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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만신의 작은 몸에 수많은 신들이 깃든 날이었다. 대신상에는 만신이 바지런히 떡살을 동냥해 만든 하얀 떡이 놓였다. 만신은 주홍빛이고, 초록빛이고, 검은빛인 새 무복(巫服)을 입고서 기녀처럼 곱디고운 창부(倡夫)를 만났고, 천녀님을 만났고, 장군님을 만났다. 마침내 말문이 열렸을 때, 갓 신을 받은 어린 만신의 걸음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의붓오라비를 향했다.
--- p.7 올려다본 도성 하늘에는, 삼 년 만에 한양 근방까지 도달했을 때 보였던 그것이 아직도 그대로 있었다. 그것은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스름하고 컴컴한 기운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개나 망아지 형상처럼도 보였다. 심지어 도성 안에서는 그것에게서 나는 옅은 비린내도 맡을 수가 있었고, 그 냄새는 분명 환령이 보낸 서한에 묻어 있던 것과 꼭 같은 느낌이었다. “저건 대체 무엇인지…….” 여우는 도성 하늘 가득한 그 기운을 올려다보며 무거운 숨을 토했다. 모든 것이 쉽지가 않았다. --- p.39~40 “이게 원래 우리 같은 상놈들이 집에서 키우면 크게 경을 친다는 꽃이거든. 그런데 이리 산이면 절벽마다 지천으로 늘어져 있어. 양반 나리들이라는 게 참 우습지 않아?” --- p.95 “고운 누이야, 내가 널 평생 지켜주겠다고 하였지. 헌데 내가 지켜주고 싶은 것은 네 육신뿐만 아니다. 나는 네 오라비로서 네 마음까지도 지켜주고 싶은 것이야. 여우 너는 정녕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있느냐?” “그러는 오라버니는요? 오라버니는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있는 게 맞아요?” --- p.179 허나 여우는 신을 모시는 몸이었고, 신을 모시는 몸은 이 조선 땅에서 가장 천한 몸이었다. 함부로 굴려도 좋았고, 함부로 해하여도 큰 처벌을 받지 아니한다. 신을 모시는 몸이란 사실을 숨기고 조선팔도를 떠돌아다니며 살지 않는다면, 잘해야 활인서로 들어가 의무(醫巫)가 될 뿐이고 대개는 무당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뿐 물건처럼 이리저리 굴려지는 계집의 삶을 살아내야 했다. --- p.3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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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K-스토리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 작가 김단비의 신작 소설!
만신의 운명을 타고난 소녀 여우와 신을 잇지 못한 가짜 박수 환령. 조선의 운명을 내건 의붓남매의 애틋한 이야기! "여우 너는 정녕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있느나? " "그러는 오라버니는요? " 조선 시대에 무당은 가장 천한 존재였다. 이성과 합리의 유학이 나라의 기반이었기에 괴력난신을 다루는 무속은 천시되며 배척당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속을 천하게 여기면서도 힘든 일이 있거나 나쁜 일이 생기면 용하다는 만신을 찾아 속을 털어놓고 굿을 의뢰하고 복을 빌었다. 김단비 작가의 신작 『여우비 나린다』는 그 천한 무가를 둘러싼 이야기다. 한양에서 가장 유명한 무가를 물으면 누구나 송가네를 말할 것이다. 송희란은 한양의 세도가들이 일이 있을 때마다 찾을 정도로 용한 만신이었다. 희란은 어느 날 어린 계집아이를 하나 데려온다. 화전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이름조차 받지 못한 채 식량을 축낸다며 구박받던 작은 아이. 희란은 그 아이에게 여우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의붓딸로 삼았다. 아이는 자랐고, 희란은 세상을 떠났다. 희란의 친아들 환령은 신기를 이어받지 못했기에, 또한 무가는 모계 세습이 원칙이었기에 원래라면 신딸인 여우가 희란의 뒤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여우는 신어머니 희란이 죽은 후 한양 땅을 홀연히 떠나버렸다. 3년이 지나 한양으로 돌아온 여우를 맞이한 것은 도성 곳곳에 내려앉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기운들과, 무속의 힘을 빌렸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보내진 습격자들, 그리고 이제 사내가 되어 송가네를 유지하고 있는 의붓오라버니 환령이었다. 이후 조선 제일가는 세도가인 이조판서 김조익 대감 댁에서 송가네를 찾으며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진실들과 마주하게 된다. 『새벽의 복사꽃』으로 제3회 K-스토리 공모전 일반문학/드라마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는 김단비 작가는, 이번 신작에서도 특유의 수려하고 서정적인 문장으로 시대를 둘러싼 아픔을 어루만진다. 조카 환령을 천민에서 다시 중인으로 만들고 싶은 박막년,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마음 붙이지 못하고 있던 김운, 신분의 무서움을 모르고 그저 자신의 마음에 충실한 하윤까지. 작가는 이 시대의 인물들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굴레에 매여 살아가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특히 이야기의 중심에 선 두 인물, 여우와 환령의 서사는 기구하고도 애틋하다. 신기 하나 없이 무당의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천민의 굴레를 쓴 환령과, 오라버니를 위해서 기꺼이 운명을 짊어진 여우. 서로가 사람으로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독자들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가장 천한 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빚어내는 이 애달픈 이야기는, 차별과 억압 속에서 스러져간 이들, 그리고 끝내 사랑과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친 이들을 향한 한바탕 위로의 굿거리와도 같다. |