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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에세이로 쓰는 에세이 5
intro 약력이 말하지 못하는 것 13 1부 에세이는 그렇듯 부재자 - 에세이라는 배회하는 글쓰기 22 샛길 - ‘삶-비밀’을 둘러싼 옆길들 33 기억 - 시간들의 물질적 디테일 42 세부 - 나를 찌르는 사진의 테두리 49 2부 이토록 겸손한 형식들 단장 - 잘린 글쓰기, 멈춘 글 읽기 58 몽타주 - 교차 편집의 글쓰기 65 편린 - 이토록 우발적인 목록들 71 소품 - 장르들의 위계와 기득권 77 에세이 - 이름의 시작과 가장자리 83 3부 나는 ‘나’를 모르고 이명 - ‘헤테로님’, 그는 누구인가 90 나 - 1인칭은 말할 수 있는가 97 ‘나’ - 언어 없는 얼굴들 103 일기 - 외면에 대한 기록 109 4부 당신에 대해 쓸 수 있다면 당신 - 눈앞에 없어도 부를 수 있는 120 편지 - 가닿지 못하는 것의 효용성 125 무대 - ‘당신’을 편지에 초대하다 132 5부 그의 이름은 만약에 가족 - 부모라는 질병의 기원 138 애도 - 내 고양이의 장례 145 이름 - 나의 ‘아토포스’ 그 사람을 어떻게 부를까 153 6부 장소의 관능이 사라지면 장소 - 비스듬히 사라지는 사막 162 여행 - 지중해의 뜨거운 문장들 169 유령 -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것들 177 7부 사물의 시간 속에서 냄새 - 보이지 않는 세계의 감각 188 식물 - 움직이지 못하는 것들의 움직임 194 ‘분더카머’ - 보물과 잡동사니의 사이 200 사물 - 친애하는 가구들의 역사 207 outro 이 책에서 출몰하는 당신들의 텍스트 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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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적인 글쓰기는 약력 쓰기와 반대편의 자리에 있다. 요약된 정보들이 드러낼 수 없는 삶의 미시적인 영역들, 신체와 기억과 감정의 장소와 시간들이 있다. 약력으로 환원되지 않는 삶의 감각을 드러내고, 제도적인 형식에 균열을 내는 작업은 에세이적인 것이다. (…) 약력은 삶의 이력을 요약하려는 불가능한 시도이다. 다시 쓰는 약력도 삶을 바꾸지 못한다. 삶의 전모를 나는 알지 못하며, 약력을 쓰는 순간 ‘나’는 분열된다.
--- 「약력이 말하지 못하는 것」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애도의 글쓰기들은 대개 ‘부재자’에 대한 익숙한 그리움을 ‘부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다른 질문으로 바꾸어놓는다. (…) 이야기의 쾌감 같은 것도 없다. 상념들은 흘러가고 사유들은 유동하고 글쓰기는 흔들린다. 우리가 가엾은 말들을 만지작거리며 닿을 수도 없는 죽음과 불투명한 삶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 「에세이라는 배회하는 글쓰기」 중에서 삶의 비밀이 어느 순간 드러나는 것은, 구체적인 감각의 회복이다. ‘그 사람을 사랑했는가’라는 질문이 있다고 해보자.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한 완벽한 정의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질문은 사실 무기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답해야 한다면, 가령, 그때 그런 ‘시간-공간-신체’를 둘러싼 ‘함께 있음’의 감각이 존재했다고 말할 수는 있다. --- 「‘삶-비밀’을 둘러싼 옆길들」 중에서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내가 사랑할수록, 정체를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아토포스적인 존재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정체를 점점 더 모르게 되는 것이다. 조금 더 정치적인 영역에서 말할 수도 있다. 제도적 ‘등기’가 어려운 ‘난민’ ‘피식민자’ ‘퀴어’도 아토포스적인 존재이다. 이런 존재들은 제도의 안과 밖을 가르는 권력을 폭로하게 만들어준다. 아토포스적인 존재는 정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제도 안에서 보호받지 못한다.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다. 제도의 바깥에서 사랑에 몸을 던진 자는, 소수자이고 약자이며 난민이기 때문에 아토포스적이다. --- 「나의 ‘아토포스’ 그 사람을 어떻게 부를까」 중에서 사물들은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고 이동의 궤적 속에서 기억은 재구성된다. 나는 ‘71센티의 편백나무 책상’과 오래 함께한 적이 있다. 그 책상은 나의 비루함과 연약함, 좌절과 기쁨의 소소한 장면들을 지켜왔다. 거기서 읽고 쓰고 밥을 먹고, 시간이 벌레처럼 죽어가는 소리를 듣고 가끔씩 무너졌다. 이사하던 날 이삿짐 트럭 위에서 뒤집힌 채 묶여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수치스러웠다. 그것은 외설적이기 보다는 버려진 소품처럼 보잘것없고 우스꽝스러웠다. 왜 ‘71센티의 편백나무 책상’이었는가는 설명할 수 없다. 책상에서 벌어진 수많은 생의 순간들을 책상이 기억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일까. 이삿짐 위에서 뒤집어진 책상이 겪는 모욕은, 그 기억들에 대한 모욕이며 그 시간을 농담으로 만드는 것일까. --- 「친애하는 가구들의 역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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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과 시간들의 ‘벌거벗음’을 마주하는
‘삶-비밀’에 대한 글쓰기 기억에서 잊혀진 세계가 다시 떠오르는 것은 각별한 몸의 감각에 의해서이며, 글쓰기는 그러한 감각을 통해 다른 시간으로 전환되는 사건이다(39쪽). 나의 바깥으로 나아감으로써 ‘다른 나’로 돌아오는 역설적 움직임. 피부에 스며들어 있는, ‘그때 그곳’에 내 신체가 있었다는 기억의 감각(176쪽). 따라서 저자에게 삶의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는 ‘나’의 냄새를 견딜 수 있는가, 혹은 ‘너’의 냄새를 환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된다. ‘언어화되기 이전의 세계’인 냄새에 대해 쓴다는 것은 에세이의 불가능에 접근하는 작업이다(188쪽). 이를테면 대만 타이페이의 야시장에서의 부패한 듯한 음식의 냄새, 캄보디아 시엠립의 시장에서 맡았던 흙과 천과 향신료가 뒤섞인 냄새, 홍콩의 뒷골목에서 나는 도교 사원의 향 냄새와 음식 냄새의 조합 같은 것. 낯설고 기묘하고 매혹적인 타자성의 냄새들(192쪽). 장소에 속해 있다는 감각은 그 장소의 냄새에 의해 촉발되고 유지된다. 냄새는 침묵으로 다가오지만, 냄새의 기억은 가끔 유령처럼 나타나 시간을 역행한다. 가령, 사랑이 있었다는 것은, 그 냄새에 반응했던 어떤 몸의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189쪽). 음식의 감각도 그 사랑의 잔존을 호출한다. 같은 맛을 음미하던 미각적 기억이 오롯이 살아나는 순간이 있다. 그때 그 각별한 감각의 복원은 사랑이 실재했음을 우연히 드러낸다. 글쓰기가 되살리는 것도 그 감각이 재구성되는 불시의 순간이다(39~40쪽). 그러므로 저자는, 영화와 에세이와 같은 예술에서 우리를 찌르는 것은 줄거리가 아니라, 예기치 않게 나타난 세부, 그 세부들이 만드는 ‘질감’이라고 말한다(48쪽).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에세이스트를 수집가에 비유하기도 한다. 수집가로서의 에세이스트는 사물을 기능적인 용도에서 해방시키고, 창의적인 병치를 통해 또다른 소우주를 만드는 자이다. 사물에 대한 쓰기 과정에서 ‘나’는 사물에 의해 재구성되고, 사물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인식한다(201쪽). 저자는 책장 두 칸에 여행지에서 모은 잡동사니들과 다른 사람들이 사다 준 작은 물건들을 모은다. 간혹 어떤 물건들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204쪽). 그가 스스로 ‘나’의 시간과 공간과 육체를 다 파악하고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나’라고 믿는 것은 정리할 수 없는 관계들이 뒤엉킨 가상의 한 장소이다(103쪽). 기억들을 교차시키고 뒤섞고 응축시키는, 오밀조밀 빼곡하게 모여 있는 물건들이 놓인 소박한 분더카머를 닮은 곳. ‘쓰는 자’는 ‘속한 자’가 아니라 그 ‘분리’를 경험한 자이다 상실된 타자를 자기 안에 내면화하는 작업은 완성될 수 없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고양이 ‘보리’를 떠나보내고 애도하는 과정을 겪으며 ‘완결을 거부하는 형식’인 에세이로 향한다. 애도의 에세이는 애도를 지속하기 위한 공간, 죽은 자와 남아 있는 자가 ‘계속해서’ 만날 수 있는 다른 장소를 만든다. 그럼으로써 발생하는 슬픔과 통증의 리듬. 리듬은 완결되지 않고 반복되면서 미지의 파동을 일으킨다. 이를테면, 다른 어떤 고양이를 환대한다고 해도, ‘그 하나의 고양이’에 대한 애도는 완결되지 않는다. 무력한 기억력이 살아 있는 한, 완성될 수 없는 애도, 그리고 ‘너’의 목소리가 들리는 글쓰기일 뿐이다(150~152쪽). 또한 에세이는 부칠 수 없는 편지를 대신하는 글쓰기이다. 글쓰기는 언어가 투명할 수 없다는 좌절감 혹은 그 불가능성에서 시작되므로. 부재하는 사람을 향한 편지 쓰기는 저자에게, 전달의 불가능함을 무릅쓰는 일이다. 거울을 통해 ‘울고 있는 나’를 본다는 것은 시각적 ‘접촉’이지만, 동시에 거리 두기인 것처럼. 슬픔에 몸부림치는 자신을 대면하며 슬픔의 존재로서의 ‘나’의 경계를 가늠해보는 것처럼. 어떤 글쓰기는, 개인의 내밀한 시간이 지배적인 이념과 ‘사회세계의 칸막이’에 의해 규정되고 있음을 드러낸다(99~100쪽). 다만 편지가 끝내 부쳐지지 못하거나 어긋나게 되었을 때, 편지의 현실적 기능은 상실되지만, 오히려 문학적인 것이 시작되기도 한다(129~130쪽). 일기 또한 마찬가지다. 내면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의 접촉과 반응을 통해 형성되는 의식의 문제이기에(113쪽). 그런 의미에서 모든 전율적인 픽션에는 에세이적인 것이 있고, 자신을 둘러싼 것들에 대한 모든 에세이는 이미 허구적이다. 갈망하면서 단념하고, 끊어지면서 다시 어긋나고, 문득 투명해지는 글쓰기의 예기치 않은 리듬은 문장 위의 ‘나’를 ‘당신’과 우연히 연결시킨다(9쪽). 에세이스트는 결론을 아는 자가 아니라, 쓰면서 문득 다음 문장을 발견하는 자이다. 글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모르면서 글쓰기가 시작되었다면, 그리고 계속해서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면, 삶의 편린들과 잔해 속에서 쓰고 있다면, ‘그’가 머물던 공간과 ‘내’가 떠나온 시간 사이의 몽타주를 그리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에세이를 쓰고 있다. _작가의 말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