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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
2. 물 위에서 3. 길 4. 칼에 찔린 자국 5. 바위 위에 눕다 6. 개교기념일 7. 술래에게 8. 어느 해의 봄날 |
金仁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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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기 며칠 전, 삼십 년 만이라는 폭설이 내렸다. 눈을 좋아할 나이는 지났지만, 온종일 틈만 나면 창을 내다보았다. 저녁때는 차바퀴에 체인을 감고, 자유로엘 잠깐 나갔었는데 어떤 차 한 대가 거꾸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차가 무슨 까닭으로 남들 다 앞으로 가는 길을 거꾸로 달려오고 있었는지 그 사연이야 알 길이 없다. 비상등을 켜고 거꾸로 달려오고 있는 그 차를 비켜가면서, 나는 잠깐 '어,어' 했다. 그 이상으로 표현할 방법을 알지 못할 사태였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불현듯 그 차 생각이 난다. 나는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 p.326 작가후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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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심심하지. 사는 게 심심해 죽겠지. 너?'
나는 다시 남편을 흔들어 깨울 수가 없었다. 남편의 그런 식의 말은, 그날 하루 온종일 나를 달궈놓았던 흥분과 전율을 삽시간에 가라앉혀버리기에 충분했다. 사실이었다. 나는 심심했고, 내 삶은 너무나 무료했다. 그러나 그것과 방화범과는 같은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말할 수가 없었다. 남편이 내게 심심한 까닭을 물어보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 p.2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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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원하는 건 당신이지 내가 아니에요.
두번째 담배의 꽁초를 비벼끄는 그를 누운 자리에서 바라보다 말고 나는 소리쳐주고 싶었다. 적어도 그때까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관계에대한 소망은 그에게 있지 내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 너, 그런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니? 너 콜라 다 마시고 그 콜라병에다 바람 불어넣어본 적 있어? 피리 소리 같은 게 나지? 그 소리가 뭐라고 하는 건지 아니? 외로워, 외로워... 심심해, 심심해 죽겠다구.. 그런단다. 윤숙의 표현에 의하면 그나 김이나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빈 콜라병들이었다. 가정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거나, 혹은 아무 문제도 없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게 너무 심각해져버려서 갑자기 생이 공허해진 남자들. 탄산음료가 다 빠진 뒤의 콜라병 같은 사람들, 색소도 빠지고 단물도 빠지고 기포도 다 사라진 뒤의, 구멍만 남은 텅 빈 유리병 같은 존재들... 그들이 그 텅 빈 병에다 무엇을 채워넣고 싶어하는지, 그건 우리가 상관해야 할 바는 아니었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한, 어쨌든 비굴한 건 그들 쪽이니까. 텅 빈 병이 채워지기를 원하는 건 어쨌든 그들 쪽이니까. 언젠가는 또다시 말끔히 비워질 병이기는 하겠지만, 그만큼 뒤끝이 깨끗한 관계가 또한 그런 거니까. 윤숙의 말은 분명히 옳았다. 그녀의 말이 틀리다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무엇이 뒤엉켜버린 것일까. 어쩌면 내게 가장 미숙했던 것은 이별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p. 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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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다보지 않았지만 그 순간에도 거리는 쨍한 햇살로 밝을 것이고, 비는 내리지 않을 것이고, 어느 거리에선가는 네번째 택시와 다섯번째 택시 사이에서 브라스밴드가 힘찬 연주를 울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나... 네번째 택시와 다섯번째 택시 사이의 군중들 틈에 끼어 힘차게 박수를 치고 있는 나... 그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나를 응시하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찍고 있는 것 같았다.
--- p.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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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내가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나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의 비난과 분노가 훨씬 더 명확해지리라는 걸 잘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이 땅에 숨어 있었다. 나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곳으로 돌아가는 순간, 내개 더 이상의 피신의 땅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걸 말이다. 그곳으로 돌아가는 순간부터 나는 다시는 잠시 잠깐도 잠을 잘 수 없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 202001/03/17 (smkim0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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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와 욕망 그리고 죽음의 삼중주
김인숙의 신작 소설집『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에는 제45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한「개교기념일」을 포함, 근자에 발표한 중,단편 여덟 작품이 실려 있다.
김인숙의 소설은 그 진폭이 넓다. 신춘문예 당선작「상실의 계절」은 육체에 대한 욕망과 좌절을 대담한 감수성으로 포착해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하지만 80년대 후반에 나온『'79-'80 겨울에서 봄 사이』『함께 걷는 길』등은 초기 작품활동과는 상당한 거리를 보이며 민중적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문학 속에 끌여들였다. 90년대로 넘어서면서 그의 소설은 이른바 후일담 소설의 색채를 띠기도 했지만, 여성적 정체성에 국한되지 않는 폭넓은 시야로 다양한 실존적 위기 국면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러한 진폭과 자기 갱신에는 섬세한 심리 묘사와 소설의 이야기성을 적절히 결합시키는 신뢰할 만한 작가적 재능이 뒷받침되어 있다. 여기에, 세대적 자리까지 포함한 자기 정체성의 질문이 끊임없이 탐구되면서 김인숙의 소설은 매번 괄목할 지점에서 독자들과 만나왔다. 이번 소설집『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에서 일층 깊어진 작가의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소설집『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에서 쉬임 없이 반복되는 문장은 '아무도 아닌 사람', '한 번도 존재해본 적이 없는 사람', 그래서 '언제나 몸이 되고 싶은 사람', 그 까닭 모를 '아무것도 아님'과 같은 것들이다. 소외와 좌절되는 욕망, 그리고 유일한 진실처럼 보이는 죽음 앞에서의 무력함. 그 결과로 나타나는 무료함, 존재 증명을 해 보일 길 없는 삶에 대한 회의, 이것은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지닌 내면의 풍경이다. 문학평론가 변지연씨는 김인숙씨의 이번 소설집에 등장하는 이런 사람들은 "모두가 희미해진 자기 정체성을 문제 삼는 한 가지 초상의 다양한 변주들"이라고 지적했다. "작가가 이번 소설들에서 부단히 묘사해 보이는 것은, 이혼을 꿈꾸는 부부나 이미 이혼을 결행한 남녀들, 그리고 목표와 열정을 상실한 소시민적 삶을 자조하는 이들의 모습이다. 그 양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그들은 모두가 희미해진 자기 정체성을 문제 삼는 한 가지 초상의 다양한 변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체성 상실의 근본적인 요인은 무엇일까? 이 소설집에서 이것은 자주 '소통의 부재'로 인식되고 있다. 이번 소설집이 성취해내고 있는 가장 빛나는 부분은, 서사들 대부분이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단순한 성의 이분법을 넘어서 누구나의 삶에 깃들인 쓸쓸한 징후들을 포착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