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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05
제1부 순례 집을 떠나며·13 바람이 지나간 자리·14 룸비니에서·15 카필라성 동문에서·16 출가(出家)·18 낯선 시장·19 이름 없는 하루·20 라우리아 난당가르에서·22 갠지스강 강가에서·24 둥게스와리에서·26 네란자라강 강가에서·28 마하보디 사원에서·30 새벽 별·32 보리수 아래에서·34 사르나트 녹야원에서·35 기원정사에서·36 바이샬리에서 쿠시나가르까지·38 아난의 눈물·40 곤다역에서·42 귀가·44 제2부 도착 멈춤·47 경계가 멎는 자리·48 바위·49 무심(無心)의 자리·50 이미 와 있었다·51 보았다고 여긴 순간·52 물 위에 돌 하나·54 환상·55 공(空)·56 머문 자리·57 무명(無明)에서 명(明)으로·58 죽음 앞에서·60 『금강경(金剛經)』을 읽으며·62 임제·64 수행의 길·66 있는 그대로·67 몸·68 보름달 뜨는 밤·70 겨울을 벗다·72 바람으로의 여행·74 제3부 침묵 고요의 언어·79 말이 멎은 자리·80 나는 말하지 않았다·82 물음 이전·84 시·86 시인의 삶·88 가야 할 때·90 저녁 강가·91 바둑과 시·92 AI 시대의 시인·94 시가 떠난 자리·96 숨 쉬는 벽·98 할! 혹은 몽둥이 서른 방·100 빈 두레박·102 마지막 장·104 남지 않는 대답·106 말이 물러난 자리·108 이후·110 시의 빈자리·112 시로부터의 자유·113 발문│양문규·115 시인의 말·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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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은 아직 눈을 뜨지 않았고
발걸음은 침묵을 깨며 길을 나선다 배낭 안에는 옷 몇 벌과 접히지 않은 생각들 집의 온기는 멀어지고 먼지는 숨결과 섞인다 저 멀리 숨 쉬는 곳을 향해 몸은 한 걸음씩 옮겨진다 걷기와 허기, 바람과 빗줄기 떠남이 몸을 비워간다 남김과 놓임은 같은 방향이다 오늘, 한 걸음을 내놓는다 -「집을 떠나며」 전문 기계는 멈추지 않고 시를 생산한다 나는 시어마다 숨을 고른다 이미 준비된 말들 앞에서 나는 놓칠 준비를 한다 수정은 또 하나의 선택이 되고 선택은 집착이 된다 시는 속도가 아니라 머뭇거림의 기술 생성되지 않은 자리에서 나는 조용히 남는다 여백이 남고 시는 말없이 놓여 있다 --- 「시 전문」 중에서 돌은 말없이 제자리에 있었다 바람은 머뭇거림 없이 지나간 방향을 남겼다 불은 다만 타올라 어둠을 밝히다 사라졌다 사람은 오래 이 침묵을 따라 걸어왔다 말이 생기기 전 문자가 오기 전 시는 이미 건너와 있었다 전하려 하지 않을 때 가장 정확해졌고 한 줄 사라질수록 의미는 또렷해졌다 시의 역사는 남긴 말이 아니라 말이 물러난 자리였다 --- 「말이 물러난 자리 전문」 중에서 연필은 이미 버려졌고 구겨진 종이는 떠났다 단어들은 길을 잃고 나는 더 붙잡지 않는다 그리움은 밤에 고인 물 욕망은 모래 위의 흔적 스스로 녹아 사라진다 모든 소리 멎을 때 고요가 나를 세운다 길도 발자국도 없이 잠시 머물다 시도 나도 사라진 자리 하나의 숨결만 남는다 ---「시로부터의 자유 전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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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끝내기 위해 썼지만 끝낼 것이 없었다. 시는 사라졌고, 그 자리에 침묵이 남았다. 침묵은 주장하지 않아 더 많은 것을 허락했다. 이후에도 세계는 여전할 것이다. 다만 이제 시의 빈자리에서 시로부터 자유롭다. 2026년 3월 임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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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근수 시인은 수행적 세계관을 직접 설교하지 않는다. 대신 바람, 물, 몸, 사물의 감각을 통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자리로 나아간다. 시는 의미를 쌓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덜어내는 형식이 된다. 이 시집은 결국 시의 완성이 아니라 시의 소진을 기록한다. 남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빈자리이며, 시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말 이후의 고요이다. 그 고요는 닫힌 침묵이 아니라, 세계가 다시 숨쉬기 시작하는 여백으로 남는다.
그래서 임근수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해 무엇을 말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설명은 점점 사라지며, 남는 것은 사물과 호흡과 시간의 미세한 울림뿐이다. 독자는 그 자리에서 해석자가 아니라 목격자가 되며, 의미를 읽기보다 존재의 흐름을 함께 따라가게 된다. - 양문규 (시인·문학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