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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1
감사의 말 19 1장. 각성 운동과 사회의 자아 침입 역사적 시간에 대한 감각의 쇠퇴 23 치료적 감수성 28 정치에서 자기 성찰로 37 고백과 반고백 42 내면의 공허 49 사사주의에 대한 진보주의의 비평 55 사사주의에 대한 비평: 리처드 세넷의 ‘공적 인간의 몰락’ 59 2장. 우리 시대의 나르시시즘적 성격 인간 조건의 은유로서 나르시시즘 66 심리학과 사회학 69 최근의 임상 문헌에서 나르시시즘 74 사회가 나르시시즘에 미치는 영향 80 체념한 자의 세계관 92 3장. 성공 방식의 변화: 앨저에서 행복한 매춘부로 노동 윤리의 본래 의미 97 ‘자기 훈련’에서 ‘승자 이미지’를 통한 자기 홍보로 102 성과의 퇴색 107 사회적 생존의 기술 112 개인주의 예찬 117 4장. 사이비 자각의 범용함: 정치와 일상생활의 연극 상품 선전 127 진실과 신빙성 131 광고와 선전 132 스펙터클로서의 정치 136 가두연극으로서 급진주의 142 영웅 숭배와 나르시시즘적 이상화 145 나르시시즘과 부조리극 149 일상생활의 연극 154 루틴으로부터 탈출로서의 아이러니한 거리 두기 161 출구 없음 163 5장. 스포츠의 전락 놀이 정신 대 국민 향상의 열망 170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 172 스포츠 비평 175 운동경기의 진부화 182 제국주의, 그리고 분투하는 삶에 대한 숭배 184 단체에 대한 충성과 경쟁 190 관료제와 ‘팀워크’ 196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산업 197 도피로서의 여가 202 6장. 학교 교육과 새로운 문맹 마비 상태의 확산 206 역량의 위축 209 현대 교육제도의 역사적 기원 213 산업 규율에서 인력 선별까지 215 미국화에서 ‘생활 적응’까지 219 기초교육 대 국방교육 224 민권운동과 학교 228 문화 다원주의와 새로운 가부장주의 231 다원대학의 대두 234 문화 ‘엘리트주의’와 그 비판자들 239 교육이라는 상품 242 7장. 재생산의 사회화와 권위의 붕괴 ‘노동자의 사회화’ 248 소년법원 251 부모 교육 254 허용성의 재검토 258 진정성 숭배 264 ‘기능 이전’의 심리적 영향 268 나르시시즘, 조현병, 가족 270 나르시시즘과 ‘아버지의 부재’ 273 권위의 포기와 초자아의 변형 277 가족과 여타 사회통제 기관의 관계 284 직장 내 인간관계: 가족 같은 공장 287 8장. 감정으로부터의 도피: 성 전쟁의 사회심리학 개인적 관계의 진부화 295 성별 간 전투와 그 사회사 297 성 ‘혁명’ 300 일체감 304 페미니즘과 성 전쟁의 격화 306 적응 전략 309 남성 환상 속의 거세하는 여성 314 사회주의에서 남자와 여자의 영혼 320 9장. 삶의 소생에 대한 부서진 믿음 노년에 대한 두려움 324 나르시시즘과 노년 326 노화에 대한 사회적 이론: 계획적 구식화로서의 ‘성장’ 330 수명 연장: 생물학적 노화 이론 334 10장. 아버지 없는 가부장주의 새로운 부자와 과거의 부자 342 지배계급으로서 경영직과 전문직 엘리트 346 진보주의, 그리고 새로운 가부장주의의 부상 348 복지국가에 대한 자유주의의 비판 350 관료적 의존과 나르시시즘 356 관료제에 대한 보수주의의 비평 361 후기: 나르시시즘 문화에 대한 재고 문화와 성격 369 1차적 나르시시즘 이론: 지복 상태에 대한 갈망 372 파우스트적 기술관 377 20세기 영지주의와 뉴에이지 운동 379 미주 385 |
Christopher La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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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의 종말이 화염에 휩싸여 올지 얼음에 뒤덮여 올지, 굉음을 내며 닥칠지 희미한 흐느낌으로 끝날지에 대한 물음은 이제 예술가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임박한 재앙은 일상의 근심거리가 되었고, 너무 흔하고 익숙해서 이제 아무도 어떻게 재앙을 피할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람들은 생존 전략, 장수법, 건강과 마음의 평화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분주하다.
--- p.23 오늘날 만연해 있는 열정은 이 순간을 사는 것, 과거 세대나 미래 세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을 향한 열정이다. 우리는 역사적 연속성의 감각, 과거에서 시작하여 미래로 뻗어 나가며 연속되는 세대에 대한 소속감을 빠르게 잃어 가고 있다. --- p.25 나르시시스트는 때로 자신이 전능하다는 환상을 품기도 하지만, 자존감을 확인하려 타인에게 의존한다. 그는 자신을 우러러보는 사람들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는 가족의 유대와 제도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그것이 그에게 홀로 서거나 자기의 개인성을 자랑스럽게 뽐낼 자유를 주진 못한다. 이러한 자유는 오히려 불안을 증폭하는데, 이를 극복하려면 타인의 관심 속에 비친 ‘과대한 자기grandiose self’를 보거나 명성·권력·카리스마를 발산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관련지을 수밖에 없다. 세상은 단호한 개인주의자에게는 자기 설계대로 만들 수 있는 텅 빈 황무지이지만, 나르시시스트에게는 거울이다. --- p.32 기대가 축소되는 시대에는 프로테스탄트적 미덕이 더 이상 열광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인플레이션은 투자와 저축을 갉아먹는다. 광고는 빚지는 데 대한 두려움을 누그러뜨려서, 소비자에게 돈은 나중에 갚아도 되니 당장 사라고 부추긴다. 미래가 위협적이고 불확실하다면, 오늘 누릴 즐거움을 내일로 미루는 사람은 바보일 뿐이다. 우리의 시간 감각이 근본적으로 변했기에 노동 습관, 가치관, 그리고 성공의 정의도 바뀌었다. 이제 세속적 삶의 목표는 자기계발이 아니라 자기보존이 되었다. 무법적이고 폭력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사회에서는 일상생활의 통상 조건이 과거 암흑가에 국한되던 조건을 닮아 가는데,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각자도생으로 요령껏 살아간다. 번영은 고사하고 생존만 바라지만, 생존 자체에도 점점 더 많은 소득이 요구된다. --- pp.97-98 병리적 형태의 나르시시즘은 생애 초기의 무력한 의존감에 맞서는 방어에서 비롯한다. 이에 대해 ‘맹목적 낙관’과 개인적 자족이라는 과대한 환상으로 대응하려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의존 경험을 성인기까지 연장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와 부모로서의 역량 개발을 통해 개인적 자유와 힘의 불가피한 한계(인간 조건에 내재하는 한계)를 받아들였을지 모를 사람들에게도 완화된 형태의 나르시시즘을 조장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사랑과 노동에서 만족을 찾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동시에, 총체적 만족이라는 조작된 환상이 개인을 에워싸고 있다. 새로운 가부장주의는 자기 극복이 아니라 자기충족을 설파한다. 이는 나르시시즘적 충동을 편들고, 성인이 되어 적절한 조건 아래 한정된 영역에서나마 자립하는 즐거움으로 이런 충동을 조절하는 일을 가로막는다. --- pp.359-360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이처럼 나르시시스트를 유명인으로 끌어올릴 뿐만 아니라, 누구나 지니는 나르시시즘적 특성을 부추기고 강화한다. 이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나르시시즘을 너무나 두드러지고 그토록 매력적인 형태로 드러내기, 부모의 권위를 약화하여 아이의 성장을 어렵게 만들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온갖 형태의 관료적 의존을 창출하기 등이 그 방식이다. --- p.361 20세기 우리 삶의 방식을 나르시시즘 문화로 규정하는 일이 정당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처럼 과도한 합리성과 합리성에 맞서는 광범위한 반항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적 감수성의 원천은 하나이다. 둘 다 그 뿌리는 오늘날 수많은 사람을 괴롭히는 집이 없고 추방당했다는 느낌, 고통과 박탈에 대한 취약성 심화, ‘다 가질’ 수 있다는 약속과 그들에게 주어진 한계라는 현실 간의 모순에 있다. --- p.3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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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나르시시즘 시대’를 살고 있다
파편화와 개인주의의 시대를 일찍이 예언한 문화비평의 필수고전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전미도서상 수상작 나르시시즘은 어떻게 일상이 되었는가? 50년 전 미국을 통해 지금을 보다 2020년대에 들어 유독 눈에 띄게 들려오는 키워드가 있다. 바로 나르시시즘이다.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고민하며 ‘나르시시스트’라는 단어로 상대를 진단한다. 서점가에서는 심리학과 인문학, 자기계발 등 분야를 막론하고 나르시시즘을 다루는 책이 잇따라 출간되었다. 이런 접근에서 나르시시스트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처럼 일상 속 인간관계를 망가뜨리는 문제적 인간 유형으로 규정되었다. 물론 나르시시스트가 새롭게 등장한 인간 유형인 것은 아니다. 나르시시스트들은 동화 〈백설공주〉 속의 왕비처럼 오래전부터 수많은 작품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 왔다. 그런데 왜 지금에야 나르시시즘이 문제적 성격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왜 나르시시스트가 일상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유형이 되었을까? 무려 반세기 전 같은 질문을 던진 학자가 있었다. 미국의 문화비평가인 크리스토퍼 래시는 『나르시시즘 문화』를 통해 1970년대 미국에서 나르시시즘이 어떻게 유행할 수 있었는지를 치열하게 해부했다. 나아가 1970년대를 나르시시즘 문화라고 대담하게 선언한 결과, 이 책은 리처드 세넷의 『공적 인간의 몰락』과 함께 나르시시즘을 논의할 때면 논외로 할 수 없는 고전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 책을 37년 만에 복간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나르시시즘이라는 개념의 기원을 파헤침으로써 그 단어의 해상도를 높이기 위함이다. 크리스토퍼 래시가 주목하는 1970년대 미국은 그로부터 50여 년이 흐른 현재와도 유사하다. 1970년대는 여러모로 종말론적인 시대라 할 수 있었다. 홀로코스트의 기억, 쿠바 미사일 위기의 여파, 히로시마 이후 가시화된 핵전쟁의 기류, 석유 파동, 천연자원 고갈과 생태적인 재난 등 각종 파국이 연달아 발생했다. 그 결과로 세계가 순식간에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졌다. 이러한 감정은 곧 도래할 밀레니엄과 맞물리며 한층 더 증폭되었다. 래시는 “이렇게 세상이 멸망하는구나. 쾅 하는 소리 없이 흐느낌과 함께”(T.S.엘리엇)라는 말처럼, 모더니즘 문학의 단골 소재로 쓰인 이 종말론적 감수성이 이제는 현대인의 일상적인 감정이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나아가 이 감수성은 “너무 흔하고 익숙해서” 무관심의 대상이 되었다고 말한다. 래시는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사회적 분위기가 어떻게 나르시시즘이라는 병리학적인 감정을 낳는지를 상세한 사례를 통해 독자에게 제시한다. 래시가 스케치한 이러한 1970년대의 시대적 감수성은 다시 현재로 이어진다. 기후 위기, 양극화된 정치, 극단적 빈부 격차, 전운이 감도는 지정학적인 위기 등으로 불안이 팽배한 현대에선 여전히 래시가 분석한 1970년대의 미국의 사회상과 맞닿는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나르시시즘이라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사회적 도피에서 비롯된 공허한 개인주의 래시는 나르시시즘과 나르시시스트의 정의를 다루고, 그런 인간상이 어떻게 1970년대 미국 문화에서 성장하고 드러나는지를 다루며 글을 연다. 그의 문제의식은 누구보다 예리하다. 그는 1960년대 이후의 미국을 “기대가 축소되는 시대”라고 이야기한다. “공허한 삶을 채우고 의미와 목적의 감각”을 더해 주었던 미국의 정치적 급진주의가 몰락한 이후의 풍경을 개념화한 것이다. 또한 래시는 이 시기를 관통한 수많은 정치적 사건(베트남 전쟁, 시카고 시위, 신좌파의 등장, 대학가의 혼란 등)을 “소독된 방식으로조차 기억하고 싶지 않”은 쪽으로 1970년대의 문화가 흘러갔다고 본다. 개인이 더 이상 정치적인 문제를 대면하려 들지 않으며, 그 대신 사적이고 탈정치적인 쾌락에 몰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 아래서 개인은 “생존 전략, 장수법, 건강과 마음의 평화를 위한 프로그램” 등으로 도피하고 만다. 정치로는 더 이상 삶을 개선할 수 없다는 무기력이 팽배해질수록 각 개인은 “역사적 연속성의 감각, 과거에서 시작하여 미래로 뻗어 나가며 연속되는 세대에 대한 소속감을 빠르게 잃어”버리고 자기계발에 몰두하게 된다. 개인주의가 일상화된 사회적 분위기는 개인에게 자기 자신만 소중하다는 생각을 심어 준다. 나아가 이들은 “개인의 안녕, 건강, 심리적 안정이라는 느낌과 순간적 환영”에 사로잡힌다. 자아도취와 과대망상 안에 머무르며, 시대적 공허함을 마주하기보다 그 공허함을 치료하려는 행위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의 나르시시즘은 비대한 자아에 몰두했던 고전적 의미의 나르시시즘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오히려 고통과 박탈에의 취약성이 강해지고,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는 공허한 약속과 그 약속을 이룰 수 없는 현실 간의 괴리에 갇힌 불안정한 자아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회에서 도피한 이들이 선택한 개인주의에는 타인과의 긍정적 관계망이 소멸된 개인적 삶의 황폐화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는 취약성, 생존주의 등의 키워드가 대두되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도 충분히 논의될 수 있는 문제의식이다. 래시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1970년대의 미국 문화 곳곳에 깃든 나르시시즘의 흔적을 파헤친다. 커트 보니것, 존 바스, 도널드 바셀미 등 포스트모더니즘 문학부터 정치, 광고, 스포츠와 가정교육, 자기계발서와 경영학 등 전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분야를 아우르면서 지금까지 어떻게 나르시시즘이 문화로 발전해 왔는지를 조망한다. 때로는 포스트모더니즘 소설가의 메타 픽션에서 나타나는 1인칭 고백이 타인에게 자아를 전시하는 퍼포먼스가 될 수 있는 이유를 분석하며, 또 때로는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가짜 뉴스와 선전으로 대중에게 표를 추수하는 당대 정치인의 행동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의 타락, 현재 지향적 쾌락주의로 전락한 소비문화, 진정한 자아의 성장 대신 자기 홍보를 권하는 자기계발서의 유행, 인맥 관리로 전락한 사교의 노동화, 자녀에게 강요하는 과잉 교육, 기술유토피아주의 등 당대의 도덕적인 쇠락을 짚어 내기도 한다. 여기에 덧붙여, 개인적 관계 속에 내포한 정서적 위험 등 인간관계 양상의 변화까지 매섭게 포착한다. 마지막으로 래시는 1970년대에 유행한 영지주의와 뉴에이지, 오컬트. ufo음모론 등 서브컬처를 통해 나르시시즘이 종교적 형태로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처럼 래시는 “조작된 환영”으로 이루어진 만화경 같은 동시대 미국을 조망하면서, 그 너머에 공동체와 역사성, 기성 질서, 가정이라는 안식처의 붕괴가 깔려 있음을 포착한다. 이 붕괴는 공적인 삶뿐만 아니라 사적인 삶도 하나의 부조리극으로 만든다. 그에게 “존재의 공포에 맞서는 최선의 방어는 사랑, 노동, 가정생활이라는 안온한 위안”이지만 그 위안은 이제 사라지고 말았다. 무너진 공동체와 자립하는 법을 잊은 자아 나르시시즘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 래시는 나르시시즘이 탄생한 배경으로 관료제와, 명성을 추구하는 미디어의 발달 등을 이야기한다. 래시가 강력하게 비판하는 관료제는 모든 것을 시스템화할 뿐더러 각 개인이 전문가적 능력을 기르는 자립의 기회를 박탈한다. “전문 기술 대부분을 기업에 넘겨준 탓에, 이제 그 자신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다. 가족은 생산 기능뿐만 아니라 재생산 기능도 대부분 잃었기에, 남성과 여성 모두 공인된 전문가의 도움 없이는 더 이상 자녀를 키우기 어렵다. 오랜 자조(self-help)의 전통이 위축되면서 일상생활을 꾸려 나갈 능력도 한 분야씩 차례로 침식되고, 이에 따라 개인은 국가, 기업, 기타 관료조직에 의존하게 되었다.” “나르시시스트는 때로 자신이 전능하다는 환상을 품기도 하지만, 자존감을 확인하려 타인에게 의존한다. 그는 자신을 우러러보는 사람들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는 가족의 유대와 제도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그것이 그에게 홀로 서거나 자기의 개인성을 자랑스럽게 뽐낼 자유를 주진 못한다. 이러한 자유는 오히려 불안을 증폭하는데, 이를 극복하려면 타인의 관심 속에 비친 ‘과대한 자기’를 보거나 명성·권력·카리스마를 발산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관련지을 수밖에 없다. 세상은 단호한 개인주의자에게는 자기 설계대로 만들 수 있는 텅 빈 황무지이지만, 나르시시스트에게는 거울이다.” 다만 나르시시스트가 시대적 감수성의 희생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르시시스트는 내면의 온갖 고통에도 불구하고 관료 제도에서 성공할 특성을 많이 갖추고 있다. 관료조직은 대인 관계에서의 조종을 중시하고, 깊은 개인적 애착의 형성을 억제하는 동시에, 나르시시스트의 자존감을 입증해 줄 인정을 제공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공허감을 극복하기 위해 치료에 의존할 수도 있지만, 직업에서는 상당한 성공을 누리는 경우가 많다. 그에게 개인 인상 관리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고, 성과 자체보다 “눈에 띄기”, “기세”, 승리한 기록을 중요하게 치는 정치조직이나 기업조직에서 복잡한 일을 능란하게 다루는 그의 능력은 큰 도움이 된다. “조직 인간”이 관료적인 “게임 인간”으로 바뀌면서, 즉 미국 기업계의 “충성의 시대”가 “경영 성공 게임”의 시대로 바뀌면서, 나르시시스트는 진가를 발휘한다.” 오늘날 각종 SNS와 그 안에서 탄생한 인플루언서가 만들어 낸 현상처럼 보이는 나르시시즘은 사실 디지털 플랫폼 이전부터 미국 문화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50년의 간극을 넘어, 지금 다시 래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 파편화된 시대에서 삶의 의미를 되찾는 법 우리는 이러한 래시의 문제의식이 현대 사회의 유행에서도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미국이라는 낯선 사례에도 불구하고 이런 분석에 충분히 공감하고, 이 논리를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다. 경험적이고 도덕적인 준거점, 진실의 기준이 사라져 버린 지금, 이제는 진짜 삶을 되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 공동체와 역사적 연속성이 약화되어 점차 파편화되는 우리 사회에서 과연 어떤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회복할 수 있는가? 『나르시시즘 문화』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 이를 사유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 5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적 간극을 잠시 옆으로 밀어둔 채 이 책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나르시시즘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현대 사회의 나르시시즘에 대해 고민해 본 적 있는 독자라면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는 이 논쟁적인 저작에 한 번 도전해보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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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즘에 대한 비판이 이토록 전면적인 시야로 펼쳐진 적은 없었다. …… 래시는 우리가 허영을 벗고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사회비평가의 첫 번째 임무를 눈부시게 수행해냈다.” - 밸러리 로이드 (《뉴스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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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았다는 사실에 누구나 죄책감을 느끼게 될 바로 그 책.” - 헨리 앨런 (《워싱턴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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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지적 장악력과, 오늘날의 가치중립적인 역사학과 사회학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도덕적 확신을 보여준다. …… 래시는 실로 중요한 것을 포착하고 있다.” -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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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미국 사회에 대한 래시의 격렬한 평가는 관찰의 예리함만큼이나 논증의 일관성과 이를 뒷받침하는 방대한 참고 자료의 폭으로도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 래시만큼 깊이 있는 통찰과 지성, 역사적 전문성을 갖추고 글을 쓰는 이는 드물다.” - 《커커스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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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의 가장 빼어난 사례. …… 이 책은 독자를 도발하고 놀라게 하며, 저자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도 논쟁하게 만든다. …… 근본적으로 중요한 책이다.” - 브루스 매즐리시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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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적일 만큼 영리하고, 놀라우리만치 정확하며, 독특하게 강력하고 통찰력 있다.” - 앨런 울프 (《뉴 리퍼블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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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시는 당대의 경험을 놀라울 만큼 폭넓게 포착했다. 그의 수많은 통찰은 오늘날 오히려 더 진실하게 다가온다. …… 독자들은 래시가 던지는 빛 속에서 위안을 찾고 싶어질 것이다.” - 리 시걸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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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시는 우리 문화의 심장부를 꿰뚫었다. 인격과 이를 둘러싼 사회적 맥락에 대한 그의 통찰은 압도적이다. 용감하고 중요한 책이다.” - 마이클 로긴 (UC 버클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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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시의 웅변적인 글과 예리한 분석으로, 세상을 형성하는 문화적 힘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책이 만들어졌다. 개인주의와 공동체적 책임 사이의 균형에 대해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교훈을 주는 중요한 책이다.” - 《아마존》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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