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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 낯선 마을
1장 · 유예 2장 · 균열 3장 · 선택은 끝났다 4장 · 되돌아온 것들 마지막 · 다시, 그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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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로 들어가는 넓고 큰 외길의 양옆에 잔뜩 들어선 그것들은 나를 환영하는 것인지, 경계하는 것인지 모를 얼굴로 존재했다. 크기가 작은 것부터 큰 것, 배에 글씨가 써진 것, 밋밋한 것, 무서운 것, 처연한 것, 기괴한 것, 일그러진 것, 얼굴 없는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거친 것, 매끈매끈한 것이 한데 모여 있자 거대한 지옥문 앞에 선 듯한 경외감이 들었다.
---「시작 · 낯선 마을」중에서 나는 차마 마을 입구로 더 들어가지 못하고 차를 세웠다. 두려움에 손이 떨려 문을 여는 것조차 버거워 겨우 기어를 P로 옮겨두고 숨을 몰아쉬었다. 근심 걱정이 없는 마을이라더니, 순 거짓말이 아닌가. 길 바로 옆에 붙은 가장 거대한 장승 두 개의 앞에는 투박하게 ‘장승’, ‘솟대’라는 글씨가 적힌 나무판이 매달려 있었다. 입구를 경계로 공간이 휘어지는 느낌이 들어 다시 구토감이 올라왔다. 공기의 흐름이 멈추고, 장승이 내게 말을 걸었다. 여기를 넘어서면 끝이라고. ---「시작 · 낯선 마을」중에서 구덩이 안에는 되다 만 것들이 잔뜩 있었다. 뭔가 만들다 만 것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가엾은 것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익숙함. 그 순간 구역감이 치밀어 올랐다. 우웨에에엑. 나는 가장자리에서 구덩이 안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몇 걸음 물러나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헛구역질을 해댔다. 목구멍 너머로 나오는 것은 없었으나, 묘한 비린내가 났다. 입가로 침이 뚝뚝 떨어졌다. 눈물일지도 몰랐다. 눈앞이 어쩐지 뿌옇게 흐려지는 느낌이었으므로. 얼굴을 닦아냈다. 다시 숨이 가빠와서 한참 구역질을 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숨이 막히고 무서웠으나, 어딘지 가엾은 느낌이 들어 또 울었다. 바닥을 네발로 짚은 들짐승처럼 흙에 이마를 처박았다. 구덩이 안에 있는 것은 너무 낯익은 것들이어서 제대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1장 · 유예」중에서 “장승은 온기와 피를 먹고 자라는 법이야. 절실하고, 절실하게.” 피부에 날카로운 한기가 스쳤다. 시간이 멈춘 듯, 한동안 누군가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 마당에 살아 있는 존재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1장 · 유예」중에서 홍 씨가, 그자가 한 번 더 내 등을 쳤다. 내 입에서 억 소리가 새어 나왔다. 목에서 나온 것이 소리만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가슴 한쪽에 늘 걸려 있던 무언가가 툭 튀어나왔다. 이상하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될 것만 같은, 그런. 본능적인 거부감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피 한 덩어리가 목구멍을 넘었다. 안에서 밖으로 밀려 나온 그 덩어리는 품에 안긴 나무로 떨어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가 버리고 싶은 것은 오로지 나일 뿐이었는데. 아니면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걸까? 잘 모르겠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생각의 아귀가 맞물리지 않았다. ---「2장 · 균열」중에서 수많은 반복 끝에 마침내 장승의 눈을 마주했다. 감격스러워 다시 눈물이 왈칵 새어 나왔다. 나는 이제 내 표정이 어떤지 잘 알고 있다. 꼴사납게 일그러져서, 입술이 꾹 다물고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다. 눈썹은 이상하게 비틀린 채로. 장승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무엇이 그리 억울한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눈매의 장승은 지금 나의 표정과 닮아 있다. 그 얼굴이 애처롭고 사랑스러우면서도 혐오스러웠다. 나는 눈 아래 그 거짓된 나무 얼굴을 칼로 내리찍었다. 날카로운 살점이 튀었다. 죽어, 사라져, 그렇게 울지마, 나약한 계집애, 멍청하고 아둔한 년! 분명 그리 외쳤건만, 목구멍을 타고 나오는 것은 우오오 하는 짐승의 절규일 뿐이었다. ---「2장 · 균열」중에서 안녕. 누군가의 딸이었던, 누나, 이웃, 직원, 친구. 얄팍한 단어들이 잉크가 번지듯 흐물거리다 사라졌다. 짐이 사라진 자리에 서늘한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 속으로 깨끗한 흙이 차오를 것이다. 거칠고 부드러운 그 곳의 잔재가 빈 구멍을 메우는 감각. 이 무의미한 시간을 어서 끝내야 한다. 나의 섬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3장 · 선택은 끝났다」중에서 정희나의 허물이 드디어 벗겨졌고, 그 빈 껍데기는 완전한 타인에게 넘어갔다. 그는 그것이 보물이라도 되는 양 품에 안았으나, 나는 이미 문밖의 진득한 어둠, 그 너머에 존재할 달콤한 흙 비린내와 메마른 나무 향기를 향해 온 신경을 쏟을 뿐이었다. ---「3장 · 선택은 끝났다」중에서 내가 만들고 떠난 장승 옆으로 몇 개의 작은 장승이 빼꼼히 모습을 드러냈다. 모르는 얼굴도 몇이 보였다. 그들은 나를 보며 열심히 손뼉을 치고 있었다. 그 틈바구니에는 철산의 모습도 보였다. 스스로를 버렸으나 후회하며 침묵하던 남자. 얄팍하게 타인을 구원하려 했던 그 남자. 내게 뭐라고 소리치는 그의 입안에는 혀가 없었다. 버림받은 장승은 그가 행한 죄의 근원을 앗아갔다. 입속의 검은 늪이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며 나를 불렀다. 그 옆에는 양 씨 할머니가 서 있었는데, 예전보다 더욱 정정한 모습이었다. ---「4장 · 되돌아온 것들」중에서 그는 네발로 기어 아주 거대한 장승 앞에 도착했다. 목을 꺾어 고개를 들자, 배에는 긴 칼자국만 남은 장승이 눈을 크게 부릅뜨고 저 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과거의 어느 날, 새하얀 철관 안에서 마주한 한 여자를 닮아 있었으나 그날처럼 자신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때는 그 시선이 두려웠으나, 이제는 그것을 갈망한다. 장승은 한상협을 향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바닥에 머리를 처박으며 크게 울부짖었다. 몰락한 자는 갈 길을 잃었지만, 마침내 당도했다. ---「4장 · 되돌아온 것들」중에서 커다랗고 낡은 장승.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부서지지도, 곰팡이도 피지 않은 그 장승은 배를 칼로 가른 커다란 흔적이 있었다. 그 흔적 사이로는 진짜 피인지 페인트인지 모를 붉은 뭔가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서희의 다리가 달달 떨렸다. 도망쳐야 해, 그 생각이 들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다리가 굳은 사람처럼 꼼짝도 못 했다. ---「마지막 · 다시, 그 마을」중에서 성규는 자신이 무엇을 묻는지 몰랐다. 말을 하면서도 말의 의미가 희석되었다. 셋? 둘이 아닌가? 셋인가? 저건 뭐지? 왜 우리가 이 장승 앞까지 왔지? 목적이 흐려진 하루를 되짚으려고 해도 기억의 조각이 온전히 조립되지 않았다. 그 순간, 서희가 비명을 지르며 성규를 지나쳐 입구가 있던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서희가 있던 자리에는 겁에 질린 그의 체액만이 덩그러니 썩어가고 있었다. 성규는 카메라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화면 속의 소름 끼치는 장승 앞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았다. 저게 누구지. 그렇게 생각하면, 또 안 보이는 것 같아서 눈을 몇 번이고 깜빡거렸다. ---「마지막 · 다시, 그 마을」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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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인 위로가 주는 섬뜩한 속박
‘텅 비었고, 가득 찬’ 존재가 주는 근원적 공포 “오늘부터 장솟마을에서 장승을 만들고자 한다오.” 《장솟마을에서》는 상처 입은 인간을 감싸는 원초적인 위로가 섬뜩한 속박으로 얽히는 토속적 공포소설이다. 주인공 정희나는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 사회에서 밀려난 패배감, 누구에게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다는 외로움을 짊어진 채 생경한 섬으로 들어간다.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낸 장솟마을은 ‘근심 걱정 없는 마을’답게 다정하고 평온해 보인다. 왠지 이상한 마을 사람들은 낯선 그녀를 이상하리만치 환대하면서 그녀의 고통에 공명하며 위로한다, “괜찮다”라고. 그러나 그 따스함은 순수한 호의라기보다 그녀의 가장 약한 곳을 콕 건드리는 치명적인 유혹은 아닐까……. 이 작품에서 장승과 솟대는 전통적인 수호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다른 존재로 바꾸는 경계의 장치다. 정희나는 마을에서 진정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안도감을 느끼지만, 그 안도는 점차 자기 자신을 비우고 마을의 일부가 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그녀가 다시 도시로 나가 ‘선택’을 하고 또다시 장솟마을로 돌아오는 장면을 따라가며 독자들은 고민하게 된다. 과연 그녀는 구원을 받은 것인가, 마을에 완전히 먹혀 속박의 저주를 받은 것인가? 《장솟마을에서》의 공포는 귀신이나 살해 같은 공포보다 더 근원적이다. 어쩌지 못하는 삶을 내려놓고 싶다는 마음,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마음이 어떻게 ‘자기 상실’로 폭주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인간이 고통을 끝내기 위해 어떻게 자신을 포기하는지 그리고 한 공동체가 어떻게 한 인간을 집어삼키는지를 처절하게, 냉혹하게 그려낸다. 위로받고 싶은 마음과 위로하는 마음이 시나브로 접하는 장솟마을은 보기에 따라 악지(惡地)이기도 선지(善地)이기도 한, 그야말로 기이한 장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