 충실히 모자 대감의 역할을 수행했다. 모자의 기린은 초원에 사는 얼룩무늬에 목이 긴 기린이 아니라, ‘용 대가리에 사슴뿔이 달리고 풍성한 갈기털을 가진 상상의 동물 기린’이었다. 대영은 아침 출근길마다 기린 모자를 쓰고 축문을 외웠다. 그것은 “우울과 분노, 좌절감으로 내일이 없길 염원하며 출근길에” 오른 ‘좀비 영혼’들의 부정한 기운을 정화하는 의식이었다. 말하자면 사람들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려 에너지를 재배치하는 것. 언뜻 1호선의 기인처럼 보이지만, 실은 대영의 ‘성스러운 산책’이 도담시를 지탱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주일 전 대영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며 도담시는 부정한 에너지에 휩싸인다. 맨홀 뚜껑이 깡그리 없어지고, 버스 정류장 쓰레기통에서 불이 나더니 근거 모를 폭우가 내리기 시작한다. 지체하면 둑이 무너져 감당할 수 없는 큰일이 벌어질 상황. 대영의 뒤를 이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대영과 희연의 아들이자 윤지의 오빠인 ‘축민기’. 민기는 결심한다. 새로운 모자 대감이 되겠노라고. 지금 여기를 날카롭게 비추는 강지영식 서스펜스 폭력을 끊는 방식에 대한 또 하나의 대답 소설은 이제 막 닥치기 시작한 도시의 재앙을 막으려는 남매의 분투를 긴박하게 그린다. 강렬한 장면 뒤에는 지금 여기의 문제를 놓치지 않는 날카로운 시선이 있다. 강지영의 소설은 폭력을 끊는 방식을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관계와 책임의 회복으로 그려낸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시대, 가정폭력과 방임, 살해에 이르는 이야기들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현실 속에서 우리는 분노하고, 때로는 법적 처벌을 넘어선 해결을 상상한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학대받던 윤지를 품어준 희연처럼, 윤지는 또 다른 아이 ‘온유’에게 손을 내밀며 사람을 다시 사람 곁으로 돌려보내는 선택을 보여준다. 완전한 선인도 완전한 악인도 없는 세계에서, 인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수행하고, 우리는 해답이 아닌 가능성을 마주한다. “모른다는 게 없다는 뜻은 아니야.” 도담시를 지키는 기린, 그리고 그 위의 가마괴. 현실과 환상이 겹치는 이 이야기 속 인물들을 우리는 어쩌면 이미 만난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