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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약속
최은주
문경출판사 2026.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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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밭 시인선

목차

■서시 나의 노래·9
제1부 네 목소리가
17·물처럼
18·그날, 네 목소리가
20·초여름
21·십일월, 먼저 떨어진 이름
23·강촌江村
24·거품의 집
25·그래 그래
26·꽃잎 손수건
27·방천 부락 언니
28·사월의 밤
29·분필의 그늘
31·국화 속에서
32·신호등 앞에서
33·추모관 앞에서
34·오월, 그대로 간다
35·춘화 언니
36·하얀 운동장
37·홍차
38·헤어질 결심
40·허무의 자리

제2부 그날의 약속
45·그날, 약속
46·장독의 봄
47·그 남자
49·고등어와 닭의 밤
51·호박 가족
52·하루의 몫
53·두근거림
54·둘둘 가을
56·들러리
57·딸에게
58·사진 속에 없는 아이
60·사과의 추억
61·네가 서는 날
63·언양, 겨울 끝자락
64·언양댁
65·오케이, 오키나와
66·페달을 밟으며
68·처음, 한 마리
69·마침내, 다시 걷기로 한다
71·오빠의 등

제3부 달무리 앞세우고
75·달무리 앞세우고
77·계족산의 봄
78·제주의 바다
79·반구대 암각화
80·벚꽃이랑
81·해바라기 앞에서
82·회남정 풍경
83·프리지아 한 다발
84·눈 오는 날
85·마티에 올라
87·비 오는 날 법당에서
88·섬진강 길
90·옥정호, 물 위를 달리다
92·청기와 집
94·봄 한 바퀴
95·자기최면
96·정선, 다시 가는 길
98·출발, 두 바퀴
99·바람을 가를 때
100·클로버

제4부 아무도 모르는 밤
103·초연 배우
104·설거지 단상
105·겨울냉면
106·노천탕
108·그녀의 이름
109·문턱
110·맡겨 둔 간
111·딸만 낳은 집
112·우편함 열기
113·부록 같은 나날
114·성질머리
115·공생
116·같은 말, 같은 얼굴
117·아무도 모르는 밤
118·장롱을 보내며
120·에스프레소, 처음
121·부엌의 가을
122·옮겨 앉는 자리
124·찐빵
126·파소
|작품해설|
흐르지 못한 감각의 파편들, 존재론적 사유로 확장하기 _ 송재일·128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4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148쪽 | 130*210*20mm
ISBN13
9788978468930

책 속으로

노래한다

유리잔 같은 마음들
깨지지 않도록
다독이며

서툰 내 노래가
세상 어디쯤
누구인가의 가슴 안쪽에

조용히 뿌려지는
한 줌의 산들바람이기를

혼자서 걸어간다.
-서시 〈나의 노래〉에서

엄마, 손이 왜이래?
뚝살 배긴 손끝에 매달려 까맣게 물든 손톱
아버지 생신에나 쌀밥이 소반에 올라왔던 시절이었다.

남천내 맑은 봄물이 방앗간을 돌아 미나리꽝을 적셨다.
까마귀 떼 겨우내 소란을 피우던 보리밭에 새싹이 돋으면
진흙 속에 다리를 박고 여름 내내 철벅철벅
미나리를 베어내다가 굽은 허리 일으켜
하늘을 올려다보는 엄마의 눈엔 눈물이 그렁거렸다

흙 묻은 미나리 곱게 다듬고 씻어야지
언양 장에 내다 팔아 좋은 값 받아야지
죽으면 어차피 썩어질 몸뚱아리
간고등어도 사고 얘들 월사금도 주어야지

언양 불고기 냄새 온몸에 배던 날,
밤이 깊도록 잠 못 들어 뒤척였다
얼른 커서 까만 손톱 미나리 물 벗겨드릴게요
그날 약속, 돌아누운 베갯머리에 아직도 남아 촉촉하다.
-「그날, 약속」 전문

--- 본문 중에서

추천평

최은주 시인은 시집 「그날, 약속」에서 끝내 흘러가지 못한 체험의 잔여殘餘를 통해 하나의 시적 세계를 구축한다. 감각으로 남은 기억, 말해지지 못한 관계, 반복 속에 침전된 일상은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기보다 유예된 상태로 지속된다. 이때 시는 바로 그 유예의 지점에서, 흘러가지 못한 것들이 스스로 발화하도록 하는 형식으로 기능한다.

이 시집의 체험은 ‘남아 있음’의 방식이 변형되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감각의 파편으로 머물던 체험은 관계 속에서 윤리적 긴장을 획득하고, 자연 속에서 존재론적 사유로 확장된 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삶을 지속시키는 원리로 자리 잡는다. 중요한 점은 이 체험이 끝내 완결된 의미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때, 그것은 더 깊은 인식의 가능성을 생성한다.

또한 이 시집에서 잔여, 즉 ‘남아 있음’은 개인의 내면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관계와 구조 속에서 발생하며, 사회적 조건과 맞닿아 있다. 이름으로 환원되지 않는 삶, 역할 속에서 소모되는 존재, 반복 속에서 스스로를 견디는 일상은 모두 이러한 현실을 드러낸다. 따라서 체험의 잔여는 개인적 기억을 넘어 세계를 비추는 균열의 형식으로 기능한다.

결국 이 시집이 보여주는 것은 체험이 흘러가며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음’으로써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이다. 시는 그 ‘남아 있음’이 언어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도록 붙들어 두는 자리이며, 의미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형식이다. 이로써 이 시집의 시편들은 “흘러가지 못한 것들은 사라지지 않으며, 바로 그 멈춤의 지점에서 세계를 다시 말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숨기고 있다. - 송재일 (문학평론가, 공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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