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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도는 못 오신다네
2. 아주 느린 시간 3. 힘 4. 사진 5. 그들은 말했네 6. 풍경 7. 속삭임 외로움 8. 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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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우리다. 도리없이 현실로 돌아올 밖에 없는데 이 대목에서 그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기껏 남의 번다한 격식을 흰눈질하다가 속없이 신문에 실린 자신의 부음을 가상의 허공에 그리며 세 번 웃는다. 장성한 아들 딸들과 사위 직함의 하잘 것 없음에 한 번 웃고, 스스로의 속절없는 망상에 또 웃는다.
--- p.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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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지금 농담을 하고 있으니 너무 놀라지 말게."
"표정은 정색인데 입으로만 농담이라고 하면 누가 믿어." "그래? 내 얼굴이 정색한 얼굴이라고?" "말장난 그만두게. 내 진담에 대답할 차례야." "그 전에 내 말 더 듣게." "계속 힘들게 만드는구먼." "누구는 힘 안 드는 줄 아나. 나에겐 말일세. 세월과 더불어 차차 지워지기는커녕 갈수록 덩치가 커지는 수치심이랄까 회한이 몇 가지 있네. 아냐 그것들이 새끼를 치는 바람에 생긴 소소한 것들까지 합치면 수도 없다구. 불시에 엄습하여 잠을 설치기 일쑤라네. 그러라고 누가 다그치는 것도 아냐. 사서 지랄하는 거지. 자네도 알잖나. 내가 고등학교 졸업장을 위조해서 삼류대학이나마 들어간 것. 뿐인가. 나는 자기 살림도 말이 아닌 친구 하나가 가족 몰래 빌려준 돈까지 떼어먹었다네. 그가 일찍 죽었거든. 당연히 유가족을 찾아 저간의 사정을 고백하고 돈을 갚았으면 좀 좋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아주 기회를 놓치고 인생 제대 말년에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안고 살아." "그러기로 들면 누군들 마음이 편할까." "속이 편하고 불편하고를 떠나 연만한 자는 내남없이 그만한 자충수와 싸우는 것 같애." "지나치게 소극적인 내거티브 발상이야. 이룬 업적은 어쩌고. 크건 작건 자신이 선택한 직업에 기를 써 가족 먹여 살리고 자식 기르는 일이 어딘데. 얼마나 벅차고 보람 있는 사업인데." "우리가 지금 문제 삼는 건 그런 상식이 아니잖아." ---pp.60~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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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지금 농담을 하고 있으니 너무 놀라지 말게."
"표정은 정색인데 입으로만 농담이라고 하면 누가 믿어." "그래? 내 얼굴이 정색한 얼굴이라고?" "말장난 그만두게. 내 진담에 대답할 차례야." "그 전에 내 말 더 듣게." "계속 힘들게 만드는구먼." "누구는 힘 안 드는 줄 아나. 나에겐 말일세. 세월과 더불어 차차 지워지기는커녕 갈수록 덩치가 커지는 수치심이랄까 회한이 몇 가지 있네. 아냐 그것들이 새끼를 치는 바람에 생긴 소소한 것들까지 합치면 수도 없다구. 불시에 엄습하여 잠을 설치기 일쑤라네. 그러라고 누가 다그치는 것도 아냐. 사서 지랄하는 거지. 자네도 알잖나. 내가 고등학교 졸업장을 위조해서 삼류대학이나마 들어간 것. 뿐인가. 나는 자기 살림도 말이 아닌 친구 하나가 가족 몰래 빌려준 돈까지 떼어먹었다네. 그가 일찍 죽었거든. 당연히 유가족을 찾아 저간의 사정을 고백하고 돈을 갚았으면 좀 좋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아주 기회를 놓치고 인생 제대 말년에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안고 살아." "그러기로 들면 누군들 마음이 편할까." "속이 편하고 불편하고를 떠나 연만한 자는 내남없이 그만한 자충수와 싸우는 것 같애." "지나치게 소극적인 내거티브 발상이야. 이룬 업적은 어쩌고. 크건 작건 자신이 선택한 직업에 기를 써 가족 먹여 살리고 자식 기르는 일이 어딘데. 얼마나 벅차고 보람 있는 사업인데." "우리가 지금 문제 삼는 건 그런 상식이 아니잖아." ---pp.60~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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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녘의 삶을 통해 들여다본 시대의 삶, 그 정감의 기록들
장편『만년필과 파피루스』이후 4년만에 최일남의 신작 소설집『아주 느린 시간』이 출간되었다. 이번 소설집은 다만 노익장의 원숙과 심오에 그치지 않고 한국 문학에서는 정말 드물게, '노년의 시간'을 정면에서 소설적 소재와 주제로 삼아 8편의 '노년' 연작으로 묶음으로써 삶과 소설 모두를 아울러 '시간'의 두께와 깊이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리하여 '선생의 노익장 문학으로 비로소 한국문학 100년이 그 연륜에 걸맞는 폭과 깊이를 갖추게 되었다는' 정호웅 교수의 상찬을 접더라도 이번 창작집의 의미는 각별한 바가 있다. 그것은 '균형의 회복'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데,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편중이 지나쳐 문학이야말로 오랜 온축과 성찰이 필요한 자리라는걸 일쑤 잊어버리게 만드는 우리의 문학 상황에 대한 삶과 작품을 통한 값진 비판이기 때문이다.
<고도는 못 오신다네>는 두 노인간의 추억담을 몰래 듣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린다. 눅진한 옛날 타령을 주고받는 두 노인은 친구가 산다는 술 한잔을 기다리고 있지만 정작 그들의 대화에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착잡하고 이율배반적인 그리움'이 놓여있다. 이 모순된 마음의 자리는 이 소설집 전반에 반복, 변주되어 나타나며 '시간'의 의미를 곱씹게 만든다. 곧 죽어도 곁불은 안쬐겠다는 이들의 '믿음직한 오기'에 마침내 주인공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마지막 대목은 작가 자신이라고 해도 좋을 소설의 화자와 두 노인의 거리를 한순간에 좁힌다. 이로써 작가는 이 작품이 단순한 노년 관찰기가 아니라 작가 스스로의 내면 성찰기임을 숨기지 않는다. 표제작 <아주 느린 시간>은 신도시에 사는 다섯 노인들의 이야기를 차례차례 전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죽음을 애증어린 친구처럼 끼고 사는 모습들이 약여하게 묘사되어있다. 그 중 다음의 두 대목은 압권이다. 먼저, 한국전쟁 전야의 가족사를 둘러싼 두 노인간의 화해 문제. 어릴적 실수로 상대방 집안의 형을 사지로 몰아넣게 된 김노인은 마음의 묵은 빚을 갚으려 한다. 그러나 정노인의 다음과 같은 답변은 그 부채 청산 의지가 오만임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쉽게 접할수 있는 말이 아니다. "나는 느낀다네. 모든걸 털고 해결하고 세상을 뜬다는 생각 자체가 무의미하고 사치스럽다고. 아니 주제넘어. 죽는 날까지 사람인것이 사람의 노릇인데 완전 종결이 어딨어. 가당찮은 허영이지." 다음, 부인을 먼저 보내고 홀로 사는것까지 멋져보일만큼 특출한 홍노인의 경우. 일본의 문학평론가 에토 준의 책을 읽으며 자신을 겹치고 혼자 이탈리아 요리 전문점에서 치즈 퐁 뒤를 음미하는 홍노인의 다음과 같은 독백(형식은 죽은 부인에게 건네는 말이지만)은 노년이 여전히 생생한 삶의 시간임을 감동적으로 전한다. "아무런들 과거를 볶아 먹거나 재탕하면서 살지는 않을래. 번듯한 직함을 시원섭섭하게 떨어내기는커녕 죽을때까지 끌고 다니는 위인들 있지? 사실은 불쌍한 사람들이야. 냄새 나도록 낡은 그 망토를 벗는 날로 자기는 볼장 다 본다고 믿기 때문일거야. 그냥 이렇게 있다는 확신이 나는 좋아. 사는것이 어차피 별거더냐 생각하면 편하고, 거기서 꾸역꾸역 고개를 쳐드는 용기를 확인하는 순간이 더 좋아. 매사를 뒤집어보는 용기. 그게 진짜라고 아까 그 사람도 말했어." <힘>에서는 체력 증강에만 집착하는 노인의 동선을 줄곧 좇아간다. '늙음'에 대한 자조는 작가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얼핏 공평한 것처럼 교묘하게 가장된 '힘'에 대한 테스트인 운동회에서 작가는 일인칭의 심리 진술을 통해 노인의 무력함을 토로한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툭 던져놓는 한마디들이 일품이다. 치매를 "초월의 신천지가 눈앞이다"라고 하는 작중인물의 독백은 역설적으로 작가의 노익장을 새삼 상기시킨다. <사진>은 죽음에 대한 얘기다. 죽음이 삶의 대극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또하나의 현실일 뿐임을 이 작품은 말해준다. "천만년 전이나 오늘이나 저마다 최초이자 최후의 실험자로" 될 수밖에 없는 죽음. 그 죽음이 던지는 공포에 대한 대화가 병원 영안실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그 뒤에 이어지는 <그들은 말했네>는 '작가의 글쓰기의 모든 비밀이 들어있는', 그리하여 최일남에게 '글쓰기의 반복성을 필연화하는'(김윤식,문학평론가) 작품이다. 소장한 책들을 처분하려다가 어쩔 수 없이 빠져드는 옛 추억이 이 작품의 뼈대를 이룬다. 그중 세 권, 즉『노신전집』『국사대관』『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에 담긴 사연이 책을 정리해야 하는 노인의 씁쓸함과 어울린다. 이 세 권에서 김윤식은 최일남 소설세계의 근간을 발견한다. '절묘한 소설적 균형감각'을 획득한 작가, 또 그것을 흐트러짐 없이 지속해온 유일한 문사 최일남을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풍경>은 최상위의 사회 지배층에서 한평생을 머물다 정년퇴직한 사람의 일상이 소재다. 직함이 없어진 노년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은 노인의 짜증이 시종 경쾌하게 이어진다. <속삭임 외로움>에서는 '소통'의 기능에 대한 독특한 성찰이 가벼운 어조로 펼쳐진다. 어느 컬럼니스트(아마도 작가 자신일테지만)가 이발사와 또 자기 글을 읽은 독자들과 나누는 대화들이 느릿하게 서술된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세상의 온갖 '요구들'과의 친화와 배타, 그 갈등이 작가 특유의 문체와 어울려 오롯하다. 마지막 단편 <띠>는 평생 백면서생이었던 주인공이 조직의 위원장 자리를 맡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어깨에서 허리로 빗금을 그으며 걸친 하얀 띠의 의미를 캐물으며 한국사회의 한 단면을 비꼰다. 식민지 시대에서부터 오늘까지, 변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비웃지만 그 정취는 차라리 흥겹기도 하다. '노을지경'으로 통칭되는 근작들이 한데 모인『아주 느린 시간』에서 죽음을 끼고 도는 노년의 지극히 일상적인 삶들은 어느덧 작가의 절묘한 문학적 균형감각과 날카로운 인식의 칼날을 통해 오늘 우리를 읽는 가장 정확한 텍스트로 전이된다. 단아한 문장 사이사이 흐르는 해학과 서정으로 한 시대를 묘파하는 이 창작집은 죽음을 향해 가는 인물들에게서 역설적이게도 다소곳한 희구와 동경을 담아낸다. 가공할 속도로 전염되는 단절, 그리고 소외의 피폐 속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최일남의 세계 인식의 지렛대는 그리하여 진정한 인간의 속도에 대한 그리움을 한 줄기 아름다운 광휘로 띄워 올리고 있다. 그 빛 속에서 우리는, 1953년 등단 이후 문학과 저널리즘에서 흐트러짐 없는 반세기 글쓰기를 통해 한국문학의 한 기둥으로 자리잡은 거장의 풍모를 발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