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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장 식민지 무교회자의 탄생 2장 단독으로 서다 3장 우치무라 간조 논쟁 4장 복스럽도다, 가난한 사람들! 5장 조선반도의 사명 6장 포플러의 사상 7장 소록도에서 온 편지 8장 북한 산록의 자전거꾼 9장 무교회, 전적 기독교 10장 심히 강대한 괴물 앞에서 11장 정진 또 정진 12장 부활의 봄을 노래하다 나가는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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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은 ‘조선’을 사랑하는 연인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조선’에 가장 귀한 선물 ‘성서’를 주고자 〈성서조선〉을 창간한다고 했습니다. 김교신에게 ‘조선’과 ‘성서’는 어느 것 하나를 빼놓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작게 여기고서는 그의 삶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책상물림의 낭만적 열정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후 김교신은 ‘성서’와 ‘조선’에 삶 전부를 쏟아부었습니다. 김교신은 단독으로 편집을 맡은 1930년 5월 이후 12년간 〈성서조선〉을 간행하기 위해 매달 집필과 편집, 교정, 서점 배달과 우편 발송을 혼자서 해냈습니다. 한 달에도 몇 번씩 집필을 위해 밤을 새워야 했고, 매달 총독부와 인쇄소와 서점을 오가며 엄청난 굴욕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매달 발생하는 결손을 자신의 교사 월급으로 메꾸어야 했습니다. 〈성서조선〉 독자는 200명 내외였고, 한 권에 15전, 반년 구독료가 90전이었습니다. 구독료로는 우편 발송 비용을 겨우 댈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구독료를 받아 잡지를 내는 것은 예수 재림 때나 가능할 거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조선’에 가장 귀한 ‘성서’를 주겠노라고 했던 「창간사」는 김교신의 사명 선언이었던 셈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역사 앞에서 자신이 몸담은 공동체의 모순된 자리를 발견하고, 거기에서부터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일일 것입니다. --- pp.36-37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연재가 끝날 무렵 조선 기독교는 신사참배 강요라는 시련 앞에 서 있었습니다. 김교신은 조선 기독교가 순교의 시대에 처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금후의 조선 기독교」에서 조선 기독교 50년 역사를 조망하면서 향후 조선 기독교는 ‘학문과 신앙의 완전한 합금’이어야 함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큰 위험을 무릅쓰고 외치노니 ‘금후 오십 년은 이성의 시대요 학구의 시대라’고. 식염주사 같은 부흥회로써 열을 구하지 말고 냉수를 끼쳐서 열을 식히면서 학도적 양심을 배양하며 학문적 근거 위에 신앙을 재건할 시대에 처하였다. 지나간 오십 년간의 조선 기독교도가 대체로 ‘성신타입’이었다면 금후의 그것은 ‘학구타입’이 되기를 우리는 기대한다. 그러나 전자가 은혜로 되었던 것처럼 후자도 은혜로 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학문과 신앙이 완전히 합금을 이룬 것이라야 금후에 닥쳐오는 순교의 시대에 능히 견디어 설 것이다. --- pp.139-140 1936년 12월, 김교신이 정릉리에서 자전거로 출퇴근하던 때의 일입니다. 아침 등교길에 인쇄소에 들러 교정하다가 시간이 되어 출발하려고 보니 자전거에 실어 둔 도시락이 없어졌습니다. 그날 일기에 “실로 산 눈 빼 갈 서울 풍경”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다음 날은 오전 수업을 오후로 돌려놓고 또 인쇄소로 가서 교정을 보다가 학교로 가려고 보니 현관 앞에 세워 둔 자전거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택시를 잡아타고 수업 시간에 맞춰 학교로 가서 수업하고 오후에 다시 인쇄소로 가서 또 늦게까지 교정을 했습니다. 교정도 못 끝내고, 자전거는 도둑맞고, 울적한 심사로 집으로 가는 길, 시내에서 전차를 타고 종점인 동소문에 내려 다시 시외버스로 돈암정까지 가서 거기서 고갯길을 넘어가야 합니다. 동소문 종점에 내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황혼에 누군가 김교신을 알아보고 다가왔습니다. 그는 소록도 형제들의 안부를 묻고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내는 데 보태어 달라며 후원금을 내놓고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떠나갔습니다. 김교신은 큰 감동에 휩싸여 동성학교 교정으로 들어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 일을 기록한 글이 「동소문 안의 감격」(〈성서조선〉 1937. 1.)입니다. 이 글에서 김교신은 30원짜리 자전거를 잃었지만 천국이 마음속에 있음을 깨달았으니 “오늘의 수지 결산도 흑자”라고 썼습니다. --- pp.186-187 이 자리에서 다시 김교신의 무교회를 생각하게 됩니다. 김교신은 ‘실(實)한 인생’의 본입니다. 그는 ‘헛(虛)된 삶’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교회주의를 경계했습니다. 교회주의의 위험은 제도와 교리 뒤에 숨어 하나님 앞에 서는 삶,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을 회피하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김교신은 교회 제도 뒤에 숨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고자 했던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김교신의 무교회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 속에서 크게 호흡하고 터놓고 대화하는 활달한 기독교였습니다. 신실의 덕을 공동체의 윤리로 삼은 기독교, 조선의 구원과 자신의 운명을 일치시키고자 한 기독교였습니다. 김교신의 무교회는 전적 기독교였습니다. --- pp.334-3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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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조선 땅에 들어온 지 불과 40년이 지난 즈음, 성서를 삶으로 살아내고자 했던 한 식민지 청년의 외침이, 백 년의 세월을 지나 오늘의 한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다시 울려 퍼진다.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
김교신의 삶을 ‘문학적 전기’로 되살리다 『김교신, 백 년의 외침』은 근현대소설 연구자이자 경북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인 저자가, ‘한국의 기독교인 인문학자로 산다는 것’에 대한 고민과 정체성 속에서 맺은 첫 열매이다. 김교신의 삶을 시간순으로 기록하는 것을 넘어, 그가 남긴 텍스트-『성서조선』, 일기, 산문과 각종 기록들-를 문학적 시선으로 읽어 내어 김교신의 내면과 삶의 궤적을 입체화했다. 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김교신을 ‘무교회자’로 불러왔다. 하지만 그가 거부한 것은 교회 자체가 아니라 ‘교회주의’였다. 제도와 형식에 갇힌 이들을 향해 성서의 자리, 예수 정신으로 살아내라고 했던 그의 외침은 이제 다시 한국 교회와 신앙인 안에서 공명한다. 저자는 이러한 김교신의 문제의식을 신앙적 차원에서 단선적으로 보지 않고, 교회 너머 인문주의자의 시선으로 읽어 낸다. 예를 들어, 김교신이 〈성서조선〉 「창간사」에서 밝힌 것처럼 관부연락선 위에서 “나는 아무리 해 봤자 조선인이로구나!”라고 두 번이나 탄식한 대목에서 저자는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과 임화의 시 〈현해탄〉을 겹쳐 읽으며 식민지 조선인이 겪어야 했던 소외감과 내면의 균열을 세밀하게 포착해 낸다. 김교신, 그는 누구인가? 김교신은 1901년 함흥에서 태어나 철들 무렵부터 식민지인으로 살았다. 1919년 함흥농업학교 재학 중 만세운동에 가담했고, 이듬해 도쿄로 건너가 도쿄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21년부터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에게서 성서를 배웠다. 조선으로 돌아온 김교신은 1927년 7월 〈성서조선〉을 창간하여 1942년 3월까지 15년간 간행하는 한편, 1927년부터 1940년까지 함흥 영생여학교와 양정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2년 3월 ‘〈성서조선〉 사건’으로 검거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고, 1944년 10월 흥남 일본질소비료공장에 들어가 조선인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하다 1945년 4월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지금, 다시 만나는 김교신 팔 남매의 아버지이자 교사로서 생업을 이어 가며 200명 내외의 구독자를 위해 매달 〈성서조선〉을 펴내는 일은 얼마나 수고로웠을까. 그는 한 달에 몇 번씩 밤을 새우고, 잡지를 발간하며 생기는 결손을 자신의 월급으로 메꾸어야 했다. 총독부와 인쇄소, 서점을 오가며 엄청난 굴욕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자전거로 집-학교-인쇄소를 활력 있게 내달리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식민지의 검열과 압박 속에서도 고독하게, 그러나 치열하게 시대를 마주한 언론인 김교신, 교사 김교신, 신앙인 김교신, 그리고 가장(家長) 김교신을 만나게 된다. 그는 이 모든 역할 가운데 “자신의 구원과 조선의 운명을 일치시키는 길”을 찾고자 했고, 그 길에서 “가장 사랑하는 조선에 가장 귀한 성서를 주는 일”을 사명으로 삼았다. 저자의 시선에 따라 책을 읽어 가다 보면 마침내 한 질문 앞에 맞닥뜨리게 된다. “평생을 식민지인으로 살면서 단 하루도 검열 없는 세상을 살아보지 못한 그가,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말은 무엇일까?” 교회주의에 갇혀 ‘교회 너머’를 잃어버린 오늘의 한국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김교신은 다시 성서로 돌아가 예수의 정신을 살아내라고, 헛된 삶에서 벗어나 ‘실한 인생’을 살라고 선포한다. 그의 이 외침은 제도와 형식 너머의 신앙, 창조 세계와 소통하며 숨 쉬는 열린 기독교, 곧 ‘전적(全的) 기독교’로 우리를 이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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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진실로 사랑한 단독자 김교신, 제도 교회의 때가 묻지 않은 ‘조선혼을 가진 조선 사람’을 만나고 싶어 했던 그, 백 년 후를 기약하며 진리의 빵을 물 위에 띄워 보낸 그의 삶이 ‘문학적 전기’로 다시 살아났다. - 박상익 (우석대학교 명예교수,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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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백 년의 외침》은 단순한 전기가 아니다. 무엇이 김교신의 정신을 그토록 불타게 했는지, 내적 결단의 비밀을 입체적으로 탐사한 추리문학이다. 종교도 아니고, 신비도 아니고, 예수 생명이 비약하는 ‘조선산 기독교’의 활로를 열어 보인다. - 이광하 (일산은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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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200명 내외의 작은 잡지 〈성서조선〉을 12년 가까이 아슬아슬하게 이어 간 식민지 지식인의 분투가 전해지는 책. 공의가 극단적으로 위축된 오늘, 김교신의 생애는 강한 섬광이 아닌 흔들리는 불씨로 남아 전멸 직전의 우리를 비춘다. - 이범진 (「복음과상황」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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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듯 김교신과 〈성서조선〉의 세계로 빠져들어 간 저자를 통해, 한 세기 전 한국 기독교를 향한 김교신의 예언자적 지성이 오늘 다시 오롯이 되살아난다. 일생을 ‘의에 대한 감응력, 진리를 향한 집착력’을 붙잡으며, 오직 걱정할 것은 고갈된 사상과 표류하는 신앙이라고 일갈했던 김교신의 외침이 지금, 여기 한국 기독교의 상황에 크게 공명한다. - 최종원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서양사 및 교회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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