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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물을 채우지 못한 죄
막대기로다 양관삼첩의 밤 금부도사의 위명 몽환의 나라 하하하하 외로운 임금 강진 선비 변사경 한밤의 군신 죽음의 열쇠 곰 ‘웅’ 상감은 무얼 하시려고 금문을 연 자 경회루의 봄 진헌사 재회 도하선 집현전의 변고 찢어진 집현전 안동 향교 익숙한 눈빛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신숙주 학사들의 시험 세종의 침묵 견의불위 숙현의 귀향 입 모양에 맞춘 글자 분노로 쓰인 표문 명 조정의 분노 꿈결같이 흐른 세월 되돌릴 수 없는 조칙 회한의 눈물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너면 훈민정음 |
金辰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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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침묵하던 세종은 이윽고 가빠진 숨을 고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사정전의 나무 기둥을 울렸다.
“선왕 칠 년에 이미 말 삼천 필을 바쳤소. 그리고 그 이듬해 다시 말 만 필을 바친 건 경들도 잘 알 것이오. 그런데 이제 또다시 소 육천 마리에 말 오천 마리를 바치라니……. 더는 없소. 아니, 있을 리가 있소?” 세종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으나 그 끝에는 미세한 떨림이 스쳤다. 하지만 신료들의 상주는 멈출 줄 몰랐다. “불충이옵니다! 이것은 전하에 대한 불충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에 대한 불충이옵니다. 국조께서 이미 이소역대以小逆大의 네 글자로 중국을 섬길 것을 삼엄히 명하신 바 이에 어긋나는 일은 크게 처벌하셔야 온당하옵니다!” 세종의 손끝이 마치 무너지는 마음을 붙잡으려는 듯 팔걸이를 눌렀다. “아니오, 기다리시오.” 세종은 친히 붓을 들어 서찰을 썼다. 번지는 묵향 속에 그의 결심이 스며들었다. --- p.9 “바람만 새고, 떨림이 비어 소리가 공허하다는 말이더냐?” “그렇사옵니다, 전하.” 잠시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던 세종은 이내 웃으며 장영실을 향해 농을 던졌다. “너는 어찌하여 가여운 짐승들의 목을 헤집어 놓았느냐. 차라리 저 요란한 조정 대신들의 목청을 떼어 가져오면 어떻겠느냐?” “…….” “하하하! 사정전이 얼마나 고요할지 생각만 해도 마음이 평온하구나.” “송구하옵니다, 전하.” “또 명의 사신은 어떻겠느냐. 그것도 해낼 수 있겠느냐? 하하하!” 장영실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세종의 웃음에 눈물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저 웃음 뒤에 얼마나 안타까운 처절함이 있을 것인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 오늘의 이런 농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상감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자 장영실은 종내 눈물을 비치고 말았다. “왜 그러느냐?” “전하의 농이 너무 우스워 눈물까지 나옵나이다. 하하하.” “웃기기는 네가 웃겼다. 해낼 수 있겠냐 물었더니 의뭉스레 넘기는 것이 딱 벼슬아치로다! 하하하하!” --- p.25 두 사람은 같이 웃었다. “손가락을 내밀어요.” 숙현이 손가락을 내밀자 손소는 언제 손에 쥐고 있었는지 날카로운 칼로 숙현의 손가락을 베었다. 그러고는 이내 자신의 손가락을 베고 두 손가락을 한데 합쳤다. “숙현 언니와 저 손소는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는 날은 같이할 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하나이다.” 손소의 목소리는 비장했고 숙현 또한 안타까운 마음에 눈을 감고 진심으로 이 가엾은 여인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빌었다. --- p.33 “처벌하셔야만 하옵니다!” 처음에는 미적지근하던 신하들도 성현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말이 나오자 곧장 마음을 바꾸어 버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중신들은 석리가 예를 어겼음을 성토했고 성현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조정은 한 덩어리가 되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세종의 눈빛이 흐려졌다. 자신이 왕좌에 앉은 게 아니라 공자의 제단 앞에 무릎 꿇은 제자들 사이에 끼어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세종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 떨림은 분노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조정이 아니라 공자의 조정, 조선의 조정이 아니라 중국의 조정임을 자각한 군주의 절망이었다. --- p.64 경회루의 밤공기는 차가웠으나 물 위에는 희미한 등불이 떠있었다. 그 앞에 세종과 장영실이 서자 밤바람이 지나가며 등불을 흔들었다. 그 불빛이 물결 위에 부서지며 세종의 얼굴을 비췄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영실아, 글이 물과 같이 흐른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누구에게나 도달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기에는 글자가 너무 어렵사옵니다. 학식이 깊은 사대부라 할지라도 노상 획을 빼먹거나 헷갈려 하니 백성이야 말할 나위도 없사옵니다.” “그래서 말이다…….” 세종은 딱히 마음속에 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어쩌면 장영실이라면 자신을 이해할지 모른다는 생각, 아니 알아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으나 이 외로운 군주는 끝내 가슴속에 가두었다. --- p.72 세종의 눈빛 또한 뜨겁게 타올랐다. “그대들은 중국의 글만이 하늘이라 말한다. 그러나 나는 묻겠다.” 세종의 목소리 또한 분노로 떨었다. “조선의 백성은…… 하늘의 자식이 아니란 말인가?” 한마디를 던지고 난 세종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윽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의 시선이 잠시 바닥에 머물렀다. 손등이 무심히 눈가를 스쳤으나 그것이 무엇을 지우려는 몸짓인지는 누구도 감히 묻지 못했다. 곧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등을 돌렸고 집현전에는 싸늘한 정적만이 내려앉았다. --- p.164 흑의인의 귓전이 떨렸다. 내관이 비추는 등불 빛이 기둥 하나를 스치며 앞으로 지나갔다. ‘지금이다.’ 흑의인은 손에 든 예리한 단검을 가슴 앞으로 끌어 올렸다. 걸음 소리는 계속 다가왔고 흑의인은 머릿속으로 거리를 계산했다. 이제 두 걸음, 두 걸음만 귀에 들어오면 모든 게 끝이었다. 흑의인은 온 신경을 귀에 집중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호흡을 절반만 들이쉰 뒤, 검을 잡은 손에 힘을 모았다. 단 한 번의 도약이면 왕의 옆구리였다. --- p.189 부침의 원흉이 그저 몇몇 사람이 아닌, 과업을 향해 가는 길의 거스름임을 알면서도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중신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몰라주는 것인가. 어째서 한석리처럼, 자신처럼 함께 조선을 걱정해 주지 않는가. “왜 우리만 글자가 없는 것이오?” 세종의 목소리가 약간의 격정을 담아 흐르다가 점차 메말라 갔다. 오랜 과로와 온갖 질환으로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은 마음의 활기가 덜해지자 힘을 잃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 잘 생각해 보시오. 왜 우리만 글자가 없는지를.”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던진 뒤 힘겹게 의자에서 일어난 세종은 내관에게 몸을 의지한 채 사정전을 나섰다. 비틀거리는 걸음 뒤로 중신들의 침묵만이 남아있었다. --- p.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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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명나라의 거대한 그늘 아래 있다. 명나라는 조선의 처녀와 공물을 수탈하고, 조선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철저히 통제한다. 세종은 백성이 억울함을 당해도 호소할 길이 없는 현실에 분노한다. “고작 ‘살려주시오’ 이 한마디를 적지 못해 백성이 죽어간다. 그대들이 읽는 성현의 도리가 고작 백성을 벙어리로 만드는 것이더냐.” 세종은 장영실과 함께 비밀리에 ‘소리’를 연구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좁쌀을 뿌리고 소리를 질러 그 파동이 만드는 무늬를 눈으로 확인하며, ‘보이지 않는 소리를 보이는 그림(글자)으로 만드는’ 혁명을 꿈꾼다.
안동의 몰락한 양반가의 총명한 규수 권숙현은 우연히 만난 금부도사 한석리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사물을 관찰하여 ‘연잎 우의’를 만들어 낸 그에게서 그녀는 참된 앎을 배운다. 서로에게 운명을 느낀 두 사람이지만, 시대는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명나라 환관 강백창이 조선에 금혼령을 내리며 행패를 부리자, 그들의 운명은 거대한 격랑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 각자 다른 길을 걸어가야만 했던 연인의 비극이 시작된다. 한석리는 세종의 밀명을 받고, 과거 태종 시대에 역모로 몰려 죽은 스승 윤의겸의 비밀을 추적한다. 끈질긴 추적 끝에 찾아낸 두 권의 금서. 석리는 그 낡은 책 속에서 충격적인 진실에 도달한다. 그는 ‘반화요설’이라 불리는 이 위험한 진실 때문에 스승이 죽임을 당했음을 알게 된다. 이는 세종의 문자 창제가 단순한 발명이 아니라, 잃어버린 역사의 소리를 되찾는 행위임을 증명하는 열쇠가 된다. 세종이 새 글자를 만든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대부들은 “천자의 글을 버리고 오랑캐가 되려 한다.”라며 집단 반발한다. 조정의 중신들은 왕을 압박하고, 명나라의 감시는 날이 갈수록 숨통을 조여온다. 안으로는 신하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고 밖으로는 제국의 위협에 직면한 세종.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길 위에서, 세종은 자신의 안위가 아닌 백성의 미래를 위한 최후의 결단을 내리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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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은 글자가 아니라, 조선의 운명이었다.”
팩트와 픽션을 넘나드는 거장, 김진명의 귀환 한류의 원천, 그 위대한 탄생의 비밀이 밝혀진다 『세종의 나라』 대한민국 대표 작가 김진명이 돌아왔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고구려』, 『풍수전쟁』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대한민국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 팩션의 대가. 그가 이번에는 우리 민족 최고의 유산 ‘한글’을 들고 왔다. 우리는 훈민정음을 ‘과학적인 문자’, ‘세종대왕의 애민정신’ 정도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묻는다.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명나라의 눈을 피해, 사대주의에 젖은 기득권 신료들의 반대를 뚫고, 어떻게 왕 혼자서 이토록 완벽한 문자를 만들어 낼 수 있었는가. 『세종의 나라』는 이러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치밀한 자료 조사와 거침없는 상상력을 더해, 훈민정음 창제 뒤에 숨겨진 목숨을 건 비밀 프로젝트와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소리 없는 전쟁터였던 경복궁, 사라진 금서와 스승의 죽음,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충격적인 진실 ‘반화요설反華妖說’. 소설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을 넘어, 한 편의 스릴러 영화처럼 긴박하게 전개된다. 사랑하는 여인을 잃을 위기에 처한 금부도사 한석리,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당찬 여인 권숙현, 그리고 고독한 군주 세종.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각자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김진명 작가는 말한다. “한글은 민족 정체성의 뼈대이자, 외세 속에서 우리 존재를 지켜낸 견고한 방패이다. 또한 인류사적으로 보아도 문자를 권력의 도구에서 인간의 권리로 이동시킨 문명의 전환점이다.”라고. 지금 전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 그 폭발적인 에너지의 근원이 바로 500년 전 세종이 뿌린 씨앗에 있음을 『세종의 나라』는 증명해 보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한글로 생각하고, 한글로 소통하며 살아간다. 『세종의 나라』는 500년 전 가장 고독했던 왕의 위대한 선택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되새기게 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꼭 읽어야 할 필독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