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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부디, 나를 찾아줘
냉장고 문을 열었더니 시뻘건 얼굴을 한 책 옥탑방의 시신 나름 탄탄했던 계획 너도 네가 뭔지 모르지? 엇갈린 바람 거짓말 마주한 죽음 2장. 망치를 든 신 빈소에서 그 여자, 시요 두 번째 미처리 시신의 주인 붉은 물웅덩이 포장마차에서 주인을 잃어버린 황금 의외의 만남 하얀 여왕의 냉장고 3장. 도깨비, 끝나지 않은 이야기 〈치다꺼리 지침서〉 제2권 모기를 죽였던 소년 새 편집자, 알 문 저편의 여자 푸 13, 도깨비를 만나다 소원을 말해봐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도깨비 기다림 끝나지 않은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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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리 시신 주인들은 장례식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친 적이 없다. 장례는 산 자들이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매듭을 짓는 일이다. 반대로 죽은 이들에게 장례는 그 매듭을 싹둑 자르는 일이다. 그런데 미처리 시신 주인들은 다르다. 그들에겐 매듭을 끊어낼 기회조차 없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주검으로 방치된 채 홀로 떠돌고 있으니. 당연히 장례를 치른 시신의 주인들보다 죽음의 적응력이 떨어진다.
--- p.24 자살은 그의 삶을 송곳니처럼 찔러댄 어떤 계기 때문에 결정한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다. 그의 의식은 이 부분에서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 그의 머릿속에는 정말이지 온갖 잡생각이 굴러다니고 있지만 어떤 것은 그것이 나타나려는 순간 검은 막을 쳐 버린다. “뭘 그렇게 감추고 싶은 거냐?” --- pp.43~44 죽음은 정지상태가 아니었다. 온갖 벌레들이 모든 구멍과 찢어진 피부 사이에서 바글거리는 주검은 숫제 커다란 구더기처럼 꿈틀거리고 있다. 그쪽으로 다가가는 것은 죽음의 아가리 속으로 제 몸을 밀어 넣는 것이나 다름없다. 죽음은 전염병처럼, 아니, 물귀신처럼 자신을 끌어당기고 말 것이다. 그는 두 팔만 파닥거려 엉덩이를 뒤쪽으로 밀어 시신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서야 겨우 일어선다. 뒤이어 부리나케 달린다. 차마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 pp.77~78 이제 그는 어깨를 심하게 들썩이며 얼굴을 종잇장처럼 구겨댄다. 죽음에 대한 후회가 아니다. 죽음은 후회할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후회한다고 될 일도 아니지만. 그는 그저 슬픈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 --- p.117 파괴의 신들을 조정하는 인간들, 아직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으며 중력의 힘을 받을 수 있는 신체를 가진 인간들은 노 17을 보지 못한다. 노 17은 다만, 존재하지 않는 자, 이 세상에서는. 그러니 그들에겐 어떠한 위협도 되지 못할 터. --- p.124 무너진 건물은 쓰레기가 되어버린다. 동네 하나를 통째로 쓰레기장으로 만들기란 그처럼 쉬운 일이다. 오래지 않아 새싹이 돋아나듯 그 땅에는 철근과 시멘트를 비료 삼아 새로운 건물이 생길 것이다. 쓰레기장을 다시 번듯한 동네로 만드는 것도 그처럼 쉬운 일이다. 하지만 한 번 죽은 이는 두 번 죽을 수 없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없다. 미처리 시신의 주인들이 현재를 만들 수 없으며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 p.162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말을 머금은 존재라서…. 그래서…. 내 시야에 잡힌 마지막 형상은 망치를 든 손을 높이 치켜든 신. 천둥 치는 소리와 함께 산 그림자처럼 거대하게 내려앉은 어둠이 나를 집어삼키기 전까지. --- p.188 이 공간의 시선은 나를 보고 있다. 시선은 형체가 없는 존재인 나를 만들어낸다. 없지만 있게 한다. --- p.194 달빛 아래 피어난 박꽃처럼 하얗고 차갑기만 한 형체에 활기를 채울 수 있는 건 오로지 정보뿐이다. 방금 먹은 〈도깨비, 사라지지 않는 이야기〉에는 나의 세 번째 미처리 시신의 주인 K684-2789033-푸 13에 대한 정보가 있다. 이 정보로 인해 나는 또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언가로 만들어지고 있다. --- p.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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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보지 않으면, 죽음도 사건이 되지 않는다
고독사·사회적 고립·관계 단절-우리가 만들어낸 현실의 고증 〈하루〉는 고독사와 사회적 고립, 관계 단절을 특별한 ‘사건’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이 어떤 과정으로 ‘평범해졌는지’를 보여준다. 김미조 작가는 ‘저승의 리턴서비스’라는 장치를 통해, 누군가를 보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오늘의 현실을 차갑도록 정확하게 고증해낸다. 이 작품에서 가장 잔인한 것은 귀신도, 저승도 아니다. 무심함이 축적된 일상 그 자체다. 공동현관의 비밀번호와 택배 문자, 월세 납부일과 자동이체, 단절된 주소록과 무음 모드. 이처럼 생활의 편의가 늘어날수록 관계가 얼마나 얇아지는지를 집요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그 얇아짐이 결국 누군가의 마지막을 통째로 삼킨다. 죽음은 개인의 비극이지만, 그 죽음이 아무도 모르게 ‘방치’되는 순간, 비극은 사회의 구조가 된다. 작가는 누군가의 죽음이 뉴스가 되지 않고, 이야기조차 되지 못한 채 사라지는 구조를 감정 없이, 그러나 집요하게 추적한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사회의 구조 안에서 누구든 ‘나’가 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의 이야기다. 죽음이 ‘정지’가 아니라는 감각, 기록과 정보가 인간의 형체를 대신하는 세계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다. 이는 데이터와 효율이 우선되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존재가 어떻게 숫자와 코드로 환원되는지를 비추는 냉정한 거울이다. 그러나 작가는 미처리 죽음을 결코 ‘불쌍함’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끝까지 개인의 의식과 존엄을 따라가며, 교훈 대신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슬픔’이라는 정서를 남긴다. 김미조 작가의 문장은 차갑게 건조했다가도, 어느 순간 서늘한 시적 이미지로 독자의 숨을 멎게 한다. 〈하루〉는 또한 날카로운 세태 풍자를 놓치지 않는다. ‘열심히 살면 된다’는 말이 얼마나 쉽게 타인을 고립시키는지, ‘각자도생’이 얼마나 손쉽게 공동체의 책임을 증발시키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누구의 문 앞에서 조용히 멈추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소설은 무섭다. 귀신이 나와서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이미 저승의 접수처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독자를 위로하지 않는다. 외로움을 극복의 대상으로도 다루지 않으며, 고통을 성장의 재료로 삼지도 않는다. 다만 발견되지 못한 존재들이 어떻게 끝내 기록으로 환원되는가를 끝까지 따라간다. 그래서 이 소설의 마지막은 따뜻하지 않다. 다만 정확하다. 작가는 〈하루〉를 통해 말한다. 아무도 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세상은 평등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 사람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권리만큼은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이 질문은 곧,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살아 있는 동안 ‘발견’할 것인가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이 이야기는 더 이상 ‘남의 일’로 바깥에 머물 수 없게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처리 죽음의 주인들은 묻는다. 아주 가까운 어딘가에서, 자신들의 삶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는지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