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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김홍도는 살아 있다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하는 아이 도화서 사람들 나도 외할아버지, 외삼촌처럼 이거 보통이 아니네그려! 김응환과 강세황을 만난 어린 김홍도 도화서에 들어가서 왕세손 초상화는 누가 그리는 게 좋겠소? 어느 화원이 임금 어진을 그릴 것인가? 독특한 우리 정서를 자기 그림에 담고 온 마음 다해 금강산을 화폭에 담아 대마도에 다녀왔사옵니다 독특한 묘사법으로 그린 용주사 후불탱화 연풍 현감 김홍도 2천 냥을 주고 산 매화나무 신선 같은 사람 단원 김홍도 단원 김홍도 연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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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하는 아이
김홍도는 조선 시대인 1745년(영조 21년) 한양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학자들은, 출신 가문이 원래 무반(武班)에서 중인(中人)으로 전락한 집안이라는 것만 확인했고,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 내지 못했다고 한다. 무반이란 무관(武官)의 품계나 신분이고, 중인이란 조선 시대에, 양반과 평민의 중간에 있던 신분 계급이다. 김홍도의 본관(本貫)은 김해(金海)이고, 본이름 외에 부르는 이름인 자(字)는 사능(士能)이다. 본이름이나 자 이외에 쓰는 이름인 호(號)를 처음에는 서호(西湖)라고 했고, 그 후에 단원(檀園)이라 했으며, 때로는 스스로 취화사(醉畵士), 고면거사(高眠居士)라고 했는데, 만년(晩年: 나이가 들어 늙어 가는 시기)에는 단원과 함께 단구(丹邱)라는 별호를 썼다. 김홍도의 증조할아버지 김진창(金震昌)은 임진왜란 때에 큰 공을 세웠고, 만호(萬戶) 벼슬을 지낸 인물이었다. 만호란, 조선 시대에 각 도(道)의 여러 진(鎭)에 배치한 종4품의 무관 벼슬이다. 그러나 그의 할아버지 김수성(金壽星)과 아버지 김석무(金錫武)의 벼슬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것으로 보아 홍도가 태어날 때 그의 집안 형편은 무척 어려웠던 것 같다. 인기척(人기척: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소리나 기색)이 나자 김홍도의 어머니 인동 장 씨가 안방 문을 열었다. 어머니 굳은 표정으로 본 어린 홍도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딜 갔다가 막 들어오던 길이었다. “바른대로 대. 어디 갔다 온 게야?” 어머니 목소리에는 화가 잔뜩 묻어 있었다. “저, 저어. 외가댁(外家宅: 어머니의 친정인 외가를 높여 이르는 말)에요오…….” 홍도가 고개를 푸욱 숙이며 대답했다. “안 되겠구나. 네가 내 말을 어겼으니 매를 맞아야겠다. 어서 이리 들어 와!” 김홍도의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 윗목에 쌓아 놓은 바구니 뒤를 더듬었다. 손에 잡히는 것을 꺼내들었다. 회초리였다. 바로 앉은 어머니가 회초리로 방바닥을 탁탁 쳤다. 그러자 어깨를 옴츠린 홍도가 어머니 앞으로 와서 바지를 걷어 올렸다. “찰싹!” “아얏!” “찰싹!” “아얏!” 어머니는 회초리로 홍도의 종아리를 때렸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 외가댁에 안 갈게요. 다시는 안 갈 테니까 용서해 주세요.” “…….” 홍도가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비면서 빌었지만 어머니가 든 회초리는, “찰싹 찰싹…….” 멈추지 않았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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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가 그린 《씨름》《서당》《무동》《대장간》《벼타작》 같은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고 흐뭇해진다. 평범한 풍경들 같아 보이지만 신비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가 붓끝에 낚아 올린 한 세상의 구수한 바람이 담겨 있다.
단원 김홍도는 가장 조선적인 화가라고 한다. 그가 그림을 잘 그렸을 뿐만 아니라 어떤 그림을 그려도 그 그림에는 우리 깊은 맛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서민들의 일상생활이나 우리 강산을 그린 그림은 물론이고, 중국의 옛 인물이나 풍경을 그린 그림에서도 우리 조선의 깊은 멋이 담겨 있다. 김홍도는 1745년(영조 21년) 만호를 지낸 김진창의 종손이자 김석무의 아들로, 한양 도성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출신 가문은 원래 무반에서 중인으로 전락한 집안이라는 것만 확인되고,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김홍도의 외가 인동 장씨 집안은 대대로 도화서 화원을 배출한 화가 집안이었다. 그래서 그는 외할아버지 장필주와 외삼촌 장옥산에게 그림을 배웠다. 김홍도는 여덟 살 때부터 경기도 안산에 있는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웠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어린 시절을 안산에서 보낸 것으로 추측된다. 강세황은 인물, 사군자, 꽃과 새, 모두 잘 그리는 그를 추천해 도화서 화원이 되게 했다. 덕분에 김홍도는 이인문 등 여러 화가들과 사귀면서 열심히 그림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와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의 어진을 그렸다. 어진이란 임금을 그린 그림이다. 그런 뒤에 정조의 신임 속에 조선 후기 최고의 화가로 자리 잡았다. 그는 여러 그림 가운데 특히 산수화와 풍속화에서 뛰어났다. 김홍도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 수가 없다. 1805년 12월에 쓴 편지가 전해지고, 그해에 중한 병에 걸려 위독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 이후 그의 행적과 그림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가 예순두 살이 되던 1806년에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김홍도 그림의 특징은, 문학적 감수성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 그림을 보는 사람마다 각각 그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술술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김홍도의 그림은 300여 점이 전해지고 있다. 단원 김홍도는 신라 시대 솔거 이후 우리나라 그림의 정통을 확립한 조선 시대 최고의 화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